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준 장로의 순교기
1875년생 박관준은 평안북도 영변에서 대부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평탄했던 그의 인생은 1894년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재산을 모두 잃는 첫 번째 파란을 맞았고, 이를 어렵게 극복하여 다시 거부의 반열에 들었으나 아내의 유산, 부모의 별세로 두 번째 시련을 겪었다. 그리고 주색에 탐닉하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병에 걸려 죽을뻔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나들었다.
1905년, 그의 나이 30이 되는 해 가을 어느 날,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완전히 승리한 1905년이 아닌가? 그 해 가을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유불선 동학서적들을 뒤적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絶壁唯危 血壁立이라는 (절벽유위 혈벽립: 절벽은 위태로울 뿐이니 피에 서라) 이상한 음성을 들었다. 소스라쳐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사람의 인기척은 없었다. 놀라움과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는 ‘이것이 영계의 계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와 붓을 꺼내서 방금 들은 그 명령을 한문자로 즉석에서 옮겨 보았다. 絶壁 唯危면 血壁立하라! 절벽 유위면 혈벽립 하라!
[여기서 절벽은 아마 박관준의 방탕 생활, 그리고 유교 불교 선/ 도교 사이에 갈등하는 사상적 혼란 상태]
박관준 장로는 이를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07년에 영변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아들 박영창의 말) 매일 새벽과 저녁 두 차례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다. 나는 무려 한 시간에 걸쳐 드린 아버지의 기도의 결론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주여, 저로 하여금 병으로 죽지 않고 순교의 제물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하는 것이다."
1910년에 벌어진 일제의 강제 병탄은 그에게도 충격이었다. 시골에서 한가롭게 농사만 지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일을 찾아보았다.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서울로 올라와 각고의 노력을 다한 끝에 1915년에 의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민중을 살린다는 의미로 제중의원을 세워 병든 이들을 고쳤고, 아울러 전도하기에 힘썼다. 동네에 소학교와 예배당을 지어 스스로 예배를 인도했다. 그가 경영하는 병원 입구에는 항상 요 3:16을 쓴 큰 족자를 걸어두고, 진찰실 벽에도 "나는 육신의 병자보다 영혼의 병자취급을 더 갈망한다"라고 자신의 필채로 쓴 큰 족자를 걸어두었다. 그 만큼 그는 환자의 육체적 질병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도하며 진료에 임했던 것이다.
박관준이 개천에서 십자 의원을 열고 생활하던 1934년에 개천읍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으며, 이후 평양을 거쳐 고향인 영변에 정착했다.
1935년 어느 날 밤, 아버지는 (아들 박영창의 말) 한 환상을 보았다. 아버지가 교회당 강도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횐 옷을 입은 이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정병을 뽑는다.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하는 것이었다. “내가 피를 흘리겠습니다.” 아버지는 크게 대답하고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 거룩한 이가 어떤 두루마리 종이를 들고 들여다보며 우뚝 서 있었다. 아버지는 송구스런 태도로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는 횐 옷을 입은 거룩한 이 앞으로 나가서 조심스레 그 종이를 넘겨다보았다. 횐 두루마리 위에는 사오십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제일 첫 줄에 ‘박관준’이라고 분명히 씌어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이 명단을 보고 깨어났다. 이것은 비몽사몽간에 본 이상한 환상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배달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읽으니 아니나다를까 교회에 일대 중대 문제가 돌발했다. 그것은 숭실 전문학교와 숭실 중학교, 숭의 여학교 등 평양의 삼숭 자매 학교가 신사 참배 문제로 존폐 기로에 직면했다는 톱기사였다. 당시에는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달한 시절이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그 정도가 심했다.
