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 작가엔 등 돌리고 反기업 세력 지원하는 한국 기업·부자들 [송의달 LIVE]
1970년생 이응준 작가가 보는 대한민국 문화계·정치경제·남북한 통일 [송의달이 만난 사람]
입력 2023.07.30. 09:43업데이트 2023.07.3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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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자유주의 우파(右派)의 실력자와 자산가들은 사람을 키우지 않는다. 오히려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방해까지 한다. 그러면서 나라 걱정, 세상 한탄은 혼자서 다 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自由主義) 작가들은 신념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욱 더 소외되고 괴로워진다. 이들은 그런 걸 잘 알면서도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다.”
1970년생인 이응준(李應準·53) 작가의 말이다. 한양대 독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86′ 세대의 막내 격이다. 그것도 시·소설 등 순수 문학활동 외에 각종 일간지 칼럼 등을 통해 분명한 관점을 설파(說破)하는, 보기드문 ‘사회파(社會派) 작가’이다.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에 10편의 시(詩)로 등단(登壇)한 그는 4년 후엔 소설가로도 입문했다.
◇20세에 등단...창작 저서 20여권
지금까지 20여권의 창작 저서를 냈고 영화 감독·드라마 작가·대중 가요 작사가로도 활동했다. 그가 직접 감독한 단편영화 ‘Lemon Tree’는 뉴욕과 파리 국제단편영화제에 각각 초청받았다. 2009년에 낸 장편 소설 <국가의 사생활(私生活)>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이 두 차례 집중 조명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남한이 북한을 흡수통일한 대한민국에서 탈주한 북한 군인들이 조직 폭력배로 변신해 활개치는 가상(假想)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 기자는 2023년 7월 28일 낮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사에서 이응준 작가를 만났다.
이응준 작가의 장편소설 <국가의 사생활(Private Life of a Nation)>을 조명한 영국 일간신문 '가디언(Guardian)'의 2015년 10월 9일자 기사. 소설 내 200자 원고지 32매에 해당하는 2개 장(章)을 발췌번역해 실었다./인터넷 캡처
- 우리나라 문화예술계는 진짜 좌파(左派) 일색인가?
“부정(否定)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문화예술계에서 우파가 버티고 있거나 선전(善戰)하는 분야가 있는가? 있다면 어디인가?
“없다.”
- 왜 이렇게 됐나?
“원래 한 청년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 순수한 눈에 비춰진 세상이란 모순과 불의로 가득 차 있다. 또 예술가(藝術家)는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 희망을 찾아 해매는 행위로부터 자신의 예술을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청년과 예술가는 좌파적 견해와 감상에 매혹되기 쉽다. 또한 현대 한국인들의 내면에는 ‘불안’과 ‘분노’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득 차 있다. 한국인 자체가 좌파적 감성에 휩쓸리기 쉬운 심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문화예술인들은 큰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자유로운 예술은 ‘당(黨)을 위한 예술’이 아니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오직 나만 정의(正義)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좌파 일색’ 기울어진 한국 문화예술계
- 문화예술 분야가 이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원인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우파 정치인, 권력자와 자산가(資産家)들에게는 ‘문화적 진지(陣地)’에 대한 개념과 비전 자체가 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세계관을 대변(代辯)하는 글과 책, 공연과 영화 등의 콘텐츠들을 생산하는 작가들에게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심한 것은, 한국 기업들이 반(反)기업적인 인사들과 단체·세력에게는 열심히 지원을 한다는 점이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있는 알들 사이에 자신의 알을 낳는다. 한국 기업들은 자기 둥지에서 뻐꾸기를 정성껏 키운다. 나무 밑에는 뻐꾸기가 밀어내 떨어뜨려 깨진 알들의 잔해(殘骸)가 수북하다. 다 자란 그 뻐꾸기들이 기업인들을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고 감옥에 집어넣는다.”
- 이념의 균형이 잡힌 사회를 흔히 “새는 좌와 우 양쪽 날개로 난다”고 하지 않나?
“나는 다르게 본다. 무조건 좌우 양쪽 날개로 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새의 몸통이 자유민주주의여야 하고, (동일한 몸통을 가진) 그 새가 진보와 보수라는 양(兩) 날개로 날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는 좌파와 우파의 동의어(同義語)가 아니다. 수구(守舊) 좌파도 있고 진보(進步) 보수도 있다. 진보와 보수라는 태도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거다.”
