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시사

한국 좌파 사상 의식화의 시조 리영희의 무지몽매하고 거짓된 사상

중일사랑 2017. 10. 11. 22:19

문재인의 정신적 스승 리영희의 사상은 무엇인가? 문재인의 정체는 이것으로도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어리석은 민중들아, 잠에서 깨어 문재인의 정체를 보아라.


문재인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리영희, 이 사람의 화신들이 문재인 (소위 대통령), 김용옥, 박원순, 이재명, 임종석, 김이수 (소위 대법관), 추미애, 우상호, 김명수 (소위 대법원장) 등에게서 보인다. 이 자들은 리영희가 가르친 가르침에 세뇌 당하여 미국이나 자본주의는 악의 원천이고 중국 공산당이나 (모택동 등) 북한 김일성 체제는 인간 우선주의를 따르는 이상적 사회라 보는 것 같다. 보안법 철폐니 미군 철수니, 연방제 통일이니 하는 것들이 결국 이런 자들의 사고에서는 한민족의 주체성을 되찾는 일이라 본다.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단합하여 잘 살아보자는 것이겠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는 북한 인민을 김일성 민족으로 만들어 놓고 아래 남반부에서 자기를 흠모하고 앙모하는 소위 좌파들을 자본주의에 물든 잡종 정도로 보는 듯 하다는 것이다. 자유 대한민국으로의 전향을 거절하고 수십년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북으로 돌려보내었던 이인모 노인, 그는 김일성, 김정일에게 환대와 영웅대접을 받았었다. 그래서 원하는 곳은 모두 보여주라는 지시하에 감옥을 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보여주는데, 일반 감옥은 시설이 엉망이라 보여줄 수 없고 그래도 북한에서 최신 시실이라는 외국인들 수용하는 감옥에 데리고 가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소감을 물었다. 이인모 이 노인은 말이 없더니 재촉하니, "저런 데라면 나는 수 십년은 고사하고 1년도 못 버틴다"고 했다가, 북에서 꾸워다 놓은 보릿자리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김정일이가, "그래, 자본주의에 물든 놈은 역시 믿을 수가 없지. 모조리 없애 버려야 해!" 


[386의 고백] 나의 사상적 스승 리영희를 비판한다

『리영희와 左派는 더이상 사실을 속여서는 안된다』

모택동毛澤東과 문화혁명 일방 미화美化

반미反美·대한민국 현대사 왜곡

386을 사상적 혼돈으로 인도

리영희가 본 것은 사회주의 나라의 실재實在가 아니라 선전 문구였다.

레닌의 표현대로 리영희는 「쓸모 있는 바보」였다. 사실과 선전을 구분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속아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저주했던 어리석은 남자였다. 그것이 오늘 나의 눈에 비친 리영희의 모습이다.



2005 9월 월간조선 뉴스룸;

글쓴 이 이동호 (李東湖) 전前 전대협 연대 사업국장· 현現 북한 민주화 포럼 간사

1959년 울산 출생. 연세대大 신학과 졸업. 전대협全大協 연대 사업국장 겸 서총련 연대 사업국장, 전민련 결성준비위委 학생대표 역임. 북한 민주화 포럼 간사.



              

내 인생을 바꾼 리영희와의 만남

리영희 교수의 글을 처음 만난 건 1970년대 후반이었다. 나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유신 통치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20代 초반의 청년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반공 교육」에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기성 권위에 대한 도전과 문제의식이 주된 이유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너무 짧았고, 사상을 얘기할 만큼 내 공부가 깊지도 않았다. 다만 「공산주의는 악惡이고, 자본주의는 선善이다」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주장에 식상해 있었다.

그런 내게 리영희 교수가 쓴 「전환 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은 충격이었다. 이승만李承晩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은 일제日帝의 앞잡이였고, 일제日帝에 저항하였던 세력은 우리가 빨갱이라고 저주했던 左派(좌파)라고 주장했다.

 

식민지 해방 운동의 주역은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을 건설한 김일성金日成 세력이었고, 내가 대한민국의 은인이라고 여겼던 미국은 흉악한 음모를 지닌 대한민국 건국의 배후 조종자였다. 대한민국은 자주 독립국이 아니라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이제까지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은 다 허물어졌다. 나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알고 있었던 知的(지적) 저능아였다. 리영희의 책에서 알게 된 공산주의자들은 높은 도덕성과 숭고한 인간애를 지닌 이 시대 최고의 우상이자 영웅들이었다.

 

나와 리영희의 만남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나의 스승 리영희는 내 인생의 좌표였고 길잡이였다. 그는 나의 삶의 행로를 바꾸었다. 태어나서는 안 될 사생아 대한민국을 지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회 혁명이 필요해 보였다. 공산주의 사상만이 유일한 代案이었고, 다른 사상들은 인간을 교묘하게 속이는 위선의 허접스러운 사상이었다. 나의 사회주의자의 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청년 시절 나의 이런 신념은 한 번도 도전 당하지 않았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1990년대 초반 소련의 붕괴와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이은 붕괴는 내게 리영희와의 만남만큼 충격이었다. 탈북자들과 언론을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의 참혹한 실상은 사회주의와 주체의 나라 북한에 대한 동경을 깨부셨다. 공산주의 나라에는 높은 도덕성과 숭고한 인간애가 없었고, 자본주의 나라보다 더한 독재와 관료주의, 인간에 대한 지독한 소외만이 있었을 뿐이다. 내 청년기의 사상과 행동은 정당성을 상실했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전두환全斗煥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진지한 성찰 없이 사회주의를 택했던 나의 비非 지성적 태도가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나를 사회주의로 이끌었던 리영희 교수의 저작들을 다시 한 번 정독했다. 한 시대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개인으로서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자 하려는 게 아니다. 이건 진지하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이다.

