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대개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런 가르침의 근거는 여기 인용된 로마서 말씀이다. 그런데 입술로 예수님을 "주"라고 (kurios) 시인하는 일은 김일성이가 '주'이고, 수령이고, 절대자인 북한 상황에서는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 고백이다. 로마서가 기록된 것은 사도 바울의 3차 선교 여행 (주후 53-57년) 때였다 (주후 57년). 그 시대에 로마제국에서, 특히 소아시아 지역에서 (지금 터키) 로마 황제를 '주'라 고백하는 황제 숭배교가 퍼져 있었기에, 만약 어떤 사람이 로마 황제 대신 예수님을 "주"라 고백한다면 그는 현 북한에서와 동일하게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신앙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와 같은 상황에서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기도를 따라했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십중 팔구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란 그렇게 값싸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했다고 자신이 지금 구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믿는다면, 그것은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듯, 구원받았다면, 거듭난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그의 삶이 그 믿음을 증거하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만약, 예수님을 "주"로 시인했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그 때부터 섬겨야 한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님의 종으로서 노예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을 절대권을 가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거짓이거나 잘못된 것이다.
다니엘 김이란 선교사가 있는데, 나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 근교에 위치한 그 트리니티 신대원을 졸업했다고 들었다. 그의 부친이 재일 교포 2세로 한국말을 전혀 못하고 어머니는 한국인인 듯 보이는데, 그 부친이 일본 제일의 조직 폭력 조직에서 교토인가의 지부장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부친이 집에를 오지 않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나중 알고보니 감옥에 수감된 상태였고, 자기 모친이 부친에게 수 백장의 편지를 보내서 전도를 했다고 한다. 그 부친은 그런 편지에 회개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두드리고 두드린 결과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 편지 한 장에 그의 강팍한 심령이 깨어지고 회개를 하게 되었다 한다 (김 선교사 설교 중에 들은 것). 그런데 회개도 그의 부친은 야쿠자처럼 했다고 한다. 즉, 그의 부친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인인지를 이제 스스로 감지하는 순간,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는데, 이 회개도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가 아닐 수 없지만, 감히 내가 무릎을 꿇고 회개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고, 또한 감히 내가 옷을 입고 회개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 감방에서 옷을 홀딱 벗고 서서 그 밤중 내내 서서 애통하며 회개를 했다고 한다.
이 다니엘 김 선교사 부친은 어떻게 그 이후로 신앙생활을 했을까? 아마 야쿠자 조직에서 주인에게 생명을 걸고 충성을 하듯, 생명을 바쳐 예수님께 충성을 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리라 본다. 그런 신앙생활이었다면, 바로 삶이 변화된 신앙생활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아래는 박한나 목사, 저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의 손자 며느리의 간증이다.
전도자이자 순교자인 김익두 목사의 손자 며느리 박한나 목사,
‘고난 속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 간증.
[방주교회에서 열린 2018 오픈 도어 후원의 밤에서]
많은 순교자의 피와 눈물의 기도로 얻은 자유
할렐루야! 세상에는 우연이란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제가 여러분들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하고 잘난 데가 있어서 여기 서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들어 쓰시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그 능력으로, 그 기적으로 이 영광의 자리에 저를 세우셨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너무나 반갑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너무나 크고 놀랍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할 때, 마음에 상처 있고 가정의 문제가 있는 성도들, 육신의 고통받는 성도들을 주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셔서 다 창조의 모습대로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시편 119편 71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를 본문으로, ‘고난 속에서 내가 만난 하나님’을 주제로 함께 은혜를 나눠볼까 합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들께 늘 감사하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권의 자유와 함께 신앙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살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길거리에서 찬양한다고 누가 잡아가는 사람도 없고, 예배 드린다고 잡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자유가 거저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많은 순교자의 피와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늘 이런 은혜와 축복이 있음을 항상 잊지 마시고, 항상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저는 이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만 리가 넘는 가시덤불 길을 헤매야 했고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두 번 탈북 했다가 두 번 북송 되었고, 크고 작은 감옥을 비롯해 열 군데도 넘게 갔습니다. 여기(한국)서 교도소 사역을 한 것도, 제가 감옥에 있을 때 한국에 가면 꼭 교도소 사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에게 ‘비록 육신은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와 처벌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감옥에서도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몇 년 동안 감옥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1년이 채 안 되어 다른 목사님과 함께 전국 교도소들을 거의 1년 동안 다녔고, 사임하며 정말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죄인들인데 머리도 깎지 않고, 여자들도 머리를 자르지 않고 기르고, 예배드리면서 마음대로 쓰고, 또 마음대로 악기를 다루면서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감옥에서 하나님을 몰래 찬양하다가 들켜서 두드려 맞고, 벌도 받았고, 정말 그 땅에서 죽어간 이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저 사람들이 이렇게 행복하고 자유스럽게 자기 죄를 뉘우칠 수 있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전쟁 과부들에게 몰래 복음을 전하던 어머니