교회 학교인 평양 숭실 전문 학교에까지 신사 참배 문제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전번엔 국부적으로 중학생들이 강요에 못 견디어 응한 것 같았으나 이번엔 세 학교가 모두 신사 참배를 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동교의 교장이던 미국인 선교사 조지 매큔박사는 당초부터 강경히 신사 참배를 반대함으로써 평안남도 학무국 당국과 일대 정면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기에 폐교의 운명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비관적인 톱기사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신사참배 거부의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의 일선에 나선다. 환상에서 깨어난 후 박관준 장로는 평양을 향해 떠났다. 우선 신사 문제의 중심지인 평안남도 도청을 찾아가서 신사참배 문제를 재고해 주도록 요청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총독에게도 경고문을 보냈다. “만약에 총독 각하의 시정이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나선다면 외람되오나 각하의 나라 대일본 제국은 필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 후로 신사참배 강요정책이 학교뿐만 아니라, 교회에까지 미치자 그는 직접 총독을 찾아가서 신사 참배강요 정책을 항의하면서, 이를 철회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하라고 요청했다.
1938년 9월 9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평양에서 개최될 때, 그는 신사참배를 막기 위해 총독과 도지사에게 반대 격문을 보내기 위해 총독에게 보내는 충고문을 썼으나 일제에 의해 예비검속되어 격문은 빼앗겼고 형무소에 갇히고 말았다. 수감된 날 밤, 아버지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도를 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한 환상을 보았다. 어떤 성찬을 담은 밥상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뒤엎어지며 횐밥이 그릇에서 쏟아지고 흙투성이가 되는 광경이었다. 이것을 본 아버지는 총회가 실패할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장로교 총회마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는 소식을 형무소에서 듣게 되었다.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예비 검속에서 풀려난 박관준은 한시(유시)를 남겼다. 이 시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동지였던 이인재 전도사(목사)에게 써 준 것이다.
人生有一死 何不死於死 君獨死於死 千秋死不死
時來死不死 生樂不如死 耶蘇爲我死 我爲耶蘇死
사람은 누구든지 한 번 죽는 일이 있는데 어찌 죽지 아니할 사람 있겠는가?
그대가 죽을 때에 올바로만 죽으면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천추에 영원한 생명이다.
죽을 때에 죽지 않는다면 비록 살아서 낙을 누린다고 해도 죽음만 같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님을 위해 죽겠노라.
박관준 장로는 석방된 후에도 2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총독에게 충고문을 보냈고, 미나미 총독을 직접 찾아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1938년 미나미 조선 총독에게 보낸 편지 원문 초고는 다음과 같다:
. . . . 국가 장래에 불상사가 있을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측량키 어려운 바이며, 참 신이신 오직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로써만 능히 알 것입니다. 사람은 목전의 일만 볼 수 있으나 신은 구원한 일을 통관해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신령과 신비로 참 신이신 하나님께서 교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시대에 선지자들이 시대를 따라 참 신의 계시를 받고 국가 장래에 관한 중대한 일을 민간에 반포도 하였으며, 혹은 국가에 고지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번 소생이 측량컨대 벌써 6회를 통하여 정부를 내방한바 그 노정리수는 합위 일만여리를 산할 것입니다. 전 우가끼 총독 시대에 2회, 현금 각하 부임 이후에 이번까지 4회로 충고 직간하려고 일부러 찾아온 것은 진실로 국가와 인민을 위함입니다.
생은 재천 학멸하여 각하를 보필할 만한 정치적 지식은 비록 없을지라도 기독교 신앙 생활 33년 간에 참 신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을 힘입어 함지사지에서 누차 구출되었습니다. 2월 5일 각하 면회시에 낭독한 것은 일본 제국에 대한 예언을 환상 중에서 발견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도 같은 사건입니다.
각하 부임 이후는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나타나시어 표시하시고 그밖에 환상으로 명령하시므로 천리 밖에서 일부러 찾아와 역혈히 충고하는 바입니다. 성인의 말씀에도 지자천려에 반드시 일실이 있고 우자천려에 반드시 일득이 있다 하였으니, 원컨대 각하는 묵사만념하여 조선 기독교에 문제 된 신사 참배는 교회 자유에 방임함으로써 정부는 관계하지 마시기를 거듭 역혈히 충간하는 바입니다.
주강생 1938년 5월 27일
위천위인생(爲天爲人生) 박관준
그의 생각은 이러했다. ‘한두 번의 투쟁에 그칠 것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계속 투쟁해서 내가 죽든지 일제가 패망하든지 양단간에 끝장을 내고 말리라.’ 박장로는 조선교회의 실상을 일본에 알리고자 일본에 건너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어 통역이 필요했다.
