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뉴스타운"에서 가져옴
▲ ⓒ뉴스타운 |
북한의 정부기관인 교육성이 국정교과서에 5.18이 김일성의 주체의 기치로 저지른 사건이라고 시인하였다. 북한정권이 5.18에 개입하였다고 자랑스럽게 공식선언한 것이다. 북한 정부기관이 공식발행한 교과서인 만큼 5.18이 북한정권의 소행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더 이상의 증거는 없을 것이다.
경남대 극동 문제연구소 서옥식 초빙 연구위원 저서 '북한 교과서 대해부'
광주 사건 5.18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남조선 애국인민이 호응해 일으킨 반파쇼 투쟁 중에서 5·18 광주 인민봉기는 가장 성공한 인민혁명 사건"
소학교 4학년 국어 교과서 - '누나의 사진' 5.18 당시 계엄군의 총칼에 누나를 잃었다는 '남철'이라는 소년 등장.
남철은 광주가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의 무덤에서 누나의 사진을 꺼내보며 "미제와 전두환 악당놈들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김일성 원수님과 김정일 지도자 선생님의 품에 안기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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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성, 보랏빛 호수: 광주사태 당시 남파되었던 한 탈북군인의 5.18체험담
이제 역사적 사건이 되어 버린 5.18 광주 사태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보랏빛 호수'란 책은 광주 사태를 민주화 운동이라 포장한 남한 좌파들의 시각과 달리, 남조선 혁명이란 김일성의 야망과 남한 정부 전복을 기도한 김대중 일파가 합작해서 일으킨 인민 혁명이라 본다. 역사적 사건은 누가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묘사될 수 있다. 성경도 예외가 아니다. 마치 같은 실체 대상이라 할지라도 언제 (저녁 아침, 점심, 밝은 날, 구름 낀 날 등) 어느 각도에서, 얼마나 먼 지점에서 등 여러 가지 변수들에 따라서 찍었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짐과 같이, 글이란 혹은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점은 무수하게 달리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랏빛 호수는 정순성이란 (가명) 인물이 19세 때 북한 특수군의 일원으로 1010부대장 (중장 -한국의 '소장'에 해당) 문제심의 호위대원으로 광주에 남파되어 겪은 일들을 정순성이의 고백을 근거로 작성된 실화이다 (책이 그렇게 말한다). 광주사건에 대한 진술은 정순성이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에 입국, 대성공사/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질문을 받고 답하는 내용으로 책에서 서술되고 있다.
그러면 정순성은 (1961년생; 물론 가명) 누구인가?
1973년 8월 남문인민학교 졸업,
남문 고등중학교 3년 재학 중 (16세) 중앙당 5과에 (대남 간첩 훈련소) 소환되어 평양시 순안구역 구서리 소재 중앙당 대남 연락소 소속 112 훈련소 도착 (아동 훈련소; 주로 고아 출신)
한 조 10명씩 무술, 운전 (땅 위에서 굴러 다니는 것은 모두 배움), 산악 훈련, 각종 무기 (비행기, 헬리콥터, 전차, 장갑차, 저격 무기 등), 특히 적군 무기 사용법 훈련을 많이 배웠다. 전기, 증기, 내연 열차를 운전하는 법도 배웠고 낙하 훈련은 반복해서 배웠다.
같이 훈련받았던 조원들은 규정상 이름 대신 번호로 불러야 했다. 다른 조원들하고는 말도 붙이지 못하게 하다.
아동 훈련소인 112훈련소는 개성 연락소, 원산 연락소, 해주 연락소, 청진 연락소 등에서 인원이 필요할 때 보충하는 곳이었다.
1년 넘게 훈련받고 평양시 서포구역 대양리 소재 조선로동당 중안당 연락소 2처 전투정찰에 (조선 인민군 1010부대) 배치되다. 조선 인민군 1010부대는 로동당 창건 날짜를 본 따 만든 이름이고, 1010부대는 중앙당 직속 연락소로 전투정찰과 여성 타격대로 구성되었다.