저희 가정에 대해 짧은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 없고, 추려서 몇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5~6살 때 밤에 자다가 깨어났는데, 저희 어머니가 무엇인가 손에다 쥐고 목에 흰 사슬을 걸고, 눈물 흘리면서 자꾸 중얼거리는 것을 봤습니다. 어린 마음에 ‘사람도 없는데 왜 저렇게 우는지, 왜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저렇게 말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 후에 탈북하고 교회를 갔을 때 자매님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단 것을 보고 ‘엄마가 목에 건 것이 저것이었구나’ 알고 정말 많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땅(북한)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은 예수 믿는 사람이고 목사와 선교사는 양의 탈을 쓴 승냥이들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었다가는 온 가족과 친척들까지도 정치범 수용소에 깊은 밤 1시, 2시, 소리없이 차로 실어 잡아가고, 그들은 간첩이다, 나쁜 사람이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하루는 어떤 사람에게 “절대로 친한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고, 온 식구, 친척들까지 죽으니 일생 동안 돌아가실 때까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듣고 그게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과부들이 멀리서 찾아와서 우리 어머니에게 눈물로 하소연하고, 어머니가 들어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마지막에 그들에게 말씀한 것은, “사람에게 아무리 말해도 같이 말했다가 돌아서면 남한테 전해진다. 그렇게 울고 싶고 안타까울 때는 하늘에다 대고 하소연하고 울어라. 하늘은 우리의 말하는 것을 다 듣고 마음도 알고 해결해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어린 마음에 학교를 가고 올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나도 거리가 멀면 안 들리는데 저 하늘에 누가 있길래 땅에서 말하면 우리말을 다 들을까? 거기서도 밥도 먹고 물도 마시고 채소도 있을까?’ 하며 궁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제가 탈북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때야 이 세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습니다. 사망하시는 그날까지도 제게 예수님을 전하고 가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1990년도 위암으로 사망하셨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도 학교에 갔다 오면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모여서 무슨 말을 하다가 생뚱 맞게 딴말로 돌려 치기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나한테 저렇게 나가 놀라고 내쫓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할 때 어머니가 그 불쌍한 과부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7살 때 할아버지 김익두 목사 순교 목격한 남편
그리고 저의 남편은 김익두 목사님의 손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키웠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1950년 10월 14일 신천 서부교회에서 새벽 기도시간 설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쫓겨가는 북한 인민군 패잔병들에게 죽임당하셨습니다. 남편은 7살 나이에 할아버지가 순교 당하는 것을 보았고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할아버지가 목사라 하면 나도 죽이겠구나!’라고 생각해 친한 사람에게도, 가족에게도 할아버지가 순교자라는 말을 못 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부부 간에도 자식 간에도 당의 사상에 틀린 것, 어긋난 것은 다 신고하라!, 신고하면 용서해준다고 하니 가족 간에도 불신이 있고 눈치 보고 말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저도 자라왔습니다.
남편도 가족에게 몇 십 년 숨기고 있다가, 탈북 후 중국 조선족 교회에서 이야기를 듣는 중 수십 년 전 할아버지가 생각나 “우리 할아버지도 목사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 할아버지 이름이 아직도 기억나나요?”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이름은 김익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깜짝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 후에 교회 장로님들이 이야기해 주셔서 제가 알게 됐습니다. 오늘 제가 영광의 자리 서게 된 것도 김익두 목사님과 보위부에서 고통받는데도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저의 남편과 저의 어머니 기도가 있었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어머니의 기도가 있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도 항상 자식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가정이 복음을 알게 된 것은 남편 덕분입니다. 남편은 중국에 가서 미국에서 오신 한인 김동식 목사님을 (2000년 1월 북한으로 납치, 2001년 정치범수용소에서 사망) 알았습니다. 하루는 김동식 목사님이 남편에게 3천 원을 주셨습니다. 같은 교회에 있던 교포 집사님이 저희 남편 주머니의 그 돈이 욕심 나서 김목사님이 3일 동안 출장을 가신 동안 남편을 공안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이 와서 저희 남편을 잡아갔고, 그 집사님은 고발한 값으로 3천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보위부에 가면 어떻게 되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중국 감옥에 있을 때 핸드폰을 빌려 중국에 있던 저희 이모에게 전화 걸어 내가 어떻게 돼서, 누구 때문에 잡혀가니 만일 후에 우리 가족을 만나면 꼭 전해달라고 말하고 끌려갔습니다.
북한 보위부에서는 정치범이라고 하면 절대 면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가족들이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데 면회 좀 시켜 달라”고 간부에게 사정해서 4명이 갔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자고 일어나면 ‘누구네 아버지가, 누구네 어머니가, 누구네 딸이, 아들이 어젯밤에 죽었대’라는 소문이 무성했고, 그것이 동네 뉴스였습니다. 다 굶어 죽은 것입니다. 간부가 면회 오라고 했는데, 저희 집도 다 도둑 맞아 가지고 갈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이들 옷을 입히고, 옥수수 가루로 떡 몇 조각 만들어서 보냈습니다. 너무 작아서 전 차마 갈 수가 없어서 아이들만 보냈습니다. 가족이 모이면 작은 방에서 작은 상에 옥수수도 나눠 먹는 것이니, 함께 나눠 먹으라고 했습니다.
저희 남편은 면회간 아들의 손을 밑으로 잡아당겨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고 합니다. 도청 장치가 있어 말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님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확실히 살아 계신다.’ ‘눈물 나고 안타깝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예수님께 기도하면 너희 기도를 들어주신다.’ ‘내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면 꼭 이 땅을 떠나서 중국에 가서 ○○교회 김○○ 장로님을 찾아가라. 너희가 찾아가면 하나님께서 다 앞길을 열어주실 거다.’ 이것을 손바닥에 썼는데 면회 마치고 집에 오면서 아들이 흥분되어 집 문을 열자 마자 말했습니다. “엄마! 아버님이 예수님을 믿으래요. 엄마, 예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확실히 계시고, 우리가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정직한 분인데 우리 아버지가 전한 예수님, 우리도 믿어봅시다!”