다음은 안이숙의 '죽으면 죽으리라'에 나오는 기사로, 자신과 박관준, 그리고 최권능 목사와의 만남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박관준)는 50여 년을 예수를 믿어 왔지만 이번처럼 주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은 적은 없었지요. 만일 이같이 원수 놈들의 핍박이 심할 때 하나님이 평안한 때와 같이 가만히 계시면 어떻게 믿는 자들이 이 무서운 핍박을 견디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오 주님! 주는 나의 피난처요 강한 방패요 높은 산성이시니이다” 하며 감격해한다.
이 놀라운 그의 믿음의 말을 들은 우리는 이 노인(박관준)의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는 태도에 우리의 태도를 고쳤다. 그는 일본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유황불을 비와 같이 쏟아 내려서 멸망시키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요나가 니느웨에 간 것같이 자기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 정부와 고관들에게 경고하고 싶으나 일본말을 한마디도 못 하니 어찌하오리까 하고 열심히 기도하던 중 계시를 받고 바로 그 다음날 떠나 무작정 평양으로 왔는데 주님이 인도해 주셨는고로 이렇게 대번에 안이숙 거처를 찾아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나는(안이숙) “평양성으로 가라”하신 말씀과 “네가 하라”하신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 평생의 소원이 약을 먹고 주사를 맞다 병사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 이름으로 칼에 맞아죽든지 스데반같이 돌에 맞아 죽든지 기름 가마에 던짐을 당하든지 해서 단번에 죽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 왔소. 그런데 아마도 내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인지 주님이 나를 단번에 죽게 하려고 하는가 보지요. 죽으면 개도 뜯어 먹지 않을 이까짓 썩어질 몸을 바쳐 주님 위해서 단번에 죽는다면 아! 그 영광스러운 순교의 기쁨을 어찌 다 감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루 저녁은 예배당에서 밤새 철야 기도를 하고 피곤한 줄도 모르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우렁찬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그것이 웬 소린가 해서 그 목소리를 찾아가 보니 평양 성내의 장작 파는 장작터였는데 키가 조그마한 백발의 한 늙은이가 “예수 천당”하고 외치고 있었다. 때가 때인 만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진실히 믿는 모든 사람은 잡혀가고 그렇지 않은 성도들은 산으로 들로 도망 다니고 숨도 크게 못 쉬는 이런 험악한 시대에 이 사람은 대체 어떤 분이길래 저렇게도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을 외치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 늙은이를 쳐다보고 섰노라니 또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예수 천당”이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위엄이 있었고 눈은 확신으로 번뜩이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한 손에 성경책을 들고 한 손에 지팡이를 잡았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저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 했더니 그 말을 듣자 그는 성난 표정을 하고 나에게 큰 소리로 “예수를 믿으면 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거요? 지금 모든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데 입으로는 밥만 먹고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한단 말이오, 응?” “그렇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전도였구나. 전도다. 일본에 전도해야 한다. 일본에 경고하라는 것은 곧 전도하라는 것이다. 그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로구나. 그래 그래.” 순식간에 내 마음은 변했다. 이때부터 나는 집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막 거리로 뛰어나갔다.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모조리 붙들고 전도했다. 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사람은 모두 송장같이 보였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라다니며 애걸하며 울면서 예수 믿고 구원 얻으라고 권면했다. 붙들고 울며 권하는 내말에 감동을 받는 이도 많았다. 어떤 이는 계속 절하면서 고맙다고 했다. 어떤 이는 믿는 이지만 더 잘 믿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내가 정신 이상인가 해서 뚫어지게 보다가 도망을 치는 이도 있었다. 여하튼 내 잠잠히 믿던 양식, 즉 기도하고 성경 읽고 외우고 숨어만 있던 내 신앙 생활에 이 두 노인 박관준 장로와 최권능 목사로 인해서 안팎으로 큰 변동을 일으키고 혁명을 가져왔다.