 

리영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한편에서는 좌경 의식화의 원조로, 다른 한편에서는 386의 「사상적 은사恩師」로 불린다. 대한민국의 좌경화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리영희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한 인물이다. 그가 386에 끼쳤던 영향을 감안하면 그런 평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1989년 한겨레 신문 入北 취재 계획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리영희 당시 한겨레 신문 논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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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는 지난 3월에 발간된 「대화」라는 책에서 소년 시절 사회주의社會主義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외삼촌 최모린을 존경했다고 밝혔다. 그 다음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거부巨富였던 외조부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 사라진 뒤 독립군의 일원이 되어 세 번에 걸쳐 외조부의 재산을 털고 끝내 외조부를 총으로 죽인 머슴 문학빈을 (그 후 일본군에 협조한 것으로 밝혀짐) 憧憬(동경)하며 성장했다고 말했다.

리영희는 미군 통역관으로서의 군軍 생활과 외신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軍의 불합리와 부패, 그리고 당시 기자 사회에서 나타난 부조리와 연줄 관계에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리영희는 「그 대안代案으로서 중국 혁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는 중국 毛澤東(모택동)의 중국 사회주의 혁명과 1965년에 일어났던 文化革命(문화혁명)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의 사상적 기조를 형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그후 일관되게 친북親北 논조를 유지하면서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사회주의국가에 대해서는 동경하는 태도를 견지해 오고 있다.

 

모택동毛澤東과 문혁文革에 (문화혁명) 대한 동경

[毛澤東 어록집을 들고 환호하는 홍위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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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는 모택동毛澤東에 대한 개인숭배를 일방적으로 합리화했다. 리영희는 모택동毛澤東의 공산 혁명과 문화혁명을 동경하고 미화했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그의 저서에 나타나는 일관적인 특징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조롱, 철저한 반미反美의식, 대한민국에 대한 자학적 역사인식이다.

 

리영희는 1974년 발간된 「전환 시대의 논리」에 수록된 「대륙 중국에 대한 시각 조정」에서 毛澤東과 문화혁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리영희는 쿠바 특파원인 루이 암스트롱의 글과 한국 외국어大의 안경준 씨의 글을 인용한다:

『새로운 대大 약진이 마련되고 있다. 집단 경제는 모든 시련을 넘어 인민공사는 반석 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 모든 기적을 나에게 보여 준 이 나라 인민에게 축복이 있어라』(루이 암스트롱)

 

(인민 공사에 대한) 인민의 뿌리 깊은 개인 경영 사상과 집단 수용소에 대해 느끼는 환멸감은 자본주의적 요소가 끊임없이 성장되도록 부채질 할 것이며 공산 독재의 멸망을 촉진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안경준)

 

여기서 리영희는 「문화혁명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는 중국에 대한 선입관 때문」이라며, 부정적 평가는 잘못된 선입관이 개입됐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리영희는 『문화 대혁명은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만들어진 인간을 개조하여 사회주의적 인간을 만드는 것과, 계급 분화의 제 조건을 근본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평등한 인간사회를 보장, 발전시키는 사회구조를 창조하자는 두 가지의 목적을 지닌 운동』이라고 본다.

 

리영희는 모택동毛澤東이 문화혁명을 일으키게 된 배경이 첫째, 중국 공산혁명을 일으키던 당시와 혁명이 성공하고 난 후 사이에는 사회적 환경과 조건이 상이함에 따른 새로운 모순과 갈등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毛澤東이 게릴라 활동을 하던 당시의 인간형과 (리영희 표현에 따르면 철저한 평등, 우애, 동지애, 자기 희생, 전체에의 봉사 그리고 극단적인 절약 등으로 상징되는 인간형) 권력을 장악한 뒤에 보이는 현실적 인간형 사이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리영희는 이를 『스탈린 식의 「물질 제일주의」와 毛澤東식의 「인간 제일주의」의 대립』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 사회주의의 특징은 생산 수단의 사회화, 즉 국유화가 이루어지면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로 나뉘어진 모든 계급은 소멸된다고 생각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토대 위에 생산력은 급속히 발전되고, 인간의 의식 또한 변화된다고 보았다.

 

리영희는 『이러한 태도는 물질 변화에만 주목한 물질 중심주의적 태도』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스탈린과 모택동毛澤東은 대립된다. 리영희는 『毛澤東은 「생산 수단의 국유화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생산력이 발전하거나 의식이 바뀌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은 사회주의가 이루어져도 구舊 시대적 의식_자본주의적 또는 前근대 봉건적인 의식, 다시 말해 이기적 욕심_은 남아 있어서 사회주의의 완성을 끝까지 위협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毛澤東은 「사회 혁명과 별도의 인간 의식 개조 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리영희의 입장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공식 견해를 무無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리영희에 따르면 『劉少奇(유소기)는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생산력이 발전되면 인간의 사상 개조가 이루어진다는 관점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劉少奇는 中共이 급속한 공업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긴박성 때문에 인간의 이기적 욕구에 호소하는 물질적 자극책을 썼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농촌에서는 사유지의 보장과 생산 결과에 따른 생산 이윤의 보장 등이고, 공업 분야에서는 전문가와 기술자의 우대, 노동자들의 이들에 대한 종속, 관리인 중심의 경영제도, 41종에 달하는 보너스 제 도입 등 현재 소련식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毛澤東이 보기에는 단기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루는 효과는 있겠으나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이기심을 조장함으로써 자본주의에로의 역행 현상이 일어나 중국 사회주의 혁명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것이라는 것이다.