중앙당 연락소 1처와 2처의 차이:
2처 전투 정찰은 1처의 전투 진입 보장, 신변 호위 담당; 다시 말해 1처 사람들을 남조선 목적지까지 호위하는 사업과 임무 마치고 북으로 귀환하는 1처 사람들을 무사히 복귀시키는 안내자 역할
2처는 남한에 침투, 한국 국적 가지고 국가 중요 직책들에 잠입, 각종 기밀자료 수집, 남한의 반 정부 음모 활동자들을 규합, 지시를 전하는 간첩들을 파견하는 기관.
여성들은 남조선 정부 요인들, 군부 장성급, 민주주의 인사, 기업가들과 혼인하여 북조선 쪽으로 돌려세우고, 외국에 파견되어 임무 수행
미얀마 아웅산 폭파 사건, 1977년 가을 이리역 (현 익산역) 폭파 사건 등이 모두 중앙당 연락소에서 조직한 공작들.
그런데 이리역 폭파 사건은 한국에서 열차 승무원의 과실로 발생한 것으로 위키에 설명되고 있다:
폭발사고로 이리역에는 지름 30m, 깊이 10m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반경 500m 이내의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역에서 근무하던 철도 공무원 16명을 포함하여 59명이 사망하였고, 중상 및 경상자가 1,158명에 달하였으며, 1,647세대의 7,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발생한 폭발사고 중 최악의 참사였다.
중요시설물의 피해도 컸다. 이리역 역사(驛舍)를 비롯하여 구내의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및 구내에 정차중이던 117 량의 기관차, 객화차 등이 파괴되었고, 선로 1,650m가 파손되었으며, 주택 675 채가 완파, 1,288 채가 반파되었다. 한편 당시 이리시 창인동에 위치해 있던 익산군청이 폭발의 진동으로 건물 전체에 균열이 가는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1979년 익산군청이 함열로 신축 이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로 인해 본래 이리고등학교 앞에 있던 남성고등학교의 건물 일부가 붕괴되어 현재의 소라산 자리로 옮기고, 본래 자리에 남성맨션을 지었다. 폭발 지점으로부터 반경 4km 이내의 건물들의 유리창이 깨지고 주변 1km 이내로 부서진 철도 레일 및 객화차의 파편이 날아들었다. 또한 이리시와 인접한 익산군 오산면, 황등면, 삼기면 및 김제군 백구면 등에서도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고, 백리 밖 군산시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고 한다.
북한 중앙당 연락소에서 제대하고 조선 인민군 773부대에서 상좌로 (한국의 '대령') 훈련교관으로 복무하다.
회령시 보안서 국토과 과장
정순성이 체포되다
순성은 자기 학교 동창 필수가 찾아와, 자기의 큰딸이 군 복무 중 대형 사고를 몸으로 막은 공로로 특류 영예군인으로 국기훈장 1급 받았으나 두 다리 무릎 절단하고 사후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아 통증으로 고통이 심한 가운데 중국 친척이 중국에만 오면 치료를 해 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딸을 중국에 들어가도록 도와 달라는 부탁을 듣는다. 많은 망설임 끝에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인근 국경 경비대에 뇌물을 주고, 필수의 큰 딸을 도강시켜 중국으로 가게 해 주었다.
정순성이 북한을 탈출하다
후에 이 일이 탄로났는지 보위부에 호출되어 로동당원원 자격 박탈당하고 출당당했고 보안서 국토부 과장직에서 해임당했다. 수갑이 채워져 정순성은 승합차로 회령시에서 7킬로 떨어진 22관리소로 (정치범 수용소) 호송되는 도중, 인간 도살장, 노예 박물관의 속성을 잘 아는 정순성은 수용소로 들어가는 험한 산길, 인적이 없는 곳에서 15세 어린 나이 때부터 사람 죽이는 훈련에 도가 텄던 지라, 25년간 인간병기로 살았던 실력을 발휘하여 호송하는 좌우 2명, 뒷좌석 1명의 보위부 호송원, 운전기사 등 4인을 수갑 찬 상태로 모두 제압하고 살상한 후 숲에 묻고 차를 몰고 그대로 자기 집과 여동생 근무처에 들려 아내와 딸, 여동생을 태우고 두만강 국경지대로 도주하였다.