“얘! 이숙아, 내가 너를 기독교 학교인 사립학교를 보내려고 그렇게도 애쓰고 기도했는데도 주님은 너를 기어이 일본인이 가르치는 공립만으로 소학교와 여학교 그리고 전문학교에까지 보내고야 말으셨다. 너에게 일본어를 그렇게 유창하게 하도록 한 것도 이때를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주님의 사명이면 속히 순종하고 죽는 것이 지 오래 끌고 기다릴 필요가 무어냐? 너는 일본말을 어려서부터 그렇게 잘한다고 아버지 비서인 시오상이 늘 말했을 때 나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네게 그런 재주를 주셨는가 했는데 참 주님은 다 경륜이 계셨고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인 것을 이제야 알게 되는구나. 그런데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데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지 않아?”
드디어 나는 일본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눈물 흘리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이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떠나가는 이를 위해 지하 교회 회원 모두가 3일간 금식 기도를 하고 산과 굴 속에 숨어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연락해서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했다.
당시 조선인이 일본에 여행하려면 현해탄을 건너가도 좋다는 도항증이라는 것을 경찰 고등계에서 발급받아야 했다. 그런데 박장로는 "도항증이 무얼 하는 거야?" 라고 묻고는 "도항증이 도대체 다 뭐요?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만유의 대주재이신 야웨 하나님이 보내시는 경고 대사들인데 그 따위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오. 더욱이 비상한 때가 되어서 이적을 자꾸 나타내시는데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소? 나는 야웨의 대사이니 그런 것 필요없소!" 라고 답했다. 그러나 안이숙 선생은 마땅히 지켜야 할 법과 규칙은 지켜야 된다는 것이 생활 신조였기에 박장로에게 견해를 거듭 설명하고 강조했으나 박장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아니했다. 그러자 "만일 장로님이 도항증을 준비하지 않으시면 장로님과는 같이 갈 수 없습니다"라고 화가 나서 잘라 말하니, 그제서야 박장로는 음성을 부드럽게 하며 "만일 자기가 도항증 수속하러 경찰서로 가기만 하면 자기는 당장 붙들려 갇히게 된다"고 했다. 또한 자기는 어디까지나 주님이 특별히 숨겨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고로 자기에 대해서는 절대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박장로는 먼저 서울로 떠나고 안이숙 선생은 성도들과 모여 최후 예배를 드렸다. 최권능 목사가 "마지막으로 남겨 둘 말을 하나 해 주시오"라고 하여 더 4:16을 인용하여 "죽으면 죽으리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들도 모두 낮은 음성으로 "죽으면 죽으리라"하며 감격했다. 그리고 최목사는 "우리들도 죽을 때가 오면 담대하게 기뻐 죽겠습니다!" 일동이 모두 "아멘!" 하면서 결심을 표현했다 (안이숙, 죽으면 죽으리라, 102).
열차를 타고 경성으로 갔는데 거기서 박장로가 올라탔다. 그에게 기차표를 주고 반대편 저쪽 구석에 앉아 계시라고 했다. 부산진에 거의 왔을 때 4명의 형사가 차에 올랐다. 2인 1조가 되어 손님들을 조사하는데 안이숙 앞에 다가선 두 형사는 점잖은 태대로 차표를 보여달라고 한다. 차표를 제시하니 표가 동경까지 되어 있으므로 도항증을 보여 달라고 하니 선뜻 내보이니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지나갔다. 안이숙은 약간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나서 박장로 있는 곳을 바라보았는데 웬일인지 두 형사는 벌써 박장로 앉은 자리를 지나 안이숙 편을 향해 사람들의 차표를 검사하면서 오고 있었다. 안이숙 편에서 저쪽으로 가는 두 형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면서 차표 검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박장로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단장을 짚고 안이숙 선생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는 그쪽에서 오는 두 형사를 밀치듯이 지나서 이쪽으로 가는 조사관들을 제치고 안선생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박장로를 지나도록 비켜 주면서도 그 형사들은 박장로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안이숙은 이 광경을 보면서 박장로에게 오지 말라고 손짓으로 말하는데 아는 척도 안하고 태연스럽게 그녀 있는 자리로 다가 와서 활짝 웃으며 "자, 이것이 어찌된 일이요! 하나님이 저 형사들을 소경으로 만든 것이 분명하지 않소? 형사들이 모두 나를 보지도 못하니 말이요" 그리고 큰 소리로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라 한다. 안이숙은 얼굴이 붉어지며 말하지 말라고 손짓으로 알렸더니 아주 불평스런 표정을 지으며 "아, 참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니" 라고 하고 다시 형사들을 제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기차가 이제 부산역에 도착했다 (105).
