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시사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

중일사랑 2024. 5. 10. 10:49

Thomas Wright, "Romans," in The New Interpreter's Bible, X.425.

하박국 2:4하반절은 비애와 당혹감으로 가득 찬 책에 속한다. 갈대아 군병들이 (신 바벨론) 이스라엘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모두 잃어버린 것 같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그것을 허락하시나? 이것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의 또는 공의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하박국 선지자는 환상을 받았지만 그것은 장래에 드러날 미래에 대한 환상이다 (합 2:3).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참 백성, 죄악된 나라의 의인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히브리어 본문에서와 같이 인간의 믿음이든, LXX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든, 여기서 “믿음”은 중간 기간의 interim period 핵심 특징이다.

 

이것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국 우상숭배하는 강포한 나라를 (바벨론) 징벌하실 것을 믿는 것이며 (2:5-20), 하나님께서 진노 가운데서 긍휼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을 믿는 것이다 (3:2-19).

 

로마서 1:18-3:20 및 3:21-4:25과 주제적으로 병행되는 이 내용은 놀랍다. 바울은 실제로 하박국서의 더 큰 맥락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에서 합 2:4하반절을 인용했음을 계속 암시한다.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와 오만에 (로마 제국) 직면한 1세기의 신실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열방에 진노의 심판이 떨어지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 임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합 2:4하반절은 "의인은 오직 그의 믿음으로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거짓과 조작이 국가의 근간을 흔들어 버리고, 조작된 여론과 선거가 국가 조직을 장악하고 악의적이고 기만적인 선전선동이 광란적으로 울려퍼지는 오늘날 한국 현실이나 하박국이 살았던 광포와 거짓이 난무하던 유대 왕국이나 시대나 시간은 흘렀으나 어지 그리 유사한가?

합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유튜브나 페이스북, 편향된 방송사들과 신문사들, 사회 인간 관계망 등은 철저하게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좌파 하수인들이 여전히 꽉 장악하고 있음이 여기 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가령, '전광훈 목사'라고 유튜브에서 검색해 보라. 어떤 결과물만 쫙 나오는지. 이런 세상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하박국 시대에는 바벨론 제국이, 주님 당대 유대인들에게는 로마 제국이, 21세기의 한국 성도들에게는 공산 좌파 집단의 거짓과 조작의 광풍이 휘몰아 치며 압제하고 고통과 구문을 가하는 상황이 내용은 달라도 형식은 유사하다.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그분의 약속을 이루시는 그분의 신실하심이 나타나, 이 거짓되고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시고, 이 땅에 다시 공의가 강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대한민국, 찬양과 기도의 함성이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고 선교 대한민국의 재건을 고대하며 기도로 인내하며 믿음으로 끝까지 견뎌내야 한다.

 

진실을 말하면 그 입을 자갈 물리고자 구속 수감시키는 악법이 살아 날 뛰는 한국적 상황이다. 1999년 12월 김대중의 밀사로 방북해 대한민국의 국립 묘지격인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조성된 ‘광주5‧18 가담 北특수 공작원 묘역’을 방문하도록 강요당했다고 진술했던 김경재 의원의 말이나 여러 증거들에 근거하여 5.18 광주 사태의 진실을 말한 전광훈의 입에 자갈을 물리고 구속하면 그는 야웨의 고난의 종의 전철을 다시 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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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사태 참고 자료:

김경재 전 의원은 1999년 12월 6일부터 14일까지 8박 9일간 베이징을 (北京) 거쳐 북한을 방문할 때 (김대중의 밀사) 자신을 안내한 조선노동당 간부들의 끈질긴 요청으로 평양시 형제산 구역 신미동에 위치한 애국 열사릉을 방문, 이들로부터 ‘5‧18가담 北특수군묘역’이 가묘로 조성돼 있다는 설명과 함께 10개 내외의 (9-11개) 묘비가 있음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동안 광주 5‧18의 민감성 때문에  가만히 지내다 24년만에 목격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다”고 했다. 김 전 총재는 당시 방북에는 보좌관과 목사 등 2명이 동행했다며 이들도 北이 말하는 5‧18가담 북한군 무덤을 함께 목격했으며 모역은 애국열사릉 정문 입구에서 볼 때 왼쪽 코너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 전 총재는 당시 평양의 순안공항에서 그를 영접한 사람은 김일성종합대학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김경락이었다면서 그로부터 만수대의 김일성 동상 참배를 요청받았으나 거부하고 다만 김일성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현 금수산태양궁전)을 구경하고 ‘5‧18참전 북한군 사망자’(이들은 ‘참전’이란 용어를 썼다)가 묻혀있다는 애국열사릉을 방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영어는 물론 불어, 서반어에 능통한 국제문제 전문가로 유럽 주재국 대사를 역임했으며 북한 조선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남북적십자회담 북측 단장을 지낸 김경락은 지난 2001년 2월 16일에는 남북 이산가족방문단장으로 100명의 방문단을 이끌고 서울에 오는 등 그동안 세 차례나 방남(訪南)한 인물이다. 