- 일각에선 “한국의 우파는 우파(愚派·공부하지 않는 무리)다”라는 지적이 나온다.
“책 팔리는 걸 봐라. 한국인들은 우파건 좌파건 다 공부 안 한다. 이미지가 그렇게 설정된 거지 무슨 우파만 어리석겠나. 분명한 것은 ‘386′보다 무지(無知)한 세대는 없다는 점이다. 주사파(主思派·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들도 없다. 사회 전체가 공부해서 계몽(啓蒙)돼야 한다.”
- 한국 사회에 극우(極右) 또는 극좌(極左)라는 호칭이 가능한가? 흔히들 ‘태극기 부대’를 극우로, ‘민노총을 좌파로 부르지 않나?
“용어(用語)부터 정리하고 싶다. 태극기 ‘부대’, ‘아스팔트’ 우파 같은 용어들은 거칠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내포한다. 그들을 싫어하는 쪽에서 지은 영리한 언어전략이다. 언어가 존재를 규정한다. 따라서 우파는 ‘보수 우파’ 대신 ‘자유(自由)우파’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게 정치적으로 이득일 것이다.”
그는 이어 말했다.
“질문으로 돌아가서 ‘광장(廣場) 우파’가 나타난 것은 ‘광장 좌파’가 대통령을 탄핵으로 끌어내리고 감옥에 집어넣는 것에 충격을 먹은 게 중요 분기점이라고 본다. 게다가 지난 문재인 정권은 대의(代議)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 민주주의, 광장민주주의 같은 인민(人民)민주주의의 수법들을 구사했다. 앞으로도 어느 한쪽만 광장을 포기하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좌파와 우파에 ‘극(極)’자를 붙이는 기준은 정치세력이 ‘폭력’을 사용할 때이다. 그런데 ‘광장 자유우파’가 폭력을 사용하거나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고 있나? 인종주의적으로 외국인들을 공격하거나 나치 깃발을 흔들고 있나? 이들은 오히려 북한 인권(人權)을 얘기하고 있다. 작은 태극기 하나씩 손에 들고 나와서 팔랑팔랑 흔들어대는 걸 두고 극우라고 하는 것은 너무 나쁜 쪽으로 과대평가하는 짓이다.”
◇“한국에 극우는 없다...폭력 쓰는 민노총은 극좌”
- 우리나라에 극우 세력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대한민국 장성(將星)이 청와대 행정관 앞에 벌벌 기고, 공무원보다 더 눈치를 보는 마당에 무슨 얼어 죽을 극우가 있나? 태극기 시위대는 경찰이 쳐놓은 폴리스 라인(police line)을 얌전하게 잘 지키고, 술판을 벌이거나 노상 방뇨도 않고, 주변 상인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는다.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극우인가? 반대로 극좌(極左)세력은 남한에 분명히 있다. 폭력을 사용하고 거기 간부가 간첩으로 체포되고 있는 민노총이 그렇다. 북한은 인류 역사상 최악(最惡)의 극좌 파시즘 집단이다. 그걸 따르거나 용인하면 극좌가 맞다. 이것은 팩트(fact)이다.”
- 2019년에 낸 산문집 <작가는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에서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이 제각기 불구덩이어서다”라고 썼는데.
“한국 사회는 자신에 대한 불안(不安)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타인(他人)에 대한 적개심에 몰두하는 사회다. 유럽의 르네상스 이후 탄생한 ‘근대인(近代人)’은 자신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타인에 대한 증오가 필요없는 홀가분한 ‘개인(個人)’을 의미한다. 근대인은 그 공허(空虛)함을 자신의 직업노동과 직업정신에서 해소하고 승화(昇華)시킨다. 도덕은 공자·맹자가 아니라 직업도덕이다. 한국사회는 타인에 대한 증오(憎惡)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 곳에 사는 한국인들은 직업정신(職業精神)이 부족하다.”
- 한국인들은 왜 사실(事實) 보다 괴담(怪談)·조작에 쉽게 속을까? 한국 사회에 샤머니즘(shamanism·무속신앙)과 파시즘적 성향이 동거(同居)하고 있다고 칼럼에서 주장했는데.