부산역 구내에 있는 화폐 교환소에서 한국 은행권과 일본 은행권을 교환해야 했기에 박장로를 구내 한쪽 구석으로 안내해 앉히면서 돈을 바꿔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어디 가시지 말고 꼭 이 자리에서 기다리십시오! 라고 당부했다. 돈을 교환해서 오니 박장로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사방을 찾아 보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필경 경관에게 붙들린 것이로구나! 불안한 마음으로 안고 찾아 보나 보이지 않는다. 혼자 두고 화폐 교환소에 간 것을 후회했으나 기운없이 연락선을 타는 부두로 걸어갔다. 그런데 부두에 가니 손님들은 연락선으로 올라탄 후였고 뜻밖에도 부두 한복판에서 박장로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그 앞에는 정복한 순사가 그의 옷을 조사하는 듯 보였다. "결국 붙잡혔구나" 생각하고 가까이 가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순사는 껄껄대며 의기 양양해 무어라고 떠들고 있고 순사는 박장로를 조사하는 것이 아니고 한복을 벗고 예복으로 갈아입는 그를 옆에서 도와 주고 있는 것이었다. 안이숙은 슬금슬금 그들에게 가까이 갔다.
박장로는 안이숙을 보더니 "이제야 오는군! 자, 나리님이 내가 대사의 예복을 갈아입는 데 도와주고 있으니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어요?" 한다. 그러자 연락선이 뛰이 하고 기적을 울린다. 그는 그제서야 당황하면서 단장을 집어 들고 벗은 옷을 발로 툭 차 버리고 안이숙 앞서 걸어서 기선 앞에 오더니 배에 올라가는 사닥다리를 가리키며 "자, 여기지?" 한다. 안이숙이 사닥다리를 보았을 때 기절을 할 뻔하였다 (106). 기선에 올라가는 사닥다리 밑에는 양편으로 수상 형사가 기선 사무원과 같이 서서 기선표와 도항증을 검사하고 있고 사닥다리 위의 기선 입구에도 양편으로 수상 형사와 기선 사무원이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안이숙은 눈을 감고 "오, 주님!" 하고 외친다.
그런데 안이숙은 자기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고 꿈을 꾸는가 착각했다. 박장로가 단장을 들고 수상 경관이 있는 자리를 벌써 지나 사닥다리 중복판으로 가는데 기선 2등 입구에서 조사하는 수상서원과 기선 사무원이 아무 말도 안하고 박장로를 기선 안으로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안이숙은 그 광경을 눈이 멍해서 보고 있다가 조사원들의 재촉을 받아 사닥다리에 발을 올려 놓으려 한즉 그들은 기선표와 도항증을 보자고 했다. 몹시 떨리는 손으로 기선표를 핸드백에서 내어 그들에게 주었지만 도항증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음은 설레고 다리는 무수히 떠리고 손도 걷잡을 수 없이 흔들거려서 정신없는 안이숙은 도항증을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고 아직도 기선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을 안 박장로는 기선 안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가 안이숙이 조사관들에게 걸려 기선에 오르지 못한 것을 보고 답답해서 그만 다시 안이숙 있는데로 내려오면서 크게 한국말로 "시간이 없는데 무얼 그렇게 꾸물꾸물하는 거요?" 하며 다가왔다. 안이숙은 그만 놀라 펄썩 주저앉을 만큼 비틀대니 수상 형사가 급히 부축을 하며 "아가씨, 기선을 타기도 전에 멀미를 하세요!" 하고 붙들어 주었다. 박장로는 큰 소리로 더구나 한국말로 "그래 왜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요? 응?" 하며 안이숙을 들여다 본다. 안이숙 대신에 형사가 조선말로 "도항증을 찾는 중이오" 박장로는 "자! 내가 찾아볼게 이루 주시오"하더니 돈이 가득한 핸드백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도항증을 끄집어 내 가지고 "이것 아니요?" 한즉 형사와 사무원이 "네 그것 맞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돈 속에 숨어 있었군요" 하고 도항증을 검사하고 기선 사무원은 안선생을 부축해 기선까지 올려다 주고 박장로에게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아 안선생 먼저 기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이숙은 떨리는 무릎을 겨우 옮겨 기선 안에 들어가니 박장로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안선생은 기가 막혀 어리벙벙하고 이리저리 보고 섰노라니 형사가 다니 나타나 미소를 띄우고 "당신 아버지 찾으시죠?" 