 

모택동毛澤東 개인숭배 옹호

리영희는 毛澤東과 유소기劉少奇의 권력투쟁을 노선투쟁으로 미화했다. 이어서 리영희는 「전환 시대의 논리」에서 毛澤東을 극찬하고 있다. 그는 한 서방의 평자의 말이라고 하면서 『레닌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은 하였으나 공업화는 못 했다. 스탈린은 공업화는 했으나 인간 혁명은 못 했다. 毛澤東은 공업화와 인간 혁명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최대의 극찬을 늘어놓았다.

리영희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문화 혁명이라는 급격하고 웅장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미국 기자들만 모를 뿐 全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 오래다』 리영희는 『毛澤東은 레닌과 스탈린을 뛰어넘은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인간의 평등 사회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올바른 노선에 있다』고 했다. 그 노선의 실현이 문화 대혁명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리영희는 1977년 발간된 「우상과 이성」에서 문화혁명 당시의 「下放(하방: 지식인을 지방으로 내려 보내 노동을 시키는 운동)」을 「인간 우선주의」의 실천으로 부르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문화혁명의 과정이 (스탈린의 경우처럼) 무시무시한 내부 숙청이 아니라 이론 정립과 토론, 자기비판, 설득 등 매우 인간적인 방법으로 진행 되었다』고 찬양했다.

그 예로 『가장 극심한 비판을 받았던 유소기劉少奇도 북경北京 교외에서 현재 再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리영희의 毛澤東 숭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毛澤東은 인간적으로 그릇이 매우 큰 영웅의 풍모를 지녔고 동시에 사상가·교육가·정치가·전략가·詩人 등 다양한 자질을 한 몸에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리영희는 더 나아가 『毛澤東이 사회주의 혁명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마르크스·레닌·스탈린 세 사람을 합친 것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리영희는 毛澤東의 「개인 숭배」에 대해서도 색다른 분석을 했다. 아마 송두율 식式의 「내재적 접근법」의 원조가 아닌가 한다.

『개인숭배를 중국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전통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된다. 외부의 시각으로 중국 인민들의 毛澤東에 대한 개인숭배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 중국처럼 장구한 세월 동안 정치적 억압과 빈곤과 비참의 역사를 살아 온 중국 민중에게는 그 생물학적·인간적 존재의 기본조건을 처음으로 해결해준 지도자와 그 인간에 대한 감정은 숭배에 가까운 「거의 절대적인 존경」이 있을 수 있다』

 

또 스탈린의 개인 숭배와 毛澤東의 개인숭배는 차이가 있다고 강변한다. 『스탈린은 당과 정부로 구성되는 관료화된 권력 체계의 커다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관료적 방법으로 숭배를 강요했다. 반면 毛澤東은 문화 대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휘한 당 관료기구를 타파함으로써 민중과 자기를 직결시키는 데 대한 존경이다. 홍위병 운동은 인민 대중의 지성과 에너지에 의거한 결정과정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운동이라는 것이다. 毛澤東의 이러한 대중의 힘에 의거하는 방식이 스탈린의 강요에 의한 방식과의 가장 큰 차이다』

 

리영희는 자본주의를 경멸한다. 그 代案으로 그는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과 모택동 毛澤東의 사상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나라를 대표하는 미국은 증오한다. 리영희는 미국은 전쟁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구조를 지닌 나라이며 전全 세계에 걸쳐 제국주의적 침략을 일삼는 나라로 보았다. 「대화」라는 최근의 책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밝혔다. 『미국 자본주의는 그 본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잔인 무도할 수밖에 없다. 약소민족에 대한 전쟁 없이는 그 제국주의적 경제·정치·군사·과학 기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리영희의 미국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심각한 빈부격차, 경제·사회의 부정부패, 인종차별, 기업의 냉혈적 인사제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몰 인정적인 생존경쟁 등 인간관계의 냉혹한 단면을 지닌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철저한 이기주의적 자본주의 나라이다. 북한 핵核 문제의 본질도 미국의 전쟁 없이 살 수 없는 제국주의적 침략적 속성에서 찾아야 한다』

 

리영희는 1994년 출간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평화의 가면 아래 지구상의 도처에 불씨를 뿌리고 다니는 국가가 있다. 진정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 없는 삶을 원하는 사람은 그 정체를 확인해야 한다』 리영희에 따르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지구상 최악의 나라다.

 

과연 그런가? 역사는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사회주의 나라가 그의 분석과 달리 최악의 나라였음을 보여 준다. 심각한 관료주의의 폐해와 부패는 자본주의 나라보다 훨씬 심각했고, 인민들의 삶은 비참했다. 공산독재자들의 철권 통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의 실제적인 삶은 지상낙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지상 낙원이라던 사회주의 나라의 인민들은 그들 스스로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리영희가 그토록 혐오했던 자본주의적 생활 방식을 선택했다. 사회주의 나라들은 전쟁이나 외부의 압력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붕괴했다.

 

그는 허상을 보았고, 지금도 그 허상을 좇고 있다. 그가 본 것은 사회주의 나라의 實在(실재)가 아니라 선전 문구를 사실로 착각한 것이다. 레닌의 표현대로 리영희는 「쓸모 있는 바보」였다. 사실과 선전을 구분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속아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저주했던 어리석은 모습이 오늘 나의 눈에 비친 리영희의 모습이다.

 

대한민국사史는 친일親日·독재세력에 의한 오욕의 역사

리영희는 1945년 이래의 대한민국의 역사를 「미美 제국주의의 남한에 대한 식민지적 지배와 이에 결탁한 이승만李承晩과 박정희朴正熙를 비롯한 독재정권과 그들의 계급적 기반인 친일親日세력에 의한 오욕의 역사」로 보고 있다. 반면 그는 얼마 전 발간된 「대화」에서 북한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던 애국지사들에 의해 설립된 나라이며, 새나라 건설과 사회혁명의 열기가 충천하고, 일제시대의 친일파親日派를 비롯한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던 자들이 깡그리 청소된 이상적인 사회」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대한민국관觀은 「우상과 이성」에 잘 나타나 있다.