5년간 남파 간첩 훈련소, 20년간 특전사 훈련교관으로 단련된 기술과 체력 덕분에, 국경 경비대에게 발각당하였지만 생존하여 중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경비대는 정순성을 앞세우고 아내, 딸, 여동생에게 손을 들게 하고 경비대 2명이 그네들에게 총을 겨누며 1명이 인도자가 되어 인도하면서 4명이 방향을 비추며 걷게 했다. 총구에 떠밀려 50인 수용 회의실 같은 곳에 모두 인도되는 순간 권총 한 자루를 숨겨왔던 정순성은 가족과 군인들 가운데로 몸을 날려 권총을 뽑아 땅! 땅! 경비대원들을 사살했다. 5명이 즉사했고 (사실은 1인은 어깨에 빗맞았다) 문 곁의 2명이 도주하다 정순성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런데 뒤 회의실에서 자동보총 연발 총소리와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경비대 1인이 부상만 당한 채로 있다가 총을 갈긴 것이다. 딸과 아내는 이렇게 갔다. 이들의 시체를 순성과 여동생이 각기 메고 끌고 추격해 온 경비대원들과 총격전을 벌이며 두만강을 건너 무사히 중국에 도착, 어느 곳에 두 가족을 묻고 정순성은 어느 친척집에 3개월 은신 후 중국 공안에 북한에서 넘겨진 정순성 체포 요청 건이 마무리 된 이후에 태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하다.
노무현 국정원에서 (대성공사) 광주사건에 대해 입을 다물라 협박하다
그 때가 하필 친북 좌파 종북 세력 노무현 정권 시대였다 (2006년). 국정원은 정순성을 조사하면서 광주사건에 대해 다 듣고 난 후에 입을 다물라고 위압적인 위협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순성 본인은 자기가 광주에 침투해서 작전을 수행하고 태백산맥을 통해 퇴각하면서 한국 공수특전단과 광주 공원 산지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한국군 몇 명을 사살했다고 증언했기에, 자신의 안전을 위해 광주 사건에 입을 다물라고 위협한 것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1995년 7월 18일 발간된 검찰 수사자료에 의하면, 1980년 5월 27일 새벽 1시, 7공수여단 특공조 201명은 주둔지인 광주 비행장을 출발, 목표 지점인 광주공원으로 출발했다. 산발적인 전투를 치르면서 새벽 4시에 광주공원에 도착하니 폭도들은 보이지 않아 의아하게 여기면서 특공조는 야산 공원 주위로 수색 작전을 넓혀가는데 난데없이 무장폭도들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으며 기습자들의 야간 사격 능력이 출중해서 여기서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5월 27일 새벽 어둠 속에서 수행된 진입작전에서 계엄군에 발생한 전체 사상자는 13명, 이중 7명이 광주 공원 주위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라고 적고 있다.
1980년 3월 초부터 1010부대는 배나 높은 고강도 훈련 시작
산악 훈련, 사격, 은폐, 위장 등등. 남조선 지역별 말투, 억양, 지방 사투리에 대한 발음 훈련을 집중 지도 받다.
매 전투원들에게 카드 종이보다 작은 소형 녹음기 지급하고 아침 기상해서 잠자리 들 때까지 남조선 말을 듣고 따라 하기 반복 연습.
1980년 5월 18일 오전, 연락소 전투원들이 한 사람당 50발씩 실탄 사격 훈련 중에, "사격 중지, 모엿!"
조장이 명령서를 하달하는데, 지금까지 훈련은 이것으로 마치고 내일부터 타지역으로 이동 훈련을 떠난다. 그간에는 규정상 편지를 쓸 수 없었으나, 오늘은 부모님께 편지를 써서 고향에 보내도록 소장 동지가 허락했으니 그리 알고 편지를 쓰라.
1980년 1월 중순, 1010군부대 부대장 (중앙당 연락소 소장) 문제심은 (한국의 '소장'급) 당중앙 군사위원회 비상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다. 3개월 전부터 밤과 낮이 따로 없이 교도지도총국과 조선인민군 정찰국에 김일성의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정신적 (정치 사상적으로), 육체적으로 준비된 우수 전투원을 선발하라는 지시였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해 후부터 김일성이 남반부 적화 혁명을 고심하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스러진 후, 김일성은 쾌재를 부르며 남조선 괴뢰 정부를 뒤엎을 인민 혁명 구상을 실현시키고자 이렇게 은밀하게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남조선의 치안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이런 시기가 반드시 도래할 줄 알고 미리부터 김대중을 비롯한 남조선 혁명가들과 민주 인사들에게 많은 투자를 해 왔다고 문제심이 참석한 그 회의에서 밝혔던 것이다.