하더니 "제가 찾아 들릴게 여기서 기다리시죠" 하고 없어졌다. 그만두라고 뒤에서 고함을 질렀으나 그는 들었는지 듣고도 그대로 가는지 가 버리고 말았다 (107). 안이숙은 이제 형사가 박장로를 잡아 도항증을 보자고 할 것이 아닌가 해서 정신이 더 어지러운데 얼마 후에 형사가 박장로의 팔을 이끌고 벙글벙글 웃으며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고 박장로는 의기 충천해서 벙글벙글 웃으며 같이 안이숙 앞에 나타났다. 형사는 친절한 말로 "할아버지 공연히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꼭 따님 옆에 있어야 해요" 하더니 안이숙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예쁜 아가씨 멀미가 굉장하신 모양이시죠? 따끈한 차를 가져다 드리라고 할 테니까 염려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얼마 있다가 차를 자기 손수 가지고 와서 놓고 나간다. 안이숙은 대낮에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박 장로는 기쁜 듯 창문을 내다보며 소리를 높여서 시편을 읊었다. 안이숙은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차며 일어나라고 하고 손에 채웠던 쇠고랑을 풀어 주어 천사의 뒤를 따라 나갈 때 옥문이 하나씩 저절로 열려서 옥에서 나오게 된 베드로가 꿈을 꾸는 줄 알았다고 한 성경 말씀을 생각했다. 박장로는 감개 무량한 음성으로 "오! 주님은 나의 피난처시니이다"를 연발하고 있었다. 나는 내 믿음이 부족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하기도 했다 (108).
박장로와 안이숙은, 시모노세끼에서 내려 동경행 특별 급행차 2등실에 올라탔다. 밤새도록 기차는 달려갔다. 옆에 앉은 박장로는 안이숙이 자기에게 주의하고 있는 눈치만 보이면 힘을 다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숨겨 주신 사실을 되폴이하고 또 하고 또 하면서 앞으로 우리 길이 환히 주의 이적으로 열릴 것을 주장하여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했다. 안이숙도 그의 열렬한 믿음에 동의를 하고자 애를 썼으나 그녀 마음에서 강한 확신은 앞길이 평탄한 니느웨로 가는 요나 선지자의 길이 아니라, 마치 베드로가 로마를 향해 들어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러 가는 길같이 생각되었다. 기왕이면 깨끗하게 죽어서 수치를 드러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1939년 2월에 일본에 건너가서 그곳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박 장로의 아들과 함께 일본 정계요인들을 찾아가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신사참배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일본의 멸망을 경고하기로 했다. 일본에 온 두 사람은 일본에 유학중이던 아들 박영창과 함께 일본 각계 지도자들을 만나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설명했다. 일부 일본 지식인들이 취지에는 공감했으나 투쟁에 동참하는 것에는 난색을 표했다.
40일간의 이러한 유세가 아무런 성과가 없자, 더 자극적인 방법으로 일본에 경고를 하고 시위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그때 종교단체의 국가통제를 목적으로 한 종교 단체법이 상정 된 제74회 일본 제국회의가 개회중이라 여기에 들어가 경고문을 투하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제국회의의 방청권을 얻고 사전 답사를 한 다음, 일본 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들어가서 박 장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대 사명이다"하고 외치며 두루마리로 된 경고문과 건의서를 단상을 향해 던졌습니다. 경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큰 도는 나라의 한계가 없고, 진리는 중외에 능히 가통하므로 오늘날 동아 오억만 생명의 사활 문제가 이번 의회에 달려 있다는 것.