『남을 안방에 모셔 놓고 주인처럼 섬기기 20여 년, 해방 후부터 치면 32년인데, 그만하면 됐지 얼마나 더 모셔야 종의 근성이 풀린다는 말일까. 이런 정신적인 기형아, 생태적 불구를 만드는 데는 이 나라에 대해서 주인 행세를 해 온 그쪽의 잘못도 있다. 사실 그 잘못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크고 중하다』

 

리영희가 본 8·15 광복 당시의 남한은 지배자인 미국과 이에 결탁한 세력들에 지배된 무법천지의 사회였다. 『과거에 남한에 잔존해 있던 악질적인 반역자들과 친일파親日派들이 북한에서 도피해온 같은 부류의 악질분자와 결탁하여 남한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美 군정의 비호 아래 도처에서 온갖 테러와 불법행위 폭력을 자행했다. 거기에서 남한 민중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당시의 무無정부 상태의 원인은 한마디로 미美 군정과 이들의 하수인들에 의해서 조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리영희의 당시 해방 정국에 대한 인식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남한을 사회주의 나라로 만들려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된 폭동이 실체적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의도적으로 빠뜨리고 있다.

리영희에 따르면, 분단의 책임도 미국에 있다. 38선을 그은 것도 미국이다.

 

『李承晩은 미국의 앞잡이』

「대화」에 나와 있는 광복 이후의 역사에 대한 그의 평을 보자. 1945년에서부터 1948년까지 미국 군대에 의한 점령 통치기구인 군사정권 하下에 놓였지요. 일본 총독 통치의 변형이었지. 1948년에 미국이 키워서 데려온 이승만李承晩이 남북 통일국가 수립을 거부하고, 국토 분단을 전제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획책한 것도 이승만李承晩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배후에는 미국의 한반도 분단 정책이 있었지요

 

리영희는 李承晩을 미국의 앞잡이로 보았다. 「대화」에서 그는 李承晩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李承晩의 애국심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야심 충족, 즉 권력 획득의 한 방편이다. 李承晩은 타협이나 관용을 모르는 전제주의 제왕 형이었다. 그가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장한 과정과 정치인으로서의 행적을 볼 때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기보다는 왕조 체제 같은 한국을 상상했다』

 

그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 李承晩을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李承晩은 민족의 통합보다 분열을 중시하고, 남북의 화합을 극렬히 반대하고, 자기의 패권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이었다. 李承晩은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서 상해上海 임시정부나 그 밖의 해외 독립운동에서 분파주의, 패권주의자로 지탄을 받았던 사람이다. 임시정부에서도 총통을 주지 않으면 반드시 이탈하고 깽판 치고 했던 그런 위인이다. 그래서 그는 임정 생활을 다하지 못하고 절교가 되어 미국에 들어가 프린스턴에서 박사 과정을 밟게 되었다』

 

리영희의 분석에 의하면, 「李承晩은 철저한 미국 숭배주의자로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물론 초보적인 사회 개혁도 적대시 했다」고 한다.

 

그는 「자유인, 자유인」에서 광복 이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광복 직후와 대한민국 수립으로 시작되는 민족 광복의 시기를 전후하여 우리는 이 땅에서 날뛰는 반反 민족주의자들과 반反 통일주의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李承晩이라는 반反 민족 광신주의자의 정치적 욕망이 충족되는 것과 정비례해서 이 민족의 분단은 굳어졌고 이 사회의 민주주의 실현의 염원은 멀어져 갔던 것이다』

 

이런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리영희의 북한관은 따져보지 않아도 자명하다. 김일성金日成 체제의 인권탄압과 경제난이 불거져 나오던 1994년에 발간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 리영희는 북한에게 도덕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남쪽 사회는 외세의존과 상당한 국가주권을 양도한 대가代價로 얻어진 것이다. 북쪽은 반대의 철학으로 나라 만들기를 서두른 결과 높은 민족적 자존과 사회구성원 상호 간의 도덕적 생존 양식, 그리고 동포애가 감도는 순박한 인간형 등의 사회를 실현했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공평한 관측자, 방문객들에 의해서 그 측면의 사회적 善이 확인되었다』

1994년 전쟁 위기로 치닫던 북한 核문제에서도 그는 북한의 편에 섰다.

 

북핵北核은 미국 책임

그는 19917월 북한이 원자력기구와 개별협상에 가서명한 것을 환영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가시지 않고 있는데 이는 북한 핵核보다는 더욱 위험스러운 미국이라는 원인이 있다』고 했다. 소위 「북한 핵核」의 원인과 책임은 북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과 미국도 같은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핵核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미국의 위협 앞에 공포감을 지닌 북한의 이유 있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북한의 핵核보유는 일리가 있다』고 한 발언은 리영희의 주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노무현盧武鉉은 「정신적인 386」의 한 멤버이기 때문이다.

 

리영희의 잘못된 예언과 역사인식

리영희는 문화 대혁명을 모택동毛澤東식 「인간 제일주의」의 소산으로 보았다.

사진은 홍위병들이 반동으로 몰린 시민을 핍박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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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가 극찬했던 인류사상 최초의 거대한 「인간개조 실험」인 문화혁명은 실패했다. 애초부터 잘못된 가정에 입각한 오류였다. 문화혁명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문화혁명에 대한 평가는 당시 리영희가 보았던 것과는 정반대다. 홍위병들의 폭력에 의한 철저한 인간성 파괴와 문화 파괴가 만연했고, 사회적 생산력의 저하에 따라 중국 인민은 고통을 겪었다. 중국 인민들은 이제 문화혁명을 「10년 동란」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 역사학자인 조너선 D. 스펜스 교수는 「무질서의 지배자 毛澤東」에서 문화혁명 당시의 사회상과 폭력성을 기술하고 있다.