그날부터 우리는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는지도 몰랐지만, 마음의 소원과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었고, 놀랍게도 그날그날 응답됐습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없고, 미신이라고 배워왔는데 세상에 속아 살았구나!’ 그러면서 저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의 딸이 26살의 나이로 1997년 5월 6일 굶어서 죽었습니다. 여기 분들의 생각은 ‘일하기 싫어서 죽었는가’ 생각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아니고 (북한은) 직장에 나가 일을 해도 배급을 안 주고 월급을 안 주니 사람들이 매일 밤 죽어 나갔습니다. 세 살 짜리 아기들도 “어디 가서 주워 먹으라, 빌어먹으라”고 엄마가 다 밖에다 내놓기 시작했고, 시장에 갖다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 다 흩어지고 굶어 죽고 남은 사람이 자기 혼자니까 빵 몇 개하고, 술 한 병 하고 자기 집을 바꾸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희 집 물건이 다 도둑 맞고 김칫독과 이불만 남았는데, 저희 딸이 그걸 뜯어서 시장에 내다 팔아 식량으로 옥수수를 사보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수술 후유증으로 앉아 있고 걷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딸이 나쁜 사람을 만나서 다 사기당했습니다. 집에 들어오기 미안해서 밖에서 헤매다가 집에 왔는데, 2주 넘게 살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딸이 죽기 며칠 전 말했습니다. “엄마, 남조선이 여기서 선전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니에요. 그 땅에는 자유가 있어요. 나는 정말 남조선에 가고 싶었지만, 엄마가 앓고 있고 어린 동생이 있어 갈 수 있어도 못 갔어요. 엄마, 아무래도 나는 희망이 없고 살 수 없는 것을 알아요. 정말 이 땅에 소망이 없으니 어리석게 나처럼 있으면 죽게 될 거니, 내가 죽으면 꼭 중국에 가고 갈 수 있으면 남조선에 가세요. 잘 살고 배부를 때 나를 생각해주세요.” 저희 딸이 그런 말을 남기고 며칠 후에 죽었습니다.
북한은 5~6명이 모이면 밀정이 있어서 조심해야 합니다. 남자들이 술 먹으러 가면 여자들이 제일 싫어합니다. 술 좌석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어느새 온 가족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고 죽어 가기 때문에, 그렇게 험한 곳에서 하고 싶은 말도 가족끼리 할 수 없는 형편에서 사람들이 헤매고 있던 때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말 한마디를 잘못해서 붙잡혀가고 그렇게 험한 세상입니다. 그곳에서 저희 딸은 “꼭 남조선 가라”, “후일에도 가서 잘살면 나를 생각해달라”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남편은 감옥에서 한인 목사님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남조선 안기부 간첩’ 죄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인간의 입으로도 외울 수도 없는 고문을 많이 당했다고 합니다. 그(감옥) 안에서는 일회용 종이컵 만한 다 썩은 옥수수 밥 덩이를 주는데 남편은 자기 밥을 떼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먼저 죽겠다. 좀 먹으라”고 말하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중국에 가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봤고, 좋은 구경도 많이 했고, 나는 죽으면 이제 천국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 그러나 하나님 모르고 육신을 위해 고통받고 살다가 죽어도 지옥불에 가겠느냐?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 그러면 가족도 구원받는다”고 복음을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남편은 낮에 죽도록 고문당하고 다 퍼져서 감옥에 쳐 넣으면 밤에는 질질 끌고 다니면서, 기어 다니다시피 하며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무서운 보위부 감옥에 저희 남편을 통해 지하교회를 세워주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풀려난 지하교회 성도들이 저희 집에 찾아왔습니다. 감시하니까 낮에는 못 오고 밤에 와서 창문을 두드리고, 감옥에서 남편이 했던 일들을 말하면서 “세상에 그렇게 좋은 사람이 있는 것을 정말 몰랐다”고, “그 안에서 고문당하고 핍박받고 멸시 받고, 그분이 당한 것을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할 수가 없다. 가족들이 두고두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냐”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남편이 만일 살아나오면 그(감옥) 안에서의 고통을 본인 입을 통해서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제가 마지막에 보위부에서 찾아서 남편을 면회 갔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는데 의자가 쭉 있는데, 조그만 아이 같은 사람이 앉아있었습니다. 다리가 막 붓고, 얼굴이 고문을 받아서 터지고 멍들고, 얼굴 같지 않은 사람이 앉아 있어서 ‘저 사람 무슨 죽을 죄를 지어서 저기 앉아있는가’ 찬찬히 봤습니다. 눈은 깜빡거리고 있어서 ‘저 사람 아직 죽지 않고 살았구나’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북한 보위부 간부가 남조선의 큰 간첩을 잡았다고, (그 지역에) 내려와 6개월 넘게 있었습니다. 그 동안 무슨 임무를 받았는지 보위부서 말하라고 그렇게 고통을 주고 갔다고 했습니다.
감옥에서 남편하고 할 말 있으면 하라고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이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왜 안 오냐?”고 하니까, “저 뒤에 있지 않느냐?”고 가리켰습니다. 들어올 때 문 옆에 앉은 살이 다 빠지고 온 몸에 살을 칼로 긁어도 1kg도 안될 것 같은 그 사람이 제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봐도 본인의 모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계속 울고, 간부에게 집에 남편을 내보내 달라고 하니 “저 새끼는 당과 수령을 배반하고 저 혼자 잘살겠다고 중국에 도망갔다가 남조선 간첩 안기부를 만나 간첩 임무를 받아왔다”고, “그렇기 때문에 집에 갈 수 없다. 찾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지 몰랐습니다. 며칠 후 남편은 순교 당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리를 찾았구나, 저 사람이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저 사람이 하던 일 다 못하고 간 일을 내가 꼭 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1997년 5월 딸이 굶어 죽고, 그해 10월 저희 남편이 보위부 감옥에서 순교 당하고 며칠 후, 중국에 여행 갔다 온 자매가 저에게 조그만 종이 쪽지를 주었습니다. 이걸 자꾸 읽으니 기도가 된다고, 제게 가져오면 알 것 같다며 외우라고 준 것은 ‘주기도문’이었습니다. 작은 종이의 앞뒤에 깨알같이 썼는데, 콩알처럼 만들어 옷에 숨겨 들어올 때 몸수색에서 발각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떻게 기도하는지도 모르고 기도했는데, 주기도문을 외워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외우며 ‘꼭 남편이 못한 일을 내가 하리라’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1998년 8월 14일 밤, 동네 사람과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8월 장마철, 강 위에서 밥 한 그릇 얻어먹겠다고 떠난 사람들이 영양실조가 와서 허약한 몸에 물살에 밀려 가서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 시체가 중국 쪽으로 가면 중국에서 군인들이 긴 막대기로 밀어 북한 쪽으로 떠내려 보냅니다. 시체가 북한 쪽으로 가면 북한 군인은 또 중국 쪽으로 가라고 밀고, 북한 사람이 그렇게 가치가 없고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강을 건너가려면, 사람이 다니고 자동차가 다니는 다리 밑으로 가야 했습니다. 정찰하는 이들이 측량을 위해 다리 기둥에 박아 놓은 쇠에 올라 건너가는데, 발을 제대로 디딜 곳도 없어서 쉬지 않고 계속 이 기도만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남편이 하지 못한 일을 꼭 하겠습니다.’