“파시즘은 이념이 아니라 질병이다. 그래서 좌·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부주의한 민주주의는 삽시간에 전체주의(全體主義)로 변질된다. 그리고 유교, 불교, 기독교 등 어떤 종교든 한반도 안으로 들어오면 무속(巫俗·샤마니즘)적 경향을 띤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는 원래 기독교적 세계관의 이단(異端) 버전으로 신학이론이자 종교논리이다. 이게 북한에서는 민족공산당과 결합해 김일성교(주체사상)가 되었다. 한국인의 무속성(巫俗性)은 21세기에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이건 굿판 아닌가, 누군가 나타나면 ‘저 자는 무당이 아닌가’하고 본색을 의심해봐야 한다.”
◇職業精神 약하고 무속신앙 득세하는 한국
- 이런 모습은 한국과 북한에 모두 벌어지는가?
“현상만 다르게 나타날 뿐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김정은의 핵 포기를 나는 평화쇼가 진짜처럼 난무할 적에도 믿지 않았다. ‘김일성교’는 정식으로 백과사전에 등록된 종교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김일성의 어머니는 강반석이고, ‘반석’은 ‘베드로’를 뜻한다. 김일성은 스스로 성부, 김정일은 성자, 주체사상은 성령(聖靈)으로서 성삼위일체를 구성한다. 문학이론으로 분석하자면, ‘북핵’은 ‘김일성’을 상징한다. 북핵을 포기하는 순간, 야훼(북핵)의 모조품인 김정은은 파괴된다. 따라서 그 어떤 좋은 여건을 제공해준들, 북핵이 사라지는 경우는 오직 ‘북한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교체)’뿐이다. 한반도와 한국인을 조종하는 건 정치가 아니라 종교적 상징과 에너지, ‘샤머니즘’이다.”
이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남북한 모두 피(被)지배자가 지배자에게 자발적으로 협력하거나 쏠려가는 대중적 파시즘 성향이 짙다. ‘개딸’을 비롯한 정치인 팬카페처럼 논쟁적인 이슈를 놓고 급격하게 무조건 쏠리는 모습이 그러하다. 이런 파시즘에 샤머니즘이 끼어 있으면서 광기(狂氣) 비슷한 열정들이 분출해 이성(理性)적인 사회 작동을 가로막을 뿐 더러 찬찬하고 냉정하게 분석하는 능력까지 무너뜨리고 있다. 굉장히 위험한 사회이다.”
◇지배자에게 쉽게 쏠리는 ‘파시즘 성향’도
- 한국인들은 왜 이런 특성을 갖게 됐나?
“기마민족(騎馬民族)인들이 좁은 한반도에 갇혀 있어서 생기는 모순일 수 있고, 발칸반도처럼 반도인(半島人)적인 성향 탓일 수도 있다. 한국인들이 근대인으로서의 체계적 경험치와 능력을 함양(涵養)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 한국의 근대화는 건국과 6.25 전쟁으로 리셋(reset)을 거친 뒤 1960년대 초에야 제대로 출발했다. 남한 언론이 ‘한국인(韓國人)’이라는 단어(單語)를 처음 사용한 것도 1961년 들어서다.”
- 어느 기고문에서 “한국의 지식인이 바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날 좀 알아 달라’는 것이고, 대중이 바라는 것은 그 시대의 ‘자극제(stimulant)’다”라고 썼다.
“관념을 다루는 지식인의 맹점이기도 하고,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북한의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추켜세우는 ‘소위’ 이 시대의 대표지식인을 미친 사람이 아니라고 변호하려면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 밖에 없다. 한국의 대중은 ‘심심한 진실’을 좋아하지 않고 ‘극적인 거짓’을 따라간다. 과학의 힘이 워낙 강력해 그런 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사람에게는 지동설(地動說)이 아니라 천동설(天動說)이 편안하게 감각된다. 대중은 ‘천동설적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문재인 정부때 나온 소득주도성장, 국방을 배제한 무조건적인 평화론, 사회주의적 경제정책들이 다 일종의 천동설들이다.”
◇後조선인들에게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 한국 일부 지식인들, 좌파 정치인, 운동권들은 여전히 ‘친중·종북(親中·從北) 세계관’에 갇혀 있다.