『문화 대혁명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수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 살해된 사람도 있었고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불구가 되거나 평생토록 치유되지 못할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리영희는 「대화」에서 문화혁명에 대한 자신의 오류를 변명했다. 이를 요약하면 「당시 나는 문화혁명의 전모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식인으로서는 도무지 취할 수 없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태도이다. 전모를 다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인류사상 최대의 사건」이라고 떠들었다는 말인가? 당시 그의 선전에 경도되어 잘못된 사상과 인식으로 자신의 젊음을 소모한 사람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 것 아닌가?

 

리영희는 중국의 문화혁명을 남한 사회의 독자들에게 전할 때, 『자본주의 사회의 병든 생활방식과 존재 양식에 대해서 대조적인 삶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등소평鄧小平은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고 자본주의 방식의 개혁·개방 노선으로 전환했다. 리영희 자신이 평생을 두고 혐오했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야 말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류가 발견한 최선의 제도라는 사실은 입증됐다.

 

[리영희의 비뚤어진 대한민국관觀]

리영희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이승만李承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1]미국이 분단의 원흉이며, 미국은 남한을 식민지화化·군사기지화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에 분단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2]이승만李承晩은 미국의 앞잡이다. 이승만李承晩의 남한 정부수립 운동은 민족 분단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美 군정은 처음부터 李承晩의 남한 정부수립 운동을 지원했다.

3]대한민국은 미국의 앞잡이들과 친일파親日派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4]한미韓美동맹은 미국에 대한 예속의 결정판이다.

5]이승만李承晩 정권은 사회제도 개혁을 거부했다.

6]이승만李承晩은 상해上海 임시정부와 해외독립운동에서 비난 받았던 분파주의자다 .

소련 붕괴 이후 각종 기밀문서가 알려지면서 위의 주장들은 근거가 희박하거나, 일방적인 주장 임이 드러나고 있다.

 

리영희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견해는 대부분 미국의 수정주의 역사관을 무無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또한 북한의 「反帝· 反봉건 민주주의 혁명론」의 이론 구조와 유사하다.

 

[군사분계선을 통치 분계선으로 변질시킨 것은 소련]

38선을 넘어 월남하는 일가족. 38선은 소련에 의해 정치 분계선으로 변질되기 전에는 엄격한 정치적 분계선은 아니었다. 미국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라고 보는 견해는 그 주장의 근거로 미국이 38선을 획정했으며, 미국이 남한을 식민지화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에 분단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고 한다. 미국이 소련군과 분할 점령을 위해 군사 분계선으로 38선을 책정한 것은 이론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38선을 책정한 사실이 곧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終戰(종전) 직후의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서독에는 미영불美··佛 군대 간의 군사 분계선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는 미영불소美···蘇 군대 간의 군사분계선이 있었으나 그것이 곧바로 국토 분단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광복 직후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38선을 순수한 군사 분계선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데 반하여,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38선을 통치 분계선으로 변질시켰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자마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한지역과의 교통·통신을 단절하여 남북 주민 간의 자유로운 교통·통신을 금지시켰다.

 

스탈린은 1945920일 비밀 지령에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10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고, 이어 이북5도행정위원회를 수립한 뒤 산하에 10개 행정국을 두었다. 이는 북한에 이미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소련은 김일성金日成을 내세워 북한지역에서 19462월에 토지개혁과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민주 개혁」을 단행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군은 미소美·蘇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몇 차례 단절된 남북 간의 교통·통신을 회복하고 남북한 자유로운 왕래와 상거래를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남한 지역을 식민지화化·군사기지化하려 했고, 처음부터 남한지역에 분단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처음부터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이는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1947922일에 작성한 평가서에 나타나 있다. 미국은 1948년 남한에 통일정부 구성이 불가능해지자 서둘러 남한에 정부를 수립하고 주둔미군을 조속히 철수하고자 했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915일부터 주한 미군 주한미군駐韓美軍 철수를 비밀리에 개시하여 1949629일 군사고문단 500명만을 남기고 철수를 완료했다. 미국은 1947년 여름까지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저지해 왔다.

 

미美 군정은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를 제외한 좌우左右합작운동을 주도했고, 과도 입법 의원에도 이들을 배제했다는 데서 확인된다. 美 군정은 19474월에 이승만李承晩의 정부수립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그를 연금하기까지 했다. 미국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심한 것은 제2차 미소美·蘇 공동위원회가 남한 내內 우익 진영을 배제하자는 소련의 주장으로 결렬된 직후인 19479월 이후이다. 한반도 분단을 기획하고 먼저 추진한 것은 소련이고 이에 동조한 김일성 金日成 정권이다.

 

이승만과 미국은 대립 관계였다

195388일 한미韓美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고 있는 변영태 외무장관과 댈러스 美 국무장관. 한미韓美 상호 방위조약은 이승만李承晩의 안보 외교의 승리였다. 리영희는 『李承晩은 미국이 키워서 데려온 자이며 미국의 지시에 따라 단독정부를 수립 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관계와 다르다. 이정식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李承晩은 그의 철저한 반공反共노선 때문에 미국 정부의 주무부서인 국무부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비밀문서에 따르면 그 당시 미美 국무부에는 소련의 첩자들이 침투해 있었다. 히스 특별 정치 국장과 빈센트 극동 국장 등이었다. 이들은 李承晩에 비非우호적이었다.