김일성은 "현 정세에 맞게 남조선 혁명가들과 합심하여 전라도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킬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야 해!" 라고 말하고 "김대중은 나에게 그런 계기를 만들어 주겠다는 연락을 보내왔어. 한 마디로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면 폭동으로 확대시켜 남조선 괴로정권을 전복시킬 군사작전 계획을 세워 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몇 달 전부터 동무들한테 작전 계획을 만들라고 지시했던 거야."
[연관 김일성 교시들]
○ …“10·26사태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선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 동원하여 전민 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
○ … “남조선의 대통령이 각료들을 이끌고 동남아를 순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작전부에서 결사대를 파견 해 보겠다고 했다는데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틀림없이 해야 합니다. 버마가 허술한 나라라고 해서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방문 일정에 따라 사전 답사도 해 보고 빈틈없이 잘 준비를 해서 감쪽같이 해 치워야 합니다. 만약 이번 작전에서 성공하게만 된다면 결정적 시기가 성큼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1983년 9월 3호청사 부장회의)
○ … “전두환이가 드디어 백기를 들었습니다. 4·13 호헌이요 뭐요 하다가 노태우의 6·29 선언이 나왔다는 것은 6·10 항쟁에 겁울 먹은 전두환 정권이 항복했다는 것을 뜻 하는 것입니다. 현지 당 지도부는 앞으로 있게될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서 우리의 민주투사들을 상도동과 동교동 쪽으로 접근시키고 김영삼과 김대중으로부터 인정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장차 그들의 후광을 업고 제도권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 다.” (1987년 7월 3호청사 부장회의)
○ … “서울 올림픽이 성공하게 된다면 그만큼 내외적 환경이 불리하게 됩니다···올림픽을 파탄시킬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불가능 할 경우에는 최소한 흠집이라도 많이 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남조선 도처에서 폭발사고를 일으킨다든가 해서 각 국 선수단과 관광객들이 남조선에 안심하고 들어갈 수 없도록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1987년 7월 3호청사 부장회의)
"계획대로 폭동이 일어나면 전라도뿐 아니라 남조선 전역으로 퍼져나가도록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만들어 보라. 주도 면밀하고 가능성이 있는 계획은 작전 승리의 열쇠야. 청와대가 있는 서울과 남조선 전 지역으로 폭동이 확대되게 하라. 괴뢰정부 기능이 마비되면 우리는 피를 흘리지 않고도 남조선을 타고 앉을 수가 있어." 김일성의 말이 계속되었다.
로동당 대남비서 김중린은 김일성에게 김대중 선생이 보낸 사람들에 의하면 광주 작전에 대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라고 보고하고, "그쪽에서 우리에게 (북한) 요구하는 것은 북조선에서 조선 인민군 부대를 남조선에 파견하여 시위를 폭동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입니다" "폭동이면 무장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의 공작조들이 김대중 선생의 지시를 받고 온 사람들과 전라도 지역에 산개해 있는 무기고, 교도소, 아시아 자동차에 대한 습격 작전 계획을 완성해 놓았습니다" 라고 보고한다.
광주 폭동을 야기시킬 전략들
북한군이 광주 폭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기획한 주요 전략은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에, 전두환과 광주 시민들 사이에 (전두환을 찢어 죽여라! 플랑카드 등, 경상도 전두환이 광주시민 70프로를 죽여도 좋다고 했단다!) 이간질 심리전을 행한다는 것이 가장 핵심이고 군사적으로는 시민군을 무장시키기 위해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해서 장갑차 4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00대를 탈취해서 기동성을 확보한 다음 전남도 17개 시군에 분산된 38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각 경찰서를 습격하여 총을 노획하여 광주 시민군을 무장시킨다는 것, 그리고 북한 남파군을 각기 국군과 시민군으로 위장시켜 서로에게 총질을 가하게 해서 시위를 폭동으로 격화시킨다는 내용이다.
