예언과 시사

산상수훈과 바울의 구원론

중일사랑 2016. 9. 26. 20:21

언젠가 연세중앙교회 출석하던 성도가 혼란스러워 했다. 자기는 그 교회에서 율법주의적 설교를 듣고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것이다. 가령, 설교 중에서 주님이 오신다면 혹은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오늘 받는다면 오늘 회개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는 지옥에 간다고 했다는 것이다.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는 설교일 것이다. 반면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목사는 은혜의 설교를 하는데, 마음은 편하지만, 혹시 내가 이렇게 살아도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는 두려움도 느낀다고 하였다. 은혜의 설교를 따라야 하는가? 율법주의적인 엄격한 삶을 요청하는 설교를 따라야 하는가? 이것이 갈등이라는 것이었다. 

의사 출신이라는 미국의 서사라 목사는 자주 환상을 본다고 하고, 한국 전쟁도 예언했지만, 그녀가 한 끔찍한 말이 기억나는데 그것은 칼빈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다. 왜 칼빈이 지옥에 갔는지 이유를 주님께 물었더니, 칼빈은 내 말보다 (주님 말씀) 자기 생각을 더 믿었다고 헀단다. 칼빈은 한 번 구원이 평생 구원이다 라고 했는데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라. 결국 칼빈의 예정론이 잘못되어 지옥에서 고통받는다는 말이겠다. 서목사에 의하면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분의 말씀은 성경에서 빨간 글자로 인쇄되는데 (그런 성경이 있다) 그 말씀은 어떤 말씀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 그런데 서사라에 의하면 신학교수나 칼빈은 성경의 말씀을 전부 똑같이 중요하다고 보는 오류를 범한다. 사도 바울이 한 말이나 사도 요한이 한 말이나 또 다른 말이나 주님이 하신 말이나 똑같은 비중으로 중요시된다. 그런데 아니거든. . . 주님이 하신 말씀은 천지를 창조한 말씀이다. 그러면 그 말씀은 어떤 말씀보다 우위에 서야 하는데, . . 주님이 서사라에게 한 말씀이라는데, "내가 한 말을 믿어라. 다른 말들은 다 참고다!" 90퍼센트가 주님의 말씀의 중요성이고 나머지는 10퍼센트 비중을 갖는 참고다!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 이것을 기독교가 정통으로 믿는다. 한 번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선택을 받았기에 구원은 영원하다는 생각, 이것은 바울의 생각이라는 것이고, 여기에 비해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마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하는데, 왜 바울의 이신칭의를 정통 교리로 받아서 사느냐? 기독교는 잘못되었다는 것이 서사라의 주장이다. 

서 목사의 주장은 신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평신도들이 듣기에 과연 그럴듯 하고 맞는 말처럼 들릴 것이다. 그런데 서사라의 말은 참으로 성경을 파괴하는 사단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칼빈처럼 주님의 절대 주권을 주장하고 성경을 전체로 잘 이해했던 이는 역사상 다시 없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리고 그의 삶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기 부인의 삶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의 예정론은 이단적 가르침이고 이신칭의 교리는 잘못되었으며, 주님이 직접하신 말씀만 절대 신뢰하고 성경 나머지는 10퍼센트의 비중만 갖는 참조용이라는 식의 서사라의 주장은 계시관에서 그리고 구원론에서 아주 고약한 이단 사설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산상 설교와 바울 사도의 이신칭의 가르침은 서로 대치되고 모순되는가? 그렇지 않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곧 하나님은 날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나를 무죄하다고 선언하시고 (하늘 법정에서) 나를 자신의 자녀로 받아 주신다는 것이 이신칭의 교리이다. 즉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신칭의 교리는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의 구원론의 핵심이고 바울에 대한 새로운 시각 주창자들인 제임스 던이나 토마스 롸잇 같은 이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성경적 가르침이다. 