지금 같으면 밑에 물이 출렁거리는 것이 보이고 죽을 것 같은데, 기도하면서 건너니 하나님이 저를 살리신 것 같습니다. 큰 기둥을 건널 때, 잡을 곳도 없이 계속 기도하고 주님을 붙잡고 가니 정말 주님께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또 다리의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니 앉아서 죽을 수도 없고, 함께 건너가는 청년이 저를 붙잡아주다가 그 청년도 작으니까 저를 잡지 못해 넘어졌습니다. 마른 풀대들 위로 막 넘어지니까 소리를 듣고 중국 군인들이 놀라서 “누군가!”하고 소리치지만 내려오지는 못했습니다. 북한 군인은 중국 군인들도 무서워하거든요. 거기서 그 청년을 찾느라 헤매고 다니다 중국 군인들한테 붙잡혔지만, 이 사람들도 저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집으로 가라고 다시 강 옆에 두었습니다.
8월 13일 토요일, 두만강을 건너서 15일 아침에 남편이 알려준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김 장로님을 찾으러 갔더니, 젊은 여인들이 한복을 예쁘게 입고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얼굴을 보니까 다 결혼한 여인들 같은데 누굴 또 사랑한다고, 내가 얼굴이 좀 뜨거워졌습니다. ‘저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이구나, 교회는 이상한 곳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는 사람마다 친절하고 반갑게 대해주고, 기뻐서 웃는 것이 천사처럼 아름답고 놀라웠습니다. 먼 훗날에 성경을 읽으며 ‘아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었구나!’ 알게 됐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 지역에서 누가 소개해주어 일을 했습니다. 벌판의 작은 농막에서 힘들게 일하고, 밥을 먹을 때도 마스크를 껴야 했습니다. 마스크를 열고 밥을 한 숟갈 먹고 다시 마스크를 썼습니다. 이때 소형 라디오를 하나 구해 밤마다 제주 극동방송을 듣고 새벽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한국이 새벽 1시면 그곳은 새벽 2시인데 제주 극동방송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성경을 다 쓰기도 했습니다. 몇 달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그때 숙소에 같이 있던 중국 조선족 청년이 벼를 베다가 실수로 자기 손바닥을 낫으로 베었습니다. 후딱 뒤집히니까 살이 두꺼웠습니다. 이 청년은 주인이 병원을 안 보내주니 자기 살을 덮어놓고, 거기다가 담배와 된장을 섞어 이겨서 감고 일을 했습니다. 주인이 일을 하라고 하니까요. 얼마나 아파하는지, 하룻밤 지나니 붓기 시작하고 이틀째, 삼 일째 되는 날은 손이 두 배, 세 배 불어나고 피부가 너무 불어 저절로 터져 물이 나오고 팔까지 새카맣게 검게 변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이 너무 불쌍해서 기도했습니다. ‘이 사람을 하나님이 살려 주시면, 하나님을 알게 해주세요.’
청년이 동네 작은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패혈증이 와서 팔을 잘라도 살지 못살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그 팔을 붙잡고 울고, 이 사람을 살려 달라고 엎드리고 기도했습니다. 새벽녘에 깜빡 잠들다 눈을 탁 뜨는 순간에 이 청년이 “내가 천사를 봤다”고 했습니다. 천사가 어떻게 생겼냐, 뭐라고 말하더냐? 고 물으니 청년이 “저 문이 열리더니 구름 위에 받들려서 천사가 하얀 옷을 입고, 얼마나 환한 옷인지 세상에서 그처럼 아름다운 것을 못 봤고, 나는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울지 말아라. 내가 너의 병을 고쳐 주리라!’고 말하고 그대로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나도 놀라서 청년 팔을 보고, 이 청년도 놀라서 팔을 내려다보는데,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몇 배로 불어나고 간장 빛으로 새카맣던 피부가 정상으로 다 회복되고, 진물 나고 터진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팔목과 손만 연한 보라색으로 흔적만 남아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나도 놀랐지만, 그 청년이 더 놀랐습니다. 자기 동네에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가 전도해도 청년은 ‘예수 믿으면 노래방도 못 가고 담배, 술도 끊어야 하는데, 혼자 사는 내가 담배, 술을 끊을 수 없다!’며 교회에 안 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장애인 아니면 가난한 사람만 다니는데, 하나님 계시면 왜 잘살지 못하고 병도 고쳐주지 못하냐? 너희가 속아서 목사 살려주느라 헌금하고 온다!”고 놀리곤 했었답니다. 그랬는데 그날 밤 청년이 막 울면서 무릎 꿇고 앉아 몇 시간 회개를 했습니다. “내가 팔을 잘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나를 살리신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 있는 것 알았다!”고, “세상 좋은 것 다 버리고 이제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그렇게 울었습니다.