“386주사파 운동권들의 세계관을 ‘조선 양반 탈레반’과 ‘위정척사파’로 분석하고 규정한 책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다. 그들은 후기 조선(後期 朝鮮)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조선사람들이니까 중국이 종주국이고, 북’조선’이 좋은 것이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고. 그런데 이들은 북한에서 살라고 하면 안 산다. 자기 자식들을 그 사회로 보낸다면 진정성을 믿어주겠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동시대인(同時代人)이라고 착각하기에 우리의 분란(紛亂)을 이해 못하고 있다.”
- 이런 후진적인 모습은 언제,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정확(正確)한 학문(學問)’이 대중화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요컨대, 1980년대를 지배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리영희의 책들 대신에 정치학자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와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학 교수의 <슬픈 중국>이 널리 읽힌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독서(讀書)를 너무 안 한다. 한국사회의 ‘실질적 문맹률(文盲率)’이 너무 높다.”
- ‘386 세대’의 막내 격으로서 386세대의 공과(功過)와 사명(使命)은 어떻게 생각하나?
“공이 있다면 각자 조용히 간직하면 될 일이다. 60~70대나 30~40대라도 ‘386′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들도 ‘386적 인간’들이다. 386의 대부분은 자신이 주사파 386 운동권과는 다르다고 착각하고 있다. 시대가 세대를 가스라이팅한다. 불온한 매력이 ‘문화’가 되어 ‘스미고’ 추억으로 변환, 유전자화된 것이다. 갱신(更新)하지 않는 인간은 타인의 노예가 되고, 자신의 과거의 노예가 된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변절이 아니라 ‘공부’이다. 정직과 용기이며 ‘치유’다. 나를 포함한 386들이 정확한 지식을 통해 리뉴얼 되어 새로운 시대에 장애가 되거나 악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란다.”
◇“과학적 지식과 인류 보편 人權 의식으로 연대해야”
- 386 세대와 지금의 2030세대와의 연결 가능성은?
“과학적 지식과 인류 보편의 인권(人權)의식으로 연대(連帶)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올바른 사회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386들은 반성하고 사회적 혼란과 퇴보에 책임(責任)을 느껴야 한다. 아버지는 내게 산업을 물려줬는데, 우리는 후배들에게 거짓말만 물려주고 있다. 이대로라면 386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무지(無知)하고, 이기적(利己的)이고, 위선적(僞善的)이고, 허황(虛荒)된 세대로 남을 것이다.”
이응준 작가의 외할아버지인 고(故) 이찬우(李燦雨·1918~1983년) 선생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돼 2년 6개월 수감생활을 했고 해방후 제5대 국회의원과 제2대 노동청장을 지냈다.
- 독립운동을 한 외할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나?
“나는 그 분의 장손자(長孫子)로서 그분께 누(累)가 될까 걱정했을 뿐 그 사실을 자랑하거나 팔아먹은 적은 없다. 내가 독립운동을 한 건 아니잖은가? 마음속의 자랑으로 조용히 간직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내 30년 넘은 친구들도 내가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는 걸 지난 정권 시절에야 알게 됐다. ‘토착왜구’라는 나치용어로 하도 국민들을 갈라치기 하기에 내가 스스로 밝힌 것이다. 어느날 정신을 차려보니, 일제의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를 지낸 최고위직 친일파의 손자가 국회의원인 정당에서 독립투사의 장손자인 내게 일본제 와이셔츠 한 장을 산 것 같은 일을 죄목(罪目)으로 들어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나라에 살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지금 민주당 친일파 후손 국회의원들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한 자유인으로서 그 어떤 연좌제(緣坐制)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1917~2012년)의 지적대로 ‘역사를 정치화(政治化)하는 행태’를 경계해야 한다.”
- 한국은 지금이 정점(頂點·peak)이며 앞으로 추락할 일만 남았다는 ‘코리아 피크론(論)’이 나온다.
“남유럽의 그리스는 1950~60년대에 세계 최상위의 제조업(자동차 등)을 갖고 있던 선진국이었다. 그리스의 처참하고 되돌이킬 수 없는 몰락은 1980년대 파판드레우 정권부터이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Andreas Papandreou·1919~1996년)는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대학교수 출신의 경제학자였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파판드레우가 너무 많다. 아까 얘기한 천동설(天動說)은 ‘편안하게 감각되는 거짓’을 말한다. 그걸 따르면 우리는 중세 속으로 떨어진다.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은 그 순도(純度)가 높아질수록 더 강력한 마약 같은 천동설이 된다.”