그런데 서사라는 선택 예정론도 무시하고, 믿음에 의한 구원론도 무시하고 오직 행위로 구원을 얻는 양 말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이단적 주장인가?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가르친 바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방식이며 성도들이 지양해야 할 이상이 된다. 특별히 서사라나 유사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이밀면서 이것 보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발라야 하는 것이지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지 않나? 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 중에서 서사라 목사, 큰 믿음 교회 변승우 목사, 박보영 목사 등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서사라를 제한 변목사나 박목사 등은 그런 주장을 한다고 보이지 않는다. 필자로서는 오늘날 우리 한국과 세계에서 정말 주님이 기뻐하는 종은 박보영 목사라고 생각하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산상설교와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은 모순되지 않고 어떤 관계인가? 우리는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이 얼마나 철저한 회개를 필요로 하는지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본다. 혹자는 바울 사도께서 율법을 이제 폐기되었다고 말씀하였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결코 그는 그런 적이 없다. 오늘날 기독인들에게도 율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이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기 때문이다 (롬 7:12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 율법은 신령한 것이다 곧 성령님의 감동으로 주어진 것이다). 물론 율법의 제의적, 구약 농경적 연관 법규는 성취되었다. 하지만 그런 법규들의 정신이나 다른 소위 도덕법은 종말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산상설교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의 삶을 말씀하고 계시다. 우리가 심판대에 설 때 하나님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제시된 기준을 가지고 정죄하시고 판단하실 것이다. 하지만, 천국이냐 지옥이냐? 의 구분 기준은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았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의 사실일 것이다. 믿은 성도들은 믿은 후에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기준해서 자기 삶을 쉼 없이 온전히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 가르침을 이상으로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한다. 그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날마다 회개하면서 우리는 한 걸음씩 이상에 다가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여 우리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자가 설혹 산상설교 가르침의 어떤 부분에 미치지 못했다 하자. 음욕을 품었다거나 미워 했다거나 하자. 그러면 간음죄, 살인죄를 저지른 셈이다. 그러면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그런데 회개하지도 않고 그런 죄를 반복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거듭난 (즉 위로부터 태어난) 성도라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요한 사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여기서 범죄치 아니한다는 진술은 현재 직설법으로 동작의 반복성을 암시한다. 즉 거듭난 자는 같은 죄를 반복하여 범하지 않는다. 곧 회개한다는 것이다. 혹은 같은 죄만 아니라 어떤 죄건 거듭 죄 가운데 빠지지 않는다. 즉 시간이 지날수록 거룩한 체질로 변화되어 간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에는 죄악과 아주 상관없는 성별된 삶의 수준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이런 진술에 어긋나게 같은 죄를 반복하거나 어떤 죄건 반복하고 철저하게 정말 온전하게 회개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거듭난 성도 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이다. 우리 삶의 열매 곧 도덕적 행동이나 사고를 보아 그 사람의 거듭남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바울 사도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지 바울 사도 자신의 생각이 아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것이지 자기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서사라님이 모른 사실은 사도 바울이 어떤 가르침을 베풀 때 그것은 자기 생각에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구약에 정통한 그가 구약의 가르침을 근거로 예수님의 구속사건들에 (십자가, 부활, 승천, 메시아 왕으로 좌정하심 등) 근거해서 끌어낸 것이며 그의 가르침은 전부 성령님의 감동에 의한 것이며 구속력에서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나 100퍼센트 동일한 무게를 갖는다. 즉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신적인 권위를 지니며 여타 사도들의 가르침 역시 그러하다. 

서사라가 들었다는 주님의 음성이나 보았다는 칼빈의 모습이 의문시되는 이유이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음성과 무슨 환상을 보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내용을 보건대 마귀적인 음성과 마귀적인 환상이 아닌가 의심된다. 

계시관에서 서사라님의 사고는 이단적이다. 주님의 말씀만 최고이고 나머지는 인간의 말이나 생각으로 오해하고 있다. 성경은 모두가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간 저자들을 방편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고 전부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 그리고 바울 사도의 이신칭의 가르침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지 사도 바울의 개인 생각이 결코 아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구약 사람들 역시 그러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자기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고자 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롬 4장, 9-11장). 구약에서 제사가 구약 신앙의 중심이었다. 제사 중에서 속죄제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였다. 자기 대신 짐승이 대신 자기 죄를 지고 죽어간다는 그 대속의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짐승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면서 자기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죄 용서를 받았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의 그림자였다. 

서사라님은 주님을 높이는 것 같으나 그분을 참으로 짓밟는 말을 하고 있다. 주님은 지상에 오신 목적을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였다 (막 10:45). 이 말씀은 곧 이신칭의 교리의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신 목적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 곧 선택된 사람들의 대속물 곧 속전으로 (죄값을 지불하는 돈) 드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이 날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 구원은 성령님의 내적 증거가 우리에게 있다면 (롬 8:15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확실한 것이고, 영원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주님 자신이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구원을 얻는다) 교리의 창시자이고, 구약 제사나 그것에 대한 평이한 설명인 사 53장의 대속의 죽음을 당하는 야웨의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이 이신칭의의 근거이다. 

주님은 또한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 중에 하나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즉시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하셨다 (눅 23:42-43). 이 사건은 우리의 행위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간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씀해 준다. 이 사람은 죽기 몇 분 전에 믿어 구원을 얻었다. 예수님은 이처럼 이신칭의 교리의 창시자이시다. 사도 바울의 사상은 모두 주님의 가르침과 구약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지 자기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 사람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선민이 되었기에), 신약 사람들도 그렇다. 그런데도 서사라는 자기 옳은 행실로 천국에 가는 양 말씀한다. 누가 과연 산상설교 가르침을 전부 지킬 수 있을까? 율법의 행위로, 자기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는 이 세상에 없다. 아무도 없다. 전혀 없다. 이러므로 서사라님은 주님을 높이는 듯 하지만 사실 주님을 모독하고 있다. 성경을 깔아 뭉개고 있다. 그러니 그녀의 사상이 위험하지 아니한가? 