단시간에 전남도내 17개 시군에 흩어진 38개 무기 저장소와 경찰서를 동시 다발적으로 습격할 수 있도록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해서 그곳의 장갑차나 버스 군용트럭 등 300 여대를 신속하게 운전했다는 사실은 조직적인 북한군의 은밀한 활약이 아니고서야 설명될 수 없는 대목일 것이다. 폭약 저장소도 습격하여 10톤에 가까운 폭약과 4만 미터에 달하는 도화선과 35만 개의 뇌관을 탈취했었다.
광주 작전 명령이 최고사령부로부터 하달되다
최고사령부로부터 광주 작전 명령이 떨어진 것은 광주 폭동 작전 계획을 세울 데 대한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지 6개월 만이었다.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 시해가 일어난 1979년 10월 26일 이후 김일성은 남조선 혁명 방안을 심도있게 검토하도록 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1010부대장 문제심이 광주 작전계획을 세웠으니 직접 현지에 내려가 작전을 지휘하라고 명령한다. 1980년 5월 19일 오전 10시 비상소집 나팔에 50여 명의 전투 인원이 연락소 앞 운동장에 위장복 차림으로 정렬했다. 1010군부대는 1분견대, 2분견대, 직속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정순성은 12명 한 조인이 직속부대 소속인데 조장 리상국은 이리역 폭파 사건, 아웅산 폭파 사건 등에도 참여한 자였다.
1010부대장 문제심을 비롯 정순성 호위병 일행은 남조선 배로 위장하고 4대의 엔진을 장착하여 고속 기동이 가능한 특수 간첩선에 승선하여 전남 해안에 상륙하여 광주 야산으로 이동했다. 문제심 파견대장과 동행한 북한군은 20명 정도였다면 그 이전에 벌써 북한군은 광주에 파견되어 공작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정순성에 의하면, 북한군 파견 수자는 약 200여명이었을 것이라.
남한으로 침투하던 때의 상황
5월 19일 오후 4시경에 대양리에서 갱생 트럭 6대에 직속 부대 50명 인원이 나누어 타고 떠났어. 우리가 도착한 곳이 내가 그때 듣기로는 황해남도 장연군 장산곶 바닷가 인데 어슬 어슬 한때니까 아마도 저녁9시 경이 된 것 같더라. 바다 쪽으로 보니까 부두에 배가 2척이 있더라. 대장이 조별로 배에 오르라면서 오르는 순서대로 갑판 밑에 다 내려가라고 지시해서 모두 갑판 밑에 내려갔다. 복도가 가운데 있고 양 옆으로 침실처럼 되어 있더라.
조장들이 먼저 침실 점검을 하고 쉬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이제부터는 군복을 벗고 각자에게 있는 사민 복을 입으시오! 라는 것 이었다. 조장은 조 성원들에게 자리를 잡아주고는 갑판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다 배에서 내리라는 명령이 떨어져 바다에 뛰어 들어 보니 물이 가슴높이 까지 차오르는 것이었다. 30m 정도 되게 기슭으로 바다 물을 가르며 나와 사방을 둘러보니 무인 지경 같아 보였어. 그날이21일 새벽 2시경으로 기억이 난다. 우리가 배를 타서 2일간 바다에 있던 것이다.
남한에 내려오면서 탔던 배
우리가 탔던 배는 일반 남한의 고기 배와 꼭 같아. 길이가 20m쯤 되었을 거야. 여느 때는 일반 배처럼 고기잡이를 하는데 추진기가 4개 달린 배야. 상황이 발생하면 추진기 4개가 다 가동하는데 비행기처럼 속도가 빠르고 자체 폭파하게 되어 있어. 하루 종일 갑판 밑에서 있으려니까 낮이 가는지 밤이 가는지 모르겠더라.
그 때 바닷가에 내렸을 때 인상
캄캄하니까 잘 모르겠던데 바다 주변에 울퉁, 불퉁한 바위가 많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나. 바다 주변에서 올라와 2명~3명씩 2시간 정도 은폐해 있었는데 대장이 조장들을 부르더란 말이야. 그 때 나는 대장 호위를 맡았으니까 대장 옆에 얼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알 수 있었는데 사람 몇 명이 대장한테 와서 자기들이 남한에서 이룩한 성과 부분을 보고 하는 것 같더라. 그 들의 말을 들으니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것과 함께 트럭, 장갑차들을 노획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후에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들이 남한 쪽에서 마중 나온 길 안내자들인 것 같아.