이 작가의 이어지는 말이다.
“대중들의 귀에 달콤하게 들리는 악법안(惡法案)들이 바로 천동설의 유충(幼蟲·애벌레)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좌우를 떠나 한국 정치인들은 경제, 외교, 국방, 교육, 연금, 의료, 복지, 부동산 등에서 천동설로 대중을 유혹해 지옥으로 끌고 가 팔아먹은 다음 제 이득을 챙긴다. 불편한 지동설(地動說)을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확실한 결과가 그리스, 베네수엘라처럼 눈앞에 있는데도, 대중은 당장의 촉감(觸感)만으로 미래를 선택한다. 이걸 고쳐야 한다.”
◇“북한 강제수용소가 북한 인권 문제의 핵심”
- 남북한 통일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낮아지고 있다. 통일은 꼭 필요한가?
“하나만 말하겠다. 2차 세계대전 끝 무렵 독일 부헨발트(Buchenwald) 유대인수용소를 연합군이 해방했을 때, 현장을 지휘하던 중 패튼 장군은 구토(嘔吐)를 했고 아이젠하워 장군은 기자들을 불러 그곳의 모든 것들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게 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부인하거나 의심할 수밖에는 없는 생지옥이 펼쳐져 있어서다. 나치는 이런 유대 종족 전체의 몰살을 ‘최종적 해결’이라는 학술적 용어로 대체했는데, 나는 ‘북한 인권문제’라는 용어가 ‘최종적 해결’이라는 말처럼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 무슨 말인가?
“북한 인권(人權)문제라는 두루뭉술해져버린 말과 표현으로 북한 강제수용소 문제를 담요로 덮어버리고 있는 꼴이다. 북한 인권문제의 핵심은 북한 강제수용소이다. 북한 인권문제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북한 강제수용소를 ‘정확하게’ 문제 삼지 않을 때, 북한 인권문제라는 용어는 어이가 없게도 남한 사람들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킨다. 나는 궁금하다. 5.18 광주학살과 남영동 고문실에 분노하던 그 사람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갔는가? ‘북한 인권문제’를 ‘북한 강제수용소문제’로 바꿔 부르기를 제안한다. 지금 내가 만약 북한 강제수용소에 대해 발언하지 않는다면, 훗날 북한이 해방 돼 통일이 되고 북한의 강제수용소가 바로 우리 눈과 코 앞에서 전모(全貌)를 드러냈을 때 한 북한 청년은 이렇게 따질 것이다. ‘나만 살아남고, 내 가족들은 강제수용소에서 다 죽었습니다. 모르지 않았잖아요. 당신은 작가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때 우리들을 위해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던 겁니까?’”
이 작가는 ‘통일 이후 사회 전문가’로 꼽힌다. 2009년에 낸 장편소설 <국가의 사생활>을 쓰기 위해 3년에 걸쳐 단행본 300여권 분량의 북한 관련 자료를 읽고 탈북자들을 만났다. 그는 “집필은 부산의 한 숙박업소에서 6개월 만에 마쳤으나 정말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고 회상했다.
◇“통일 ‘예상 분석팀’ 필요...군사적 위기 동반할 한반도 통일”
- 북한과의 통일 이후에 관심을 쏟는 이유라면?
“통일에 대한 희망 만큼이나 통일에 대한 ‘비극적 상상력(想像力)’이 긴요해서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통일 이후에 벌어질 끔찍한 사태들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없다. 통일 이후에 대한 면역력(免疫力)을 키우는 ‘과학적 비관의 실용’을 정부가 전혀 제공하고 있지 않다. 과거 정부들도 ‘통일 한반도’를 두고서 ‘판타지 월드(fantasy world) 도면 그리기 놀이’ 같은 ‘헛된 사업들’만 공상했다. 독일의 인구에, 프랑스의 군사력에, 영국만큼의 영토와 경제력을 가진 통일 대한민국이 공짜로 얻어질 리 만무(萬無)하다.”
그는 “정부의 통일부나 국가정보원 안에 팀(team)을 만들어 통일 이후의 사회에 대한 예상과 분석을 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들이 이런 팀을 운영하다면 통일 후에 엄청난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협상력을 갖게 될 것이다. 미국 CIA나 FBI라면 이런 분석·전략팀을 가동할 것이다. 다만, 평범한 사회과학자들로선 안 된다. 상상력(想像力)을 가진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 통일이 된다면 어떤 혼란이 예상되나?