내가 중국의 목사님 댁에서 ‘세상에서 방황할 때’ (주여 이 죄인을), 그 찬송 하나를 배웠습니다. 내가 유일하게 부를 수 있는 찬송가를 그 청년이 여느 때 들었으니 자기에게도 배워 달라고 해서 배워주었습니다. 청년이 음치인데 계속 그 노래를 부르고, 우울하던 사람이 그날부터 바뀌더니 항상 웃고 기뻐하고 살았습니다. 예배를 드리면 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인은 영원히 돈도 안 주고 북한 사람이니까 부려먹으려고 하고, 그것이 너무 강도가 세서 있을 수 없어 계속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도망칠 기회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시내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으니 도망칠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나오게 됐습니다.
제가 농촌에서 가정부로 일할 때, 밤에 제주 극동방송을 들었습니다. 새벽 2시 반쯤 되면 방송 소리가 멀어지면 힘으로라도 막 잡아당기고 싶은 심정으로 방송을 들었습니다. 그 가까운데 교회가 보이는데, 중국 공안이 북한 사람을 잡으러 오기 때문에 교회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안타깝고, 교회에 갈 수 없으니 교회를 바라보며 눈물만 흘렸습니다. ‘나도 교회 가고 싶다!’고, ‘나도 말씀 듣고 싶고, 마음대로 찬양도 배우고 마음대로 부르고 싶다!’고, 이렇게 항상 눈물 흘리고 살았는데 주일날 더 눈물이 났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제주 극동방송을 들을 시간, 주일날 새벽 눈을 떴습니다. 시골의 1평짜리 방 천장 위에 환한 빛이 있었습니다. 불도 없는데 깜짝 놀라서 저게 무슨 빛이 있나 해서 보니까 495라고 숫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자동차 번호인가 하다가 혹시 찬송이 아닐까 해서, 불을 켜고 찬송가를 찾아보았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것을 읽으면서 정말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만 모시고 살면 내 마음도 천국이 되는구나!’ 헸습니다. 그때부터 말씀을 외우고, 혼자서 예배드려도 기쁘게 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어느 날 조용하고 따듯하고, 산골짜기에 시냇물이 졸 졸 졸 졸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 너무나 평온한 소리로 ‘주님 주시는 은혜로다. 주님 주시는 은혜로다. 주님 주시는 은혜는 나와 더불어 늘 평안하리라!’는 음성을 주셨습니다. 깜짝 놀라서 내가 그 자리서 ‘내가 언제 잡혀갈지도 모르고, 두려움 속에서,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도 못한 시대에 사는데 내 마음이 어떻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그때는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아무 말씀을 안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그 후 감옥 10곳, 그 험한 감옥에서 고문 받고 터지고 정신 잃고 다니면서, 그 때에야 왜 주님이 나 한테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 후에 여러분이 성경을 처음부터 다 믿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성경을 처음으로 읽을 때 10대 원칙을 보며 김일성 주체사상이 이걸 딱 바꿔 놓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의 혼인잔치,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술을 좀 많이 뽑아보았는데 (술을 만들어 보았다는 의미), 누룩도 안 들어가고 아무것도 안 들어가는데 포도주가 되다니 성경도 좀 보탠 거지, 재미있게 읽으라고 좀 보태서 썼는가 보다 했습니다. 계속 궁금한데 내가 모르니까 하나님이 책망하지 않으시고, 체험을 통해 알게 하셨습니다.
중국의 한 한국 사람 집에서 일할 때, 그 집 할머니가 불교를 믿으면서 나를 예수 믿는다고 자꾸 핍박했습니다. 자기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반찬과 맛있는 것은 다 냉장고 넣고 김치도 나를 안 먹였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고, 정말 멸시, 천대받고 있었습니다. 제삿날이 되니까 수정과를 20리터 통에 가득 만들고, 다른 음식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다음날이 구정이었습니다. 똑같은 다른 통은 냄새를 빼라고 쌀뜨물을 담아 놨는데, 그 통을 빨리 깨끗이 가셔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20리터 통을 열고 한창 쏟다가 통이 가벼워져 보니까, 내가 실수해서 쌀뜨물 통을 쏟지 않고 쌀뜨물 통은 저 구석에 있고 수정과 통을 다 쏟은 거예요. 그것은 돈 주고도 살 수 없고, 그 할머니의 얼굴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그 얼굴이 떠오르니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때 내가 믿지 않던 포도주 기적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 내가 이 귀한 음식을 다 버렸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그 할머니가 너무 무섭다!’며 ‘가나의 혼인잔치 포도주 기적, 그것이 정말 있는 일이라면 내게 그런 기적을 달라!’고 나도 모르게 그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음성으로 그 통에다 있었던 것을 갈라내라고 하셨습니다. 막 할머니가 들어오고, 놀라서 빨리 재료를 땅에다 쏟고 어쨌든 갈라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할지 몰라서 서 있는데, 거기다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놀라서 세탁기 수도꼭지를 틀고 막 두근거리며 채워서 갖다 놓았습니다.
밤 12시가 돼서 할머니의 큰아들이 왔는데, 준비가 다 돼서 사장님들이 오셨으니 나더러 수정과를 갖다 주라고, 맛을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심장이 뛰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갖다 주고, 약과도 갖다 줬는데 사람들이 먹어보고 마시고, 그 시간이 몇 시간은 걸린 것 같았습니다. 다 마시고도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아 이게 수정과가 아니라 맹물인데 이상해서 저러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할머니가 어떠냐? 고 물어보는데, “맛있어요, 맛있어요. 작년 것보다 더 잘됐네요” 했습니다.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그 할머니가 기분이 좋아서 나도 한 잔 갖다 주고 저에게도 한잔 마셔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갖다가 마셔보니까 너무나 내가 긴장해 있었는데, 정말 맛있는 거예요. 물만 담았는데 색깔도 수정과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성경에는 거짓말이 하나도 없고 보탠 것도 없구나!’ 그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다음에 일을 해서 돈을 벌면, 내 돈으로 성경책과 찬송책을 사서 농촌의 중국 사람들한테 주며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너희도 믿어보고 체험해 보라며, 그렇게 전도하다가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날 중국 공안이 호구 조사를 왔습니다. 피할 새도 없이 경찰이 문을 열었습니다. 저의 아들은 한국 성경을 보고 있었고, 저는 중국에서 출판한 중국 성경, 조선말 성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한국 성경을 보면 뺏어간다고 했는데, 아들 것은 안 보고 내 것만 보자고 해서 뒤 표지도 보았는데 중국 글씨가 있으니 신분증과 호구 조사만 하고 그냥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위험한 일을 당하면 정말 피할 길 주신다는 것을 그때 또 알게 됐습니다.