둘째, 하나님의 섭리로는 그 나라의 종교 부흥 여하에 따라 국가의 패망과 번영이 좌우된다는 것.
셋째, 인간의 정부가 소위 '종교법안'을 제정하여 종교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간섭하고 탄압한다면 세계와 인류를 통괄하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하늘의 재앙을 내리실 것이니 의회 의원 제공이 진리를 깨닫고 못 깨닫는 데 국가의 흥패가 달렸다는 것.
넷째, 일본 제국의 정부와 국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면 축복을 받아 강성하여져서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강대한 나라 백성을 다 쫓아내고 밟는 곳마다 너희의 소유가 되려니와 돌이켜 마음에 미혹하여 다른 가신과 우상을 섬기면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하심을 받아 반드시 패망하고 만다' 는 것(신명:11장 참조).
다섯째, 일본 정부는 신도 등 종교를 폐지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기독교로 국교를 제정하라는 것.
여섯째,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가 참된 종교라고 모두 주장하니,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참 신 여호와 하나님과 가짜 신 바알 신을 구별하기 위하여 도전을 한 것과 같이, 일본 정부 주최로 넓은 광장에 장작 백단씩을 쌓아 놓고 신도, 불교, 기독교의 대표를 그위에 앉힌 후 일시에 불을 질러 그 속에서도 살아 남는 대표가 믿는 종교로써 국교를 창정하자!
이들은 즉시 '제국 의사당 소요죄'로 체포되어서, 일본 경시청의 취조를 받고 본국으로 강제 송환 되었다. 박장로는 경시청에서 취조를 받을 때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만약 나의 생존 중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자존의 대에 이르기까지라도 목적 관철을 이루기 위하여 이 같은 행동을 계속 감행하겠다" 하고 큰소리를 쳤다.
신사참배 거부 항쟁은 계속되었고, 경찰서와 평북지사를 찾아가 항의하고 총독에게도 경고문을 보내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더욱 강력해졌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온갖 명목을 붙여 검거하고 투옥했다. 박관준 장로 역시 여기에서 제외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1년 봄, 영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신의주교도소를 거쳐 평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도소에서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신사참배가 죄임을 역설했고, 일본의 패망을 예언했다. 박관준 장로는 주기철 목사와 최봉석 목사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감옥에서 들었다.
평양 감옥에 면회를 간 안정숙 집사와 (안이숙의 언니) 박관준 장로 사이의 대화가 있었다. 어떤 직원이 간수를 뒤따라오며 무슨 말을 건네자, 간수는 그와 상대해서 이야기를 하느라고 한 걸음쯤 아버지보다 뒤처졌다. 이때 안 집사는 재빨리 아버지에게 말을 건넬 기회를 얻었다. “장로님, 재판 때에 재판장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어요?” “재판장이 나더러 말하기를 ‘일본이 대동아전에서 이렇게 승리를 하고 있으니 영감님 너무 고집 피우지 말고 신사 참배에 동의하고 이제는 감옥에서 나가시오’ 하기에 ‘미나미 총독도 나에게 머리를 숙이며 충고에 감사한다고 말했는데, 내가 재판장인 당신의 말을 듣겠소? 명년인 1945년 8월에는 당신들이 나를 가두어 둘래야 가두어들 수도 없을 것이오. 그때 일본이 망하든지 조선이 독립되든지 간에 끝장이 날 터이니 나는 그때에 나가겠소!’라고 말했지.”
뜻밖에도 이 같은 말을 들은 안 집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것은 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야. 분명히 나는 계시를 받은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이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뿐인가? 내가 어제 새벽, 그러니까 감옥에서 위독해지기 전날, ‘관준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오늘이 졸업이다. 내일 나가서 삼 일 간만 성경을 가르치고 나 있는 곳으로 오너라.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다. 내가 금면류관과 금띠 한 개를 네게 더 주리라. 이제부터는 너를 죄인이라 하지 않고 아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천국은 다 네 것이다’ 하는 계시까지 분명히 받았는데.”