“한 예로 북한의 2500만 인민들이 갑자기 대한민국 투표권을 가지게 된다면, 엄청난 ‘민주적 대환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1948년 이후 남한 사람들이 이렇게 부단히 노력했건만 아직도 남한 사회와 남한 사람들은 근대적 개인이라든가 자유민주주의자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이 미진하다. 북한 인민들은 근대인은커녕 김씨 사교왕조(邪敎王朝)의 노예적 백성들이다. 이들과 공멸없이 통합되는 과정에는 상당한 고통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작가는 이어 말했다.
“2014년에 논픽션 <미리 쓰는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어두운 회고>를 낸 이후로 나는 매년 1월 1일 아침 마다 새로 모인 자료와 변화를 반영해 한반도 통일을 다시 전망하는 일을 한다. 한 번은 소설가로서, 한 번은 비평가로서, 한 번은 한 인간으로서 한다. 세 가지 정체성은 각각 꼭지점이 되고 그 분석들을 이 이어 삼각형을 만든다. ‘넓은 의미의’ 주사파(主思派) 국회의원들조차 요즘은 통일하자는 얘길 안 한다. 대신 그들은 북한의 보전과 ‘남한의 중국화(中國化)’를 원한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은 분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올 공산이 크다. 모르긴 해도 한반도 통일은 굉장한 군사적(軍事的) 위기(危機)를 동반할 것이다. 그 하중(荷重)을 이겨내는 실력과 배짱이 대한민국에게 없다면, 북한 지역을 중국에게 뺏길 것이다.”
- 남북한 통일이 되면 통일 한국은 ‘세계 일류 국가’가 될 수 있을까?
“통일 앞에서 우리 각자가 ‘실증적인’ 용기(勇氣)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세계 일류 국가’는커녕 망해갈 것이다. 한반도 통일은 독일통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서구 자유진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서독이었고, 사회주의 진영에서 가장 괜찮다는 나라가 동독이었다. 그 둘이 결합했는데도 통일 뒤 20년 가까이 이러다 망한다는 소리가 나왔고 아직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견해가 심심찮다. 한반도 통일 후 큰 난관은 남과 북 출신 간의 ‘증오(憎惡·hatred)’인데, 진정한 통합은 북한을 기억 못하는 세대끼리에나 가능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개혁들은 통일준비의 부분집합이 되어야 한다. 번영보다는 공존(共存)을, 공존보다는 공멸(共滅)을 걱정하는 문제의식 위에서 번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희망의 영역이 넓어질 것이다.”
◇“단 한 명의 읽어줄 사람 위해 글을 쓴다”
- 20세에 등단한 뒤 시인·소설가·영화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글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에서 일하고 있다. 순수문학과 대중예술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 작업은 성공한 경우도 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단된 경우도 있다. 이전 계획들을 보완해 다시 추진 중이다. 장르와 분야를 가리지 않을 뿐더러 그럴 수 있다는 게 작가로서의 나의 강점이다. 특히 정치, 사회 비평가로서는 이런 스타일이 내용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 이론에 대해 무지한 채 문학에만 갇혀 있지 않아서다. 나 같은 칼럼리스트가 몇 명쯤은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 본인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나의 본질(本質)은 문학, 정확히 말해서 ‘20세기 작가’이다. <광장>을 쓴 소설가 최인훈(崔仁勳·1936~2018년) 선생처럼 사회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 지식인이기도 한 그런 작가 말이다. 이 본질을 포기하지 않고 하이브리드화해서 여러 방향으로 멀티유스(multi-use)하고 싶다. 영화, 드라마도 하고 통일 대한민국 사회를 예상하는 분석팀을 꾸려 팀장도 해보고 싶다.”
- 조선일보 등에 쓰는 칼럼의 글쓰기가 독창적(獨創的·unique)이다. 본인 만의 기준(基準)이나 루틴이 있나?
“여러 명이 읽어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 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위해서 쓰고 있다는 상상을 하며 쓴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1903~1950년)은 정말 많은 칼럼들을 쓰기도 했는데, ‘정치에 대한 글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오웰처럼 그런 글을 쓰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게 나 자신을 확장(擴張)시키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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