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김정은이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속죄할 수 있는 길이 과연 있을까? 만에 하나 김정은이 마음 속에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이 스며 든다면 (어떤 경로로건), 그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지옥에 던져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고, 다음에는 북한 인민들을 노예로 부리며 혼자 기쁨조까지 누리며 호사 호식하는 죄악, 무엇보다 북한에서 교회를 깡그리 멸한 자기 조부나 아버지, 자신의 무서운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를 깨달아, 아, 이제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속죄를 얻을 길을 찾아 보자! 라고 한다면. . . 그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1. 데오도시우스 1세처럼 북한에 김정은 권세로 기독교를 세계인을 살리는 유일한 참 진리라고 선포하고 전 인민을 기독교화 시킨다
2. 1을 선포하고 시행한 후 몇 년 후에 자신은 3대 김씨 정권의 죄악을 다 짊어지고 대한민국에 통째로 나라를 넘기고 물러난다
3. 어떤 처분도 달게 받겠다
이런 결단을 보인다면, 김정은이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까?
[위키 백과]
테오도시우스 1세 또는 테오도시우스 대제(라틴어: Flavius Theodosius, (347년 1월 11일~395년 1월 17일)은 379년부터 395년 죽을 때까지 로마 황제였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동로마 제국을 다스릴 것을 임명받은 이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죽은 후, 동로마와 서로마 모두를 통치한 마지막 황제였다. 그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완전히 분리되어 다시는 통일되지 않았다. 그는 또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만들었다. 그의 강력한 기독교 부흥 정책 때문에 그는 기독교계 역사가들로부터 ‘대제(大帝)’의 칭호를 받았다.
378년 8월 9일, 동로마 제국의 발렌스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대참패를 당하고 전사한 직후 당시 서로마 황제이던 그라티아누스가 히스파니아에서 칩거하던 테오도시우스를 불러들여 발칸반도를 맡겼다. 테오도시우스가 야만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군사적 성공을 거두자, 그라티아누스는 379년 1월 19일 그를 공동황제로 선포하고 다키아, 마케도니아 등의 속주를 포함한 제국의 동부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이후 그라티아누스가 제위 찬탈자인 마그누스 막시무스에게 패하여 죽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밀라노의 궁정에서 쫓겨오자 테오도시우스는 마지 못해 막시무스를 서방의 황제로 인정했으나 388년 발렌티니아누스와 함께 막시무스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392년 발렌티니아누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갈리아의 섭정이던 아르보가스트가 유게니우스를 새로운 서방 황제로 추대하자 테오도시우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란의 진압
유게니우스는 비록 기독교인이었지만 로마와 이탈리아에서의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전통적인 로마 종교에 대한 관용을 보여 지지를 끌어냈다. 테오도시우스는 유게니우스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면서 황제 권력 쟁취 뿐 아니라 종교적 신앙의 문제라고 하였다. 그는 394년 당시 이미 로마화되어있던 2만 명의 고트족 병사들을 이끌고 유게니우스와 맞서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출발했다. 당시 테오도시우스의 토벌군에는 서고트족 지도자 알라리크가 있었고 반달족 출신의 로마 군단장 스틸리코도 있었다.
양측은 9월 5일 프리기두스강에서 처음 맞붙었다. 첫날 전투에는 테오도시우스의 군대가 패했으나 다음날 전세가 호전되어 테오도시우스는 승리할 수 있었다. 유게니우스는 처형당했고 아르보가스트는 도망다니다가 자살했다. 이로써 테오도시우스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제국의 동방과 서방 모두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 승리는 또한 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이후 로마 제국에는 비기독교적인 진흥 정책이 사라졌다.
니케아 공회가 결정한 신앙고백에 근거한 기독교의 국교화
379년경 테오도시우스가 통치하던 동방 제국내에서 니케아 신경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아리우스주의자를 비롯한 다른 이단 종파 사이에 적대 관계가 고조되면서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자신은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380년 세례를 받고 니케아 신경을 신봉했다. 그는 제국 내에서 신앙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했는데 380년 2월 28일 테오도시우스는 병에서 회복되자마자 교회 당국자들에게 아무런 자문도 구하지 않고 모든 시민들이 니케아 신경을 신봉해야 한다고 규정한 칙령을 발표했다 (기독교의 로마제국 국교화). 이 때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설을 믿는 사람들만 보편적 기독교인(가톨릭)으로 인정되었다. 가톨릭이라는 호칭이 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듬해 열린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주교 150명이 모여 아리우스파와 그 종파를 이단으로 확고히 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는 향후 로마 교구와 버금가는 명예와 위신을 가진다고 발표하였다. 이 무렵 아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은 모든 도시에서 집회를 금지당했고 정통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385년부터 테오도시우스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더욱 엄격히 금지하였고, 391년 로마와 이집트에서 일체의 비기독교 의식을 금지하고 이듬해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제국의 전역에서 불법으로 규정했다. (기독교의 로마제국 국교화)
암브로시우스와의 대립
390년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로마군 수비대장 한 명이 주민들과의 사소한 다툼 끝에 집단 폭행을 당하여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밀라노에 있던 테오도시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철저히 보복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당시 밀라노의 주교이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기독교 지도자인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의 명령에 반대하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테오도시우스는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명령을 밀어붙임으로써 약 7,000명의 테살로니카 주민들이 대량 학살 당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이러한 보복 행위를 비난하며 황제에 대한 성체 배령 집전을 거부하였으며, 황제는 결국 자신의 명령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맨머리에 베옷을 입고 밀라노 대성당으로 가서 용서를 구했다. 부활절에서부터 성탄절까지 황제는 성당으로의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고 성탄절이 되어서야 겨우 암브로시우스의 용서를 받고 성체 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현실의 최고권력자인 황제가 일개 교회의 성직자에게 굴복한 사건으로, 기독교 내에서 교권과 속권과의 첫 대립으로서, 이후 종교와 권력의 관계를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이후 이러한 추세는 강화되어 1077년에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합법화시켰다면 (기독교 공인),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격상시켰다. 기독교의 국교화로 인하여, 로마 제국 치하의 유럽 전체가 기독교권이 되었던 것이고, 그런 전통이 지금까지 유럽의 기독교권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서로마 제국이 395년에 허울 허수아비화되고, 476년에 망했다면, 동로마 제국도 1453년에 몰락함으로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는 중단되었다.