 

이들 관리들의 작용으로 인해 미美 국무성은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어 내려는 이승만李承晩의 청원 활동을 묵살했고, 재미在美 동포사회에서 이승만李承晩에 도전적이고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어 있던 한길수와의 합작을 종용하고 그와 가까이하고 李承晩을 멀리했다. 광복 후 李承晩이 귀국하려고 할 때 美 국무성의 고의적인 지연으로 40일이 지난 후에야 홀로 김포공항에 입국했다. 李承晩은 19466월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이라도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미국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다. 美 군정은 오히려 李承晩을 강력히 비난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親日派 배제]

리영희는 『李承晩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활동한 한민당이 친일파親日派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한민당에 親日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상당수 참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광복 직후 親日派 숙청을 강하게 주장했던 좌익 진영의 통일 전선 기구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이하 민전民戰)은 친일파親日派를 「일본 제국주의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민전民戰의 친일파親日派 정의를 기준으로 할 때 한민당에 참여한 親日 경력자들을 모두 친일파親日派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들 대부분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親日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일제日帝의 강요와 일제日帝말기 사회단체나 기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마지못해 일제가 조직한 단체의 임원에 포함되었거나 친일적親日的인 연설을 하고 글을 썼던 인사들이다.

 

좌익의 여운형 또한 상당한 친일親日 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친일파親日派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들에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실제로 한민당에는 명백하게 「親日派」로 규정될 만한 인사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親日派를 배제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전개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세력은 5·10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선거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친일親日 부역자들의 피被 선거권은 물론 선거권까지 박탈하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또한 이승만李承晩은 첫 번째 내각을 구성함에 있어서 親日 경력자를 철저히 배제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 관료 기구와 경찰 및 군대 조직에 일제下에서 관료와 경찰 및 장교를 지낸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건국의 주도세력은 아니었다.

레닌도 러시아혁명 직후 차르 치하의 관료를 그대로 썼다는 사실은 건국 과정에 있어서 숙련된 행정가와 관료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한미韓美동맹은 李承晩 외교의 승리]

리영희는 韓美동맹을 들어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말했으나 미국은 애초에 韓美동맹을 맺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리영희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글에서 韓美 상호방위조약이 미국이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맺어진 조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글의 제목에서는 이를 北進통일과 예속의 이중주라고 표현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19533월 미국 정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정치적인 해결, 즉 휴전협정을 맺고자 했다. 李承晩은 휴전의 전제조건으로 한미韓美 방위조약의 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李承晩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1953618일 일방적으로 반공反共포로를 석방하는 강수를 두었다.

 

미국은 독자적인 北進(북진)통일을 주장하고 휴전에 비非협조적인 李承晩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李承晩과 타협하기 위해 그가 요구하는 군사방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한미韓美 상호방위조약은 19531117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휴전의 성립과 이승만李承晩이 주장했던 단독 북진北進 무력통일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고, 반면에 李承晩은 공산주의 세력과 일본의 팽창주의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미국으로부터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

韓美 상호방위조약은 그후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가장 큰 밑받침이 됐다. 이 조약으로 인해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 전쟁이 없었다.

 

[李承晩의 성공한 개혁들]

리영희는 이승만李承晩과 집권 친일親日세력은 당시 민중들의 사회제도 개혁을 거부했고 해방정국 당시의 혼란은 이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으로 야기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또한 사실관계와 다른 주장이다. 1945년 광복 당시 대한민국 사회제도 개혁의 가장 큰 과제는 농지개혁이었다. 李承晩은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고 그에 의해 이루어진 농지개혁은 북한이 단행한 농지개혁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 6·25 전쟁 당시 「농지는 농민에게」라는 북한의 선전 활동이 농민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승만李承晩의 개혁의지는 1948320일 친구이자 정치 고문인 올리버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정부를 갖게 되면 우리는 이 나라를 엄청나게 자유화시킬 것입니다. 한국의 파시스트, 반동 세력 그리고 극우파 운운하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대경실색할 것이오. 농지개혁법이 가장 먼저 제정될 것이고, 다른 많은 자유주의적 조치들도 차례로 단행될 것입니다』

 

이승만李承晩은 정부 수립 후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曺奉岩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 이유를 그는 평소 농지개혁을 역설해 온 조봉암曺奉岩을 통해 농민을 장악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503~5월 사이에 적어도 70~80% 정도 농지 분배가 단행되었다.

 

李承晩은 6년제 의무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를 대폭 증설해 광복 당시 75%였던 문맹률이었던 대한민국이 문자 해독률이 가장 높은 나라로 변모하는 데 기여했다. 李承晩이 대통령에서 물러날 무렵 대한민국의 대학 진학률이 영국을 앞질렀다. 1950년대에 추진한 교육개혁 덕택에 1960년대 이후 박정희朴正熙 시대의 「경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李承晩은 좌익左翼도 인정한 민족지도자]

李承晩은 19193·1 운동이 진행되기 이전에 이미 조선의 많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3·1 운동 직후 발표된 국내와 해외의 8개 임시정부 중 6개 정부에서 李承晩을 집정관 총재 또는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있다. 일제하日帝下에서 조선의 백성들에게 李承晩의 해외독립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459월 광복 직후 공산주의자 박헌영에 의해 주도되었던 조선 인민 공화국 각료 명단에 李承晩은 대통령 격인 주석에 추대되어 있다. 만일 리영희의 표현대로 李承晩이 분열주의자이고 해외활동이 형편없었다면, 좌익이 주도한 정부 각료 명단에 그 이름이 올랐을 이유가 없다.

 

리영희의 주장에는 심각한 사실 왜곡이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上海임시정부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李承晩이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인 1905년이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19193·1 운동 이후 설립됐다.