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라는 뜻을 생각해 보니 내가 신사 참배 반대 투쟁에 헌신한 지 어언간 팔 년이 되었거든. 참 그대로 맞았지 그런데 ‘삼일 선생’이라는 뜻을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감옥에서 나가서 삼 일 간만 성도들에게 신앙 간증을 하라는 뜻인데, 그래도 삼 년은 더 살아야 일본 정부나 총독과 더 싸울 수 있을 텐데, 참 어떻게 될는지.”
안 집사는 아버지의 (박영창 아들, 박관준 부친) 간증에 감격하고 방금 들은 간증담을 모두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그리고 아버지가 종이를 곱게 꼬아서 단단하게 만든 트렁크 손잡이 같은 것을 이상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장로님, 이게 무엇이야요?” 아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었다. “그것 말이야? 그것은 내가 8월 달에 출옥할 때 내 짐을 들고 나오려고 한 달 동안 노끈을 꼬아서 트렁크 손잡이를 만들어 미리 준비를 해둔 거지.”
“그러니까 지금 출옥하신 것이 아니어요?” “아니야, 진짜 출옥은 금년 팔월달이야.” 안 집사는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버지가 하는 말은 지난번에 예언같이 말한 바를 거듭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 아버지는 “1945년 8월에는 일본이 망하여 우리가 다 출옥을 하게되고 조선이 독립된다”는 말을 했었다. 그래서 안 집사는 마음속으로 금년 8월을 주목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1945년 정월을 맞이하자 금년 8월에는 석방되는 새해를 맞이하였다고 어느 해보다도 기쁨에 넘쳐 있었다. 정월 중순경 어느 깊은 밤, 아버지는 감방 안에서 홀로 기도를 하고 취침 중에 환상을 보았다.
앞에 큰 바위가 나타났는데, 돌연히 양쪽으로 깨지더니 샘(생명수)이 콸콸 솟아나와서 마음껏 마셨다. 또 천사가 나타나더니 ‘만나’ 라는 떡을 큰그릇에 가져오고, 또 때를 따라 다른 천사가 나타나더니 “이것은 생명 과실이다”라고 하면서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한아름 꺾어 가지고 와서 마음껏 따먹으라고 하여 마음껏 먹었다. 아버지는 이같이 환상 속에서 영계의 음식물을 먹은 후부터는 이상하게도 시장한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감방에 넣어 주는 관식을 전폐하고 더욱 금식기도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같이 6년 간 옥중 생활을 치른 아버지는 1945년 8월은 일본이 망하는 해라고 믿고 너무 기뻐서 40여 일 간에 걸쳐 금식을 단행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다가 의식을 잃고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다. 1945년 3월 11일, 아버지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형무소 당국자들도 당황해서 즉시 측근자를 불러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오랜 금식으로 이미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였다. 소식을 들은 가족과 안이숙 선생 등 지인들이 병원을 찾았다. 그곳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찾아오는 친지들에게 옥중체험과 성경말씀을 증거했다.
“나는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라는 계시와 같이 나의 책임을 다하고 영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이사야 11:10-16의 말씀대로 됩니다. 여러분 끝까지 신앙을 잘 사수하시다가 앞날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때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라는 찬송을 불렀다. 그러다가 점점 음성이 작아지더니 향년 70세를 일기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45년 3월 13일 오전 10시 정각이었다. 아버지의 임종은 이같이 너무도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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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숙 여사, 죽으면 죽으리라 상권
박영창, 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대기
시시 때때로, 하나님은 박관준에게 꿈과 환상을 통해서 혹은 음성을 통해서, 혹은 놀라운 이적 체험들을 통해서 앞 날을 알려 주시고 용기와 확신과 방향을 정해 주셨다. 이런 영적 체험들이 있었기에 그 십자가의 길을 겁내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온전한 헌신과 정결한 삶이 가져다 주는 축복된 삶이다. 우리에게는 물론 기록된 말씀 성경이 최고 권위이다. 모든 체험이나 환상도 이 말씀에 비추어 그릇되면, 틀린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날도 여전히 성령께서 꿈과 환상,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을 통해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심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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