한참 대장이랑 조장들이랑 무슨 토의를 하는지 있다가 조장이 우리한테 와서 ‘모여, 이제부터 조원들은 전투행동으로 넘어간다, 여기는 남조선이니 우리가 목표물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조심히 행군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전투행동이라고 할 때는 북한에서 강습 받기는 행군도중 노상에서 만나는 그 누구라도 없애 버리게 되어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조건 처리해버리라(죽여서 땅에 묻어버리라)는 것이 지휘부의 명령이다. 행적이 밀고 될까봐 그러는 거야. 그때야 내가 남조선이라는데 왔다는 것을 알았어. 조장이 남조선에 왔다니까 갑자기 긴장해지더라....”
손성모가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파견대장 문제심 일행을 영접하고 모략을 숙의하다
광주로 이동하는 도중 까가머리 중으로 위장한 손성모가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문제심 일행을 영접하고, 문제심과 손성모는 절간의 한 방에서 1시간 가량 여러 광주 문제를 논의했다. 문제심 일행이 광주 야산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작전 지시를 하며 북한에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는 등 활동을 하는데, 광주로 이동하면서 두 사람을 살해하고 또 돈 달라고 달라붙는 노숙자 1인도 처치해 버렸다. 저들은 공수부대가 광주 사건 진압을 위해 본격 투입되고 시민군이 투항하면서 북한의 지령에 따라 태백산맥을 타고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퇴각하였다. 북한에서 김일성은 남파 북한군을 위해 환영행사를 열었고 모두에게 공화국 영웅이란 최고 영예를 안겼다.
*손성모(孫聖模, 1929년 ~ )는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이다. (이하 위키백과에서 가져 옴)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데다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서 교육받을 기회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했다. 일찍부터 머슴살이를 하는 등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비를 스스로 벌어서 고생한 끝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대학교 학생으로 재학 중이었다. 개전 사흘만인 6월 28일에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며칠 후 인민의용군으로 지원하여 참전하였다. 이를 계기로 월북하고 나서 1957년에 제대하였고 제대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함흥시에서 대학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전라남도 해안을 이용해 공작원으로 남파되고서 승려로 위장하여 활동하다가, 1981년 2월에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체포되었다. 간첩 수사 기관에서 장기간 조사받았고 1987년 6월 항쟁 성공 후에야 정식으로 구속되었다. 손성모는 법정에서 간첩 혐의를 부인하고 통일 사업을 이루고자 남하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전향을 거부하여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다. 총 수감 기간은 만 19년이 조금 못 되어, 여타 비전향 장기수와 비교할 때는 그나마 짧은 편이다. 수감 생활 후반기에는 신광수와 함께 최후의 비전향 장기수 2인으로 알려져 인권단체가 석방 운동을 벌였고, 1999년 연말에 김대중 행정부의 특사로 광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서울 관악구에서 다른 출소 장기수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하였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거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고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송환 후 평양에 정착하여 2004년 시 〈화선 당세포〉를 발표 하는 등 조선 작가동맹에 소속된 시인으로서 활동하였다.
*http://systemclub.co.kr/bbs/board.php?bo_table=12&wr_id=5033에서는 정순성 대신 김명국으로 가명이 대체되어 있다.
광주 사건에 북한군 개입설의 철저 규명이 요청된다
김영삼 정부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김대중 노무현은 제쳐 놓는다 해도), 왜 광주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나? 김일성 정권의 속성을 안다면 광주 사건 같은 조직적인 무기고 탈취나 작전 전개 등은 분명 북한군 개입을 시사하는데도, 그리고 검찰 수사 결과문에서도 나타났지만 공수 특전단이 광주 공원에서 벌어진 수색 작전 때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면 그것은 북한 파견군의 일원이었더 김명국/ 정순성의 (가명) 증언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보랏빛 호수가 기술하는 내용은 광주 사건 때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라면 기술할 수 없는 여러 사항들을 분명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5.18사건을 재조사한다고 하는 문재인 정권은 다른 것 차지하고 이 북한군 개입설을 분명하게 밝히길 바란다. 저들의 속성상 종북 좌파 자기들에게 불리한 것은 아는 것도 덮으려고 하겠지만, 후대의 역사적 심판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가복음 4: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감추어진 것들 중에서 드러나지 않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역사적 진실을 가리려는 모든 수고는 허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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