정말 유혹도 많이 받았습니다. 동방 번개라는 것이 있었는데 자기네들에게 들어오면 ‘붙잡혀 가지도 않고 보호해주고, 매달 생활비도 주고 집도 해결해 주겠다. 오라!’고 했습니다.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붙잡히고 붙잡히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나는 그런 데는 안 간다!”고 말했습니다. 까딱하면 내가 잡혀가지 않고, 먹을 것 주고 집도 주고 돈도 준다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이 제게 뜻이 있어 그런 믿음을 주셨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날은 긴 다리를 지나가는데 차들이 다 서 있었습니다. 차들이 왜 섰냐? 고 물으니까, 목단강에서 살인사건이 났는데, 죄인을 잡는다고 신분증을 검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신분증 검사가 제일 무서우니 저는 기도했습니다. 바로 앞차가 조사받고 지나갔습니다. 우리 차가 검열관들 앞에 서야 하는 그 순간, 차가 움직였습니다. 눈을 딱 감고 있었는데, 우리 차 앞까지 검열하고 우리 차부터는 검열을 안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고 막아 주셨습니다.
한 번은 탈북자 30여 명이 성경공부를 하는데, 공안에서 잡으러 왔습니다. 아파트에 있으면 어떻게 알고 와서, 복도에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면 라디에이터에 밧줄을 매고 3층에서 밧줄을 타고 창문으로 한 사람씩 내려갔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라면 못하겠죠. 그때는 살아야겠다! 잡히면 안 된다! 는 생각에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핍박을 받다가 거기서 또 자리를 옮기고, 옮기고 했습니다.
제가 한 번 붙잡히게 되었고, 그때는 4개 감옥만 돌았습니다. 다시 중국에 들어갔다가 또 붙잡혀서 도문 변방대로 가게 됐을 때는 주일날이 가까워 오는데, 예배를 드릴 수 없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주일날이 가까워오는데 예배를 드릴 데가 없습니다. 혼자서라도 예배 드릴 때가 행복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혼자서 담요를 쓰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는데, 아침에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주일날 아침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내는데, 군인들이 복도에 서더니 조선말을 쓰는 자매가 나와서 이름 부르는 사람들은 다 나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내 이름을 안 부르고 문을 채웠습니다.
원래 주일은 북송을 안 합니다. 이상하다 했는데, 가만히 보니 저쪽에 자매 3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몰래 한 사람, 한 사람 전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 주님! 예배 드리라고 이 시간을 허락하셨군요!’ 했습니다. 감시하니까 제대로 예배할 수 없고, 시편 23편을 전한 후 ‘어디 가서 죽는다 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말자. 천국 가자!’고 서로 약속했습니다. 그 다음 날 북송되는데, 다른 데 갔었던 사람들도 같이 갔습니다. 어제 어디 갔냐? 고 물으니까 “다른 방에다 다 몇 명씩 넣었다”고 했습니다. 예배 드릴 수 있게 하신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북송 되어 보위부에 가면 여자들은, 세상에 인권 유린도 그런 인권 유린이 없어요. 여자는 따로, 남자는 따로 4~5명씩 작은 방에 가둬 넣고 단발머리 군인 처녀들이 와서 검사하는데 옷을 홀딱 벗기고, 머리, 입 벌리고, 귓구멍도 보고, 겨드랑이, 발바닥 다 보는 거예요. 돈을 붙였나 검사하고 마지막에 긴 의자가 있는데, 한 사람씩 눕히고 여자들이 고무장갑 끼고 다 자궁 속에 손으로 헤집어 봅니다. 돈을 감췄나 해서. 들어갈 때부터 계속 기도했는데 나와보니까 우리 조만 그것을 안 하고 다른 조는 다 뺏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하는 것 밖에 없구나! 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틀 동안 조사받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다른 사람을 예심 하던 보위부 요원이 절 나오라고 하더니 “니가 중국에서 뭐했냐?”고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했다. 돈벌이한 것 밖에 없다.” “니 젊은 사람에게 뭘 전해주었나, 예수인지 뭔지 니가 봤나?” 3일간 고문을 받으면서 내가 어떻게 하더라도 견뎌내리라, 정신을 잃고 혹시 주님을 부인할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웠습니다.
계속 악을 쓰는데 도저히 견딜 힘이 없고, 지쳐서 끌려 나가서 기도했죠. 주님 내가 힘이 없는데 나를 도와 달라고, 내가 정신을 잃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게 해달라고 이런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가 고난 주간 즈음이었는데 생각이 또 납니다. 그때야 내가 진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정말 필름처럼 주님이 이 땅에 와서 사역하고 십자가 달려 죽으시기까지 다 지나가면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난 그것만 계속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당한 고통은 주님이 당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생각하고 봤습니다.