 

[대한민국史는 성공한 역사]

대한민국은 기회주의 세력이 득세한 나라고 정의가 패배한 나라고 역사의 후퇴를 가져온 실패한 국가인가. 대한민국의 역사는 유례가 없는 성공의 역사이다. 全 세계 제3세계 나라들에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나라이다. 중국 근대화의 기수였던 등소평鄧小平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산업화 방식은 근대화를 꿈꾸는 나라의 확실한 대안代案으로 인정되고 있다.

 

유엔개발기구에서 1960년부터 1996년까지 36년간 세계 174개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을 조사한 통계자료가 있다. 그에 따르면 174개국의 36년간의 지표에서 한국이 평균 성장률 7.1%로 세계 1위이다. 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10大 무역국이고, 강대국형 산업구조를 지닌 자랑스러운 조국이다.

 

일부에서는 경제는 성장했으나 부富의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것도 사실과는 다르다. IMF 외환 위기 (국제 금융 구제) 직전까지 세계은행에서 조사한 부富의 분배지수에서도 대한민국은 상위권에 올라 있다. 富의 분배가 잘되고 경제성장률이 높은 나라가 가장 이상적인 모델의 국가발전을 해온 나라이다. 대한민국은 조사된 나라 가운데 성장과 분배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나라 중 상위권에 올라 있다.

 

반면 북한을 보자. 북한은 조사할 수 있는 각종 통계에서 세계 최하위에 머물러 있다. 종교, 거주 이전, 심지어 직업의 자유도 없다. 지금 북한은 외부의 식량지원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나라가 됐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이보다 더한 수치가 어디 있으며, 민족의 자존을 훼손하는 사례가 있단 말인가?

 

리영희와 左派는 더 이상 사실을 속여서는 안 된다. 거짓과 왜곡으로 진실의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거창 양민 학살은 비난하면서도 모택동이 저지른 1000 이상의 양민 학생이나 공산주의 북베트남 정부가 학살한 400 이상의 민간이 학살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는 기회주의적 입장을 보였던 리영희. 공산주의 사악한  귀신이 들어가서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사상을 주장한 자임.


리영희가 말들을 들어 보자. 문재인이가 숭배하는 리영희가 문재인으로 태어나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내려와서 통일이 되면, 나는 이제까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나의 삶을 회개하고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살겠노라 "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아니며 북방한계선 남쪽이 우리의  영해라는 주장도 잘못" 1999.8.12

"
미국이야말로 '악의 제국'이며, 부시 행정부의 집권세력이야말로 '악의 '이다 젊은 세대들은 해방 이후 친일파 군대 출신이 외세에 빌붙어 지배해온 한국 현대사를 똑바로 배우고 인식하기 바란다." 2003.4.7

"
해마다 수백 명의 한총련 대의원들을 무더기로 수배 조치해 당사자와 가족들을 수배의 고통으로 몰아 넣는 불합리한 상황은 없어져야 한다. " 2003.4.8

"
한국은 철저히 미국의 속국이다." 2003.7.12
"
숭미(미국을 숭배함) 세력들이 미국의 이익과 자신들의 이익을 일치시켜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키려 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인간해방과 사회진보, 남북화해, 평화로 나아갈 길이다." 2004.11.4

"
주한미군 철수하고, 한미 동맹 해소하고, 미군 기지 해체하자." 2005.10.7

"
이북에서는 나라 건설과 사회혁명의 열기가 충천하고 일제시대의 친일파들을 비속하여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던 자들이 깡그리 청소되고 있는데 같은 민족의 이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태는 한숨과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어요. 이북에서는 나라 건설을 위해서 ' 술을 부대' 담는 민족정기가 넘쳐 있는데 같은 시각 남한은 '썩은 술을 낡은 부대' 그대로 담고 있는 꼴이었어." 2007.4.19


문재인 자신의 말은 무엇입니까?


1. 한총련을 합법화해야 한다.  (문재인)
(
주사파 출신의 전대협 의장 출신이 몸담은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인 전대협을 기반으로 1993 4 결성된 비합법적 단체, 한총련은 범청학련 남측 본부로 조국의 통일을 위해 통일 대축전에 해마다 참가한 반국가단체이며 통일대축전에 임수경은 문재인의 발탁으로 19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임종석의 도움으로 입북하여 통일축전에 참가 귀국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다)
2.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19 민정수석은 주사파 출신의 임종석을 임명함) 하면서 국가보안법을 폐지 못한 것이 가장 뼈아픈 - 국가보안법 폐지해서 북한 대남 적화통일을 위해 간첩들이 자유롭게 아무런 제약없이 대남 적화 활동을 하라! 우리 남반부 동무들 적화 시켜 줍소!

3. 통진당에 대한 정당 해산 심판 청구는 정치적 결사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제약
-
통진당은 2014 12 헌법재판소가 헌정 사상 최초로 통진당 해산 결정을 내린 초유의 판결. 이석기 의원이 내란 음모 혐의로 체포되면서 당의 해산까지 이어지게 됐으며 1962 5.16 이후 정부가 정당을 강제 해산한 것은 처음 있는

4. 진보 세력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한 끝없는 탄압 속에서도 오늘에 이르게 양심세력
- 1945
10월에 김일성이가 '진보적 민주주의' 처음 언급했으며 바로 '진보주의' 공산주의의 . 문재인의 진보세력이란 김일성이 언급한 진보주의의 진보!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을 진보 민주주의자라고 가장한다

5. 종북좌파는 사악한

6. 개성공단 2천만
세계가 북한의 자금 압박을 위해 유체 동산을 압류하고 있지만 문재인만 예외

7. 대통령이 되면 미국 말고 북한을 가장 먼저 찾아가겠다


그렇다면 문재인은 이제 무엇을 공작하고 있을까요? 그가 한 말들이나 공약들을 근거로 추정하자면 대략 이런 것들입니다:


그는 국가 보안법을 철폐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을 개정하되, 사회주의 국가로 살짝 바꿀 것입니다. 전시 작전권 조기 환수를 이루고, 그를 통해 주한 미군 철수를 부추기고 이룰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회에서 자유 민주주의 사고를 주창하는 대표들을 음으로 양으로 제약하고 압제하고 제거할 것입니다.