샤를마뉴 대제
카롤루스 마그누스(라틴어: Carolus Magnus, 독일어: Karl der Große 카를 데어 그로세[*], 프랑스어: Charlemagne 샤를마뉴[*], 영어: Charlemagne 샬러메인[*], , 스페인어: Carlomagno 카를로마뇨[*], 740년 혹은 742년 4월 2일 또는 747년 ~ 814년 1월 28일)는 카롤루스 왕조 제2대 프랑크 국왕이자 초대 로마인의 황제이다. "마그누스"는 "위대하다"는 뜻이다. 그 생전 이름은 카롤루스이고, 칭호는 카롤루스 마그누스이다. 프랑스어 표기인 샤를마뉴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카롤루스는 서부, 중부유럽 대부분을 차지해 프랑크 왕국을 크게 확장했다. 재임하는 동안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800년 12월 교황 레오 3세에게 동로마 황제와 대비되는 서로마 황제직을 수여 받았으며, 황제가 되고서 교회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국내외적인 카롤루스의 업적은 서유럽과 중세시대를 정의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신성 로마 제국 등 재임연표에서 샤를 1세 또는 카를 1세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피핀의 뒤를 이어 동생인 카를로만과 함께 왕국을 통치하였고 후에 사이가 나빠지자 전쟁의 위기가 닥쳤으나 카를로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비를 넘겼다. 프랑크 왕국을 위협하던 사라센과 전쟁을 일으키던 중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 언급되었던 론세스바예스 전투(779년)에서 끔찍한 패배를 겪기도 하였으나 교황의 보호자가 된다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 시행해 나아갔다. 778년부터 802년까지는 이베리아 반도의 사라센인들을 격퇴하였다. 또한 롬바르드 왕국, 사라센과의 장기전쟁을 끝낸 후 유럽 동쪽에 사는 민족 중 특히 작센족을 778년부터 800년대까지 수시로 원정, 굴복시켜 가톨릭교로 개종시킨 후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켜 훗날 오토 왕조 출현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카롤루스는 프랑스, 독일에서 카롤링거 왕조를 창업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한 최초의 인물이자 로마 제국 이후 처음으로 대부분의 서유럽을 정복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시킨 왕으로 유명하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현재 유럽의 정체성에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사후 그는 '대제'로 번역되는 마그누스(라틴어) 또는 마뉴(프랑스어)의 칭호를 얻었다.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카롤루스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요청했다. 카롤루스는 교황 레오 3세에게 지원을 약속하고 호위 병력을 붙여서 이탈리아로 되돌려보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로마 제국의 종주권은 동로마 제국에게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동로마 황제의 간섭을 받고 있었고 로마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는데, 그 적임자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를 선택했다.
교황의 제의를 받아들인 카롤루스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반대파를 제거하고 교황에게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카롤루스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서로마의 황제로 임명하였다. 그는 짐짓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제관을 수여받았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의 부활이 선언되었으나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를 황제로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나중에 812년 동로마 제국 황제인 미카엘 1세 랑가베는 카롤루스를 황제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프랑크인의 황제라 칭하여 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프랑크 왕국은 형식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는 처지였다. 그러나 800년경 카롤루스 자신이 옛날 로마 제국의 서부지역을 거의 다 차지했다는 것과 동로마 제국은 황태후인 이레네가 다스리고 있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자신도 황제가 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카롤루스는 로마를 통치했던 동로마 제국 황제로 사실상의 최후의 로마 황제로 인식되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자신이 적법한 로마 황제라고 선언하였다. 황제 즉위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는 대내외적으로 프랑크 왕국의 통치권을 분명히 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며 동시에 이후 유럽의 국가들의 이상적인 통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로마제국의 데오도시우스 1세나, 샤를마뉴 대제 등은 자신의 왕권으로 기독교를 자기 영토 내에서 국교로 선포하였다. 그 부작용도 많았지만, 이교 종교를 힘으로 억누르고 참 진리를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오늘날에는 과거 절대 왕권을 가진 자가 많지 않다. 오늘날 지상에서 절대권을 휘두르는 자는 아마도 김정은 정도가 아닐까? 한다. 그가 자기 집안의 3대 통치 때 행한 악행들 (살인과 기만, 음행 간음 성범죄, 기독교 박해, 역사 왜곡) 속죄하는 길은 절대권을 행사하여 당신들 이제부터 역사가 진리라고 증거하는 기독교 복음을 믿으라! 고 공포하고 회개하는 길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나라를 통합시키라. 물론 하나님의 생각은 어떠하실지 모르나, 그것만이 김정은이 3대에 걸쳐 지은 만가지 악을 회개하고 속죄받는 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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