내가 그 필름이 끝나는 순간, 보위부 요원이 내 무릎을 땅 차서 그때 정신을 차렸습니다. 니가 나가서 며칠 단련을 좀 받더니 정신이 돌았다고, 그렇게 때려도 아픈 것도 모르고 계속 앞에 벽만 보는 것 같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내 방에 끌어다가 처넣고, 제가 잠깐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우렁차고 쩌렁쩌렁 울리더니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한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오늘 물 위를 걸었느니라!’ 이런 음성이 들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 내가 고문당하는 것도 주님 다 보고 계셨구나. 나는 주님 손에 꼭 붙잡힌 몸이구나!’ 했습니다. 몇 십 명 같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못 보는 거예요. 저는 앞에 벽이 막 진동하는 걸 눈으로 봤는데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그 어떤 위험에 처해도 피할 길을 주고 위로를 주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홉 번째 감옥에 갇혔을 때는 영양실조가 심해 귀도 먹고 눈도 멀고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설 수도 없었습니다. 감옥에 차가 없으니까 감방에 같이 있는 사람들이 제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질 질 질 질 끌고 다녔습니다. 두 발짝까지는 내 발로 갈 수 있는데, 그 이상은 양쪽 엉덩이 아래서부터 유리관에 물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허리가 탁 꺾어져 내 몸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이런 증상이었습니다. 나는 물도 삼킬 수 없고 너무 아팠습니다. 내가 물도 침도 삼킬 수 없다고 간수가 이야기하자 의사가 펠라그라 (니코틴산 결핍증후군, 옥수수 주식 지방에 유행) 라고 영양 실조로 온 것이라고 했답니다. 의사가 이제 살아도 어려우니 한쪽 구석에 가만히 놔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감방에 있는 사람들이 제 손바닥에 글로 썼습니다. 의사도 나를 못 살린다고 했다고요.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주님 오늘 밤에라도 살아있을 때 오시라고 만날 기도를 속으로 부르짖었는데, 의사가 3일도 못산다고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갑자기 살아야겠다! 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내가 남편이 못다한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죽을 권리 없습니다. 나를 살려주십시오! 내가 꼭 주님 일 하겠습니다!’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또 엘리야에게 나타났던 기적을 나에게도 달라고, 저 간수들을 까마귀로 써 달라고 이런 기도를 속으로 하고 있었는데 한 이틀 지나니까 나는 담배 한 대도 간수들한테 사준 것도 없는데 나 한테 정말 잘하는 거예요. 날 정말 불쌍하게 생각해주고 다른 사람에게 면회 온 음식을 갈라서 나를 주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내 작은 신음도 다 들어 주시고 응답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내가 죽지 않겠구나, 주님께서 도와 주시는데 내가 죽지 않겠구나!’ 이런 신심이 생겼습니다. 그 밥을 갖다 주는 순간에 나는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목구멍이 아프지만 꾹 참고 억지로 삼켰습니다.
감옥에서 제가 3년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 죽게 되어서 감옥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꽃제비들 수용소에 가서 꽃 제비들 하고 같이 살았는데, 움직이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발목에 힘이 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에 벌벌 기어서 벽 쪽으로 가서 벽을 붙들고 서서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이며 ‘반드시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반드시 내가 너를 들어 쓰리라!’ 그 찬송을 부르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내가 이 고난을 주님의 힘으로 능력으로 이기고 나가면 주님께서 나에게 예비하신 큰 축복을 꼭 주시리라! 이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 고난을 이기고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걸을 수 있게 됐을 때 간수들에게 연락이 갔어요. 내가 조금씩 걸을 수 있다고, 간수들이 또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3년형을 받았기 때문에 마지막에 죽어도 감옥에서 죽어야 한다고요.
감옥 앞에 나를 갖다가 문건도 인계하고, 철문 앞에서 철 대문이 열리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커먼 철 대문 위에 “도주하지 말라. 도주는 자멸의 길이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내가 오늘 이 문턱을 살아서 넘어가지만, 3년 후에도 다시 살아서 넘어올 수 있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주님께선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하고 음성을 주시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돕겠다고, 나와 함께하시겠다! 고 하시는 데 정말 내가 꼭 살 것이다! 생각하고 담대하게 그 문턱을 넘어서 들어가니까 다 쓰러지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방에 이 쪽에서도 저쪽 구석에도 죽은 사람 있고 내내 그랬습니다. 감방에서도 많이 죽었습니다.
‘주님, 내가 하나님 말씀을 모르는 이 사람들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도와주세요. 내가 무엇을 해야됩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나누고 희생하라!’ 딱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희생은 하지만 나눌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면회 올 사람도 없고 뭘 나누라고 하실까? 나한테 나눌 것이 있으니까 나누라고 하셨겠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일회용 종이컵 만한 옥수수 덩어리를 주는데 새카맣게 썩었습니다. 그걸 보고 나한테 나눌 것이 그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3년 동안 매일 세끼 요만한 종이컵 밥 덩어리, 반찬도 하나도 없고 그것을 매일 3분의 1 정도 먹고 나누고, 많이 먹으면 절반 정도 먹고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 조그만 밥 덩이가 놓이면 그 순간에 1, 2초 동안 반짝 오늘은 더 먹을 수 있다는 안도감에 기쁨이 잠깐 보입니다. 그걸 보는 순간 내 마음에 나눌 것을 주시고 그 믿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30배, 60배, 100배 기쁨이 차고 감사가 찼습니다. 그 기쁨과 감사가 내 마음에 빈자리를 채우므로 3년간 배고픔을 느끼지 않고 감옥을 나왔습니다.