다음에는 자기가 공약한대로 사회주의 연방제를 북한과 제안하고 실시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1000만명 살육? 1000만명 해외 도주 획책? 남반부를 사회주의 지상 낙원, 주체 사상의 영도자 애송이 김정은이에게 헌납? 위대한 주체 통일 조국 만세? - 이렇게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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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전대협'과 스피노자

  • 류근일 언론인
  • 입력 : 2017.11.28 03:17   

과거 386 운동권은 密敎的… 성찰적 사유 없이 신앙 수준
진리 대표한다는 선민의식과 善·惡으로 가르는 자폐증도
靑 장악한 586은 바뀌었기를… 절대善 경계한 철학 배우길

        
최근의 정치 화제는 단연 386 전대협 출신 청와대 핵심 요원들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 출신임을 지적하면서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은 이렇게 물었다. "전대협 강령은 반미와 진보적 민주주의인데, 청와대에 들어간 전대협 인사들이 이런 사고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입장 정리도 안 한 이들이 청와대에서 일하니…." 임종석 실장은 이에 이렇게 답했다. "5~6공 정치군인들이 민주주의를 유린했을 때 전 의원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살펴보지 않았지만, 전 의원이 거론한 사람들은 인생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

이어서 김문수 전 경기도 지사가 논쟁을 이어갔다. "사람의 사상은 바뀌기 힘들다. 담배 끊기보다 힘들다. 고문을 당하고 감옥을 다녀와도 사상을 바꾸지 않는다. 연옥의 고통을 거쳐서도 잘 바뀌지 않는 게 사상이다. (…) 혁명은 영원하다." 이런 논쟁이 주목받는 이유는 자명하다. 전희경 의원과 김문수 전 지사가 거론한 인물들은 보통사람들이 아니라, 대통령 뇌리에 "원전(原電)은 좋다, 나쁘다" "사드 배치를 하자, 말자"를 입력시켜 줄 알파고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실세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건 그래서 아무리 따져도 지나칠 게 없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스스로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라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엔 여러 종류가 있어, 그것만으론 그들의 정체성을 가늠할 수 없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전대협 386 학생운동, 그중에서도 NL(민족해방) 계열, 그중에서도 성서적인 표현인 '열성당원'일수록 어딘가 밀교(cult)적인 분위기 같은 걸 느끼게 했다.               

컬트 분위기란, 자기들이 진리를 대표한다는 우월감, 선민(選民)의식, 메시아주의, 자폐증 같은 것들이다. 세상을 절대 선(善)과 절대 악(惡)으로 가른다. 절대 선 무리 안에선 지도노선에 대한 충성이 요구되고, 개인의 성찰적 사유는 용납되지 않는다. 신성한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된다. 가출(家出)도 해 소속집단이 패밀리처럼 되고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해야 한다. 고급 지식인보다는 순박한 사람이 돼야 한다. 이탈하면 배교(背敎)자다.

이런 밀교문화 속에서 전사(戰士)들에겐 엄숙한 예언서가 주입된다. "사악한 서양 제국주의가 진선진미(盡善盡美)한 동방의 땅을 식민지로 유린해 왔다. 그 앞잡이들이 민족을 배신하고 민중을 수탈했다. 반(反)민족-반(反)민중 악당들은 그러나 자체모순의 폭발로 필연적으로 망한다. 전사들이 최후의 일격만 가하면!" 이것은 신앙과 지하드(聖戰)의 경지이지, 지적(知的) 엄밀성의 차원이 아니다. 20대 청춘들이 그런 정서로 흘렀던 원인의 한 가닥이 권위주의 탄압이었다는 것은 알려진 대로다. 그러면서도, 그런 원인이 있다 해서 100이면 100 모두가 다 386식이 돼야 한다는 당위(當爲)는 없다고 할 수 있다.

탄압이 지나치면 저항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저항에는 여러 정도가 있다. 권위주의엔 반대하더라도 대한민국엔 반대하지 않는 정도가 바람직할 것이다. 보수 아닌 진보도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진보로 쏠리는 건 어디서나 흔한 일이다. 그러나 진보에도 여러 정도가 있다. 자유민주 체제를 유지하면서 진보적 사회·복지·노동·환경 정책을 추구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기어이 반(反)자유민주 변혁이라야만 직성이 풀릴 경우라면 말릴 재간은 없다. 그러나 불행한 일이다. 홀로코스트(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와 홀로도모르(1932년, 집단농장화를 위해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유발한 우크라이나 대기근)는 차이가 없었기에. 평양의 '세습 천황제'는 그 둘을 합친 것만큼일 것이다.

386 전대협 출신들이 정권을 잡은 한에는 그들의 생각이 왕년의 컬트 시절과는 많이 달라져 있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 연륜, 체험, 시행착오가 있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럴 그들에게 스피노자의 철학을 접해볼 것을 권한다. 그는 '신학―정치론'에서 이렇게 설파했다. "사람의 가장 큰 행복과 축복은 선(善)을 향유하는 데 있지, 자기 혼자만 그것을 배타적으로 향유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데 있지 않다." 지적(知的) 도덕적 우월감에 기초한 선민의식이란 철학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이 때문에 유대인의 선민 됨을 부정했다 해서 자신이 속한 유대교로부터 파문당했다. 칼자루 쥔 586 권력자들이 한 번쯤 바라봤으면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27/20171127033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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