서사라님의 사고를 공격하고자 이렇게 글을 적은 것은 아니다. 그녀의 주장이 맞는지 혼란스러워 할 평신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서사라님의 심사숙고와 반성, 그리고 사상 전향을 기도하고 기대해 본다.


요컨대, 주님의 산상 설교는 구원의 방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천국 백성된 성도의 삶의 이상과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반면 사도 바울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구원의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기준해서 (혹 구약의 율법을) 끊임 없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회개하여야 한다.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고 할 수 있는대로 주님의 가르침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맞추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 가슴을 치며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자기 부인과 기도의 삶, 많은 눈물과 고난을 통과할 때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이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목표를 주님이 우리 앞에 제시하여 우리로 좌절하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해 주신다. 그분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날마다 변화되어 가야 하고 그렇게 변화되고 있지 아니한가? 


덧 붙인다면, 예수님이 날 위해 돌아가심으로 내 죄를 몽땅 짊어지셨고 죄값을 갚아 주셨다는 확신을 얻었다면 주님을 믿는 믿음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셈이다. 그러면 그는 반드시 천국에 간다. 그러나 그것으로 안심할 수가 없다. 우리가 죽기까지 마귀는우리에게 기소장을 들이 밀 것이다. "너 같은 놈이 뭐, 천국에 들어간다고?" "그래 가지고 택도 없지! 나는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지!" 등등 우리를 약 올리고 기를 죽이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이 나의 죄 값을 몽땅 십자가에서 갚으시고 살아나서셔 지금 보좌 우편에서 날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을 너 마귀는 모르느냐? 나는 내가 범한 모든 죄를 회개했다!" 라고 호통을 쳐야 한다.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천국에서는 여기에서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어떻게 주님을 섬겼느냐? 에 따라 하늘에서의 상급과 대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천국과 신천(신)지, 음부, 낙원, 지옥 등을 언급하는데, 정리하자면, 음부는 재림 전에 죽은 불신자가 가서 고통당하는 곳 (최후 심판을 기다리는 곳), 낙원이나 천국은 믿는 성도가 재림 전에 죽어서 가는 곳 (영혼이 없는 자들). 신천지는 (이단이 이 좋은 말을 도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 세상이 벧후 3:10이하의 말씀대로 불로 태워져 정결케 된 이후에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된 상태이다 (롬 8:19이하). 그 신천지는 사 11:6-9에 묘사된 대로 자연계의 완전 평화, 곧 창조질서가 회복되는 상태일 것이다. 그런 신천신지의 세상은, 주님의 재림 시에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천한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할 몸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그리고 최후 심판을 통과한 성도들이 육신을 입고 부활체의 몸으로 들어가 거주할 곳이다.  


앞으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부활체로 변화될 것이고 (죽은 자는 무덤에서 부활한다), 소위 아마겟돈 전쟁과 (이는 통속 신학이 말하듯 중동 이스라엘과 적대 세력간의 물리적 무기 전쟁이 아니라, 교회와 사단의 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영적 전쟁의 성격이고, 주님의 함성 한 마디면 끝장이 날 것이다) 최후 심판이 있고 (소위 백보좌 심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불타서 완전 신천지로 개조되고 심판을 통과한 성도들은 각자 행한대로 신천지에서 집과 땅을 배당 받을 것이다 (눅 19:12이하에서 "열 고을 권세"나 "다섯 고을 권세" 참조). 계 21장의 새 예루살렘 성은 그 신천지의 서울로 추정되는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어린양의 신부 아내이니 이상화된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신천지에서 곧 영원한 세상에서 어떻게 대우와 상급을 받느냐? 는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떻게 주님을 섬기고 있느냐? 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순응해서 그분을 정말로 열성으로 섬긴 자들은 많은 상급과 고을을 얻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어 신천지에서 꽃 밭 노숙자로 영원을 지내야 할 것이다. 천국을 막연하고 추상적으로만 생각지 말고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죄와 저주가 제거된 모습이라고 구체화시킬 이유가 있다. 지금 우리가 지상에서 사는 삶은 길어나 80-100세가 아닌가? 그러나 신천지에서 삶은 영원 무궁한 삶이다. 그 삶을 준비함이 우리 여기서의 삶의 이유라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목표와 이상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구원의 길을 가르친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지상에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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