비 오고 눈보라가 치면 대문 지키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소나기 오는 날도 가릴 데 없고 비를 맞으며 서서 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가 그랬어요. ‘주님, 날아가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깃들 곳도 있고 개들도 비 오면 비를 맞고 있지 않은데 나만 혼자 벌판에서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하냐?’고, ‘나는 춥고 너무 힘들다!’고 하니까 주님이 ‘그럴 때는 찬송을 하여라!’고 했습니다. 감옥인데 찬송하라! 고 하셔서 깜짝 놀랐는데, 비가 치고 눈보라 치는 소리에는 누구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소리 내서 찬송할 수 있고, 찬송가 456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도 불렀습니다. 밤 10시까지 근무를 서는데, 그때는 큰 마당 가운데 가서 율동도 했습니다. 영하 30도 넘는 곳, 옷도 제대로 못 입었는데도 춥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복음성가를 부를 때 나도 모르게 소리가 커져서 매도 맞고 벌을 서고, 그런 과정이 많았습니다. 주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에, 나와 함께하시고 항상 위로하셨습니다.
어느 날은 전도하라고 해서 이 감옥에서 어떻게 전도하냐? 고 했습니다. 전도를 안 하자 불을 안은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서 막 땅에 뒹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순종하겠다고 했을 때 해지가 되었습니다. 누구한테 전도해야 할지 모를 때, 보다 보면 주님께서 저 사람한테 가서 전도하라고 사람을 딱 찍어주는 거예요.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죠. 사도행전 16장 31절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 얻으리라!’는 그 말씀을 전도했을 때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영접했습니다. 그 다음 성도가 생겼을 때, ‘주님 성도만 주고 예배 드릴 곳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나 혼자 있을 때는 혼자 예배 드리는데, 함께 예배 드릴 곳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저 변소가 있지 않으냐?’ 하는 거예요. 요새 화장실이 아니라, 옛날 시골 화장실인데 물이 차고 비 오는 곳이에요.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그 더러운 데서 해도 되냐? 고, 그런데 내가 생각하니까 그 감옥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 변소예요. 악취가 나니까 누구도 거기 신경 안 씁니다. 그래서 거기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 나갈 때는 서로 마주 지나가면서 눈을 보지도 않고, 조용히 ‘할렐루야!’ 하면 밑으로 손잡으며 ‘아멘!’ 하고, 그 모습도 들키면 죽어야 됩니다. 그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낼 수 있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제가 3년형을 다 마치고, 그 많은 시체더미가 나가는 곳에서 주님께서 저를 살리셨습니다. 언제는 강을 건너는데 홍해 바다의 기적을 달라고 기도하고, 고센 땅으로 인도해달라! 고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 한 열흘쯤 됐을 때 “그 집의 딸부터 전도하라!” 고 하셔서 그 딸이 예수님을 알게 됐습니다. 그 딸이 혼자 알 수가 없어 공산당인 아버지한테 전도했는데, 아버지가 제게 “아주머니가 중국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면서 “하나님을 봤소? 하나님이라는 게 있는 거요?”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소리 해서 우리 가족 다 몰살당하는 꼴 보겠느냐?”고 했습니다. 제가 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시내에 갔다 오더니 아버지에게 “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정말 메추리알 만한 것이 밑에 있었습니다. 그랬을 때 내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 이런 일 있다. 꼭 하나님이 고쳐주신다!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북한은 한집안 식구도 한꺼번에 전도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 씩 차츰차츰 전도하고 누가 지하 성도인지 생각도 못 합니다. 두 주일 조금 더 지났는데 그 딸이 밤에 자다 나를 깨우면서 만져보라고 없다고, 잘못 만졌지 반대쪽이 아니냐? 고 했는데 양쪽 다 보라고 흔적도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완전하게. 그것이 증거가 돼서 농촌에 친척 집을 돌아다니면서 누구네 집 딸 유방암, 이거 보라! 고 없어졌다! 고 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 고 물으면 “하나님 아버지가 다 고쳐주셨지! 아버지는 몰랐지?” 이 자매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나 보면 그렇게 미안해하고, 좋은 것은 먹을 것이라도 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3분 거리의 가까운 산에서 새벽마다 예배 드리고, 성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산속에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하나씩 흩어지는데, 거기 앞에 있는 할머니가 그 집에 온 손님 누구냐? 고, 왜 새벽마다 산으로 가냐? 고 조심하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께 기도했더니 염소 한 마리를 이 집에 예비해주셔서, 염소를 끌고 다니면서 마음대로 새벽 예배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10월 11일, 새벽에 예배를 끝마치고 일어서서 보니 큰 무지개가 색깔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흰 무지개가, 할머니도 모른다고 하고 저게 무슨 뜻일까? 했습니다. 내가 홍해 바다 기적을 달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주신다! 는 약속이고 하나님 능력이라고, 그렇게 말하니까 차츰차츰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으로 그 사선을 넘고, 브로커와 만나 60~70리 길을 걸어 네 번째 만에 브로커와 연결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아들을 찾아 주시고 아들이 돈을 보내줬을 때 제가 그 돈을 날 도와준 군인한테 주려고 안 쓰고 남겨뒀습니다. 마지막에 군인한테 도움을 받을 때, 북한 돈으로 바꿔 가지고 밤에 손에다 돈을 쥐여주면서 이것이 이 땅에서, 피 같은 돈을 누가 줄 수 있겠느냐고, 내가 예수 믿는데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서 이 돈을 주셨고,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너 한테 주는 것이니 꼭 이것으로 조금씩 사 먹고 예수님한테 기도하고 살라! 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강을 건너는데, 건널 수 없는 깊은 바다 같은 곳에서 홍해 바다의 기적을 저에게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중국 땅까지 오게 됐고, 하나님 은혜로 대한민국까지 오게 됐습니다. 정말 신앙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함으로 찬양하고, 예수님 한 분만으로 항상 감사함으로 기쁘게 살고 있습니다. 북한땅에도 자유의 날이, 신앙의 자유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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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의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정권과 평화 조약 운운하는 일은 북한 인민 '영구 노예화'에 도장 찍는 일이고, 문재인과 그 일당은 만고의 민족 반역자가 되고 반인륜 범죄자로 자신들을 역사 책에 등재하는 일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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