김 전 총재는 김경락의 지시에 따라 자신을 금수산 기념궁전과 애국 열사릉으로 안내한 사람은 2명으로 한 명은 조선인민군 축구단 풀백 출신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인 김학철과 또다른 한 명은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노동당 부장급의 또 다른 김씨였다고 했다. 두 사람은 모두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의 엘리트였으며 특히 이름을 밝히지 않은 김씨는 보천보악단 소속 미인 무용수를 부인으로 두고 있었다고 김 전 총재는 전했다.

김 전 총재는 이들에게 묘의 진위여부를 재차 물었을 때 한결같이 “광주 5‧18때 참전한 인민군 용사들이 맞습니다. 우리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의장님은 남조선 최고 명문 서울대를 졸업했고 우리도 공화국 최고의 김일성 종합대학 나온 사람입니다. 의장님도 진솔하겠지만 우리도 진실한 사람입니다. 없는 걸 어찌 가짜로 만들겠습니까?”며 오히려 화를 내는 듯 하길래 더 이상 심각하게 따지거나 얘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 전 총재는 충격적이고 소름까지 돋아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허겁지겁 묘역을 빠져나왔다고 했다.

김 전 총재는 그러나 지금도 북한이 5‧18때 특수군을 보냈을까? 의심하고 있다며 아마 당시 광주-전남 일원에서 활동했던 고첩들같은 외부 불순세력이 가담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총재는 그러면서 “나는 5‧18의 민주화운동 성격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 개헌이 되면 5‧18 정신과 가치를 헌법 전문에 넣겠다고 했는데 오늘날 5‧18처럼 대한민국을 분열시키고 있는 사안은 없을 것이다. 윤 대통령이 곧  5‧18 기념사를 할 것으로 보이는 데 국민들을 잘 설득해서 5‧18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가 나오도록 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4‧19는 전국적인 투쟁이었고 사망자 등 피해자도 5‧18보다 많은데도 유공자는 500여명 정도다. 하지만 5‧18은 광주 일원에 극한됐고 사망자도 4‧19에 비해 적은 데 유공자가 6천명 내외라고 하니 말이 되느냐?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유공자증 반납 운동을 벌이고 유공자 신청 및 지정 업무를 광주 광역시장 아닌 국가 보훈처장으로 이관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총재는 당시 자신의 방북은 북한 당국의 공식 초청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의 밀사 자격으로 이러진 것이라면서 “북측은 나에 대해 북남분단 이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최초로 공식 초청한 남조선 정치인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북한 각각의 동시 유엔 가입에도 불구, 우리 헌법은 북한을 대한민국 영토의 일부로 규정하고 있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북한을 반국가단체 내지 교전 단체로 판시하고 있기 때문에 김 전 총재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자격이 아니라 급조된 ‘보통사람들의 통일운동시대’란 단체의 의장 자격으로 방북하게 됐고, 북측에서도 ‘국회의원’ 대신 ‘의장’이란 호칭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김 전 총재의 방북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간의 남북정상회담(2000년 6.13-6.15)을 약 6개월 앞둔 시점이다. 따라서 정상회담을 위해 현지답사를 통한 사전 정세 및 분위기 파악이었다. 하지만 북한이 그들의 주장대로 분단 후 최초로 공식 초청한 남조선 정치인에게 ‘광주5‧18’ 참가 북한군 묘역이 있다고 밝히고 이를 공개적으로 보여줬다는 것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다분히 계산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김 전 총재는 방북 보고 이후 자신과 김 전 대통령과의 관계가 소원해 진 것이 사실이라면서 이후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대북 접촉 창구가 박지원과 북한 외교관 출신의 아태위원회 부위원장 송호경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1942년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난 김 전 총재는 순천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 재학시절 극성 운동권으로 박정희 대통령에 저항하는 학생운동(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등)을 주도하다 신변위협을 느껴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뉴욕에서 11년간 ‘독립신문’ 발행인 겸 주필로 있었고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집필한 ‘김형욱 회고록’이 유명하다. 1971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의 공보비서로 활약하는 등 김 전 대통령의 재미 망명 시절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학구열도 높아 미국의 명문 ‘아이비 리그’ 대학의 하나인  펜실베이니아大에서 석사학위(국제정치학)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북한의 평양 애국열사릉에 ‘광주5‧18’에 가담한 북한군의 묘가 가묘 형태로 목격됐다는 주장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2012년 9월 27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기자회견장에서 북한 인권운동가인 김주호 박사에 (당시 북한난민보호협회 대변인) 의해 함경북도 청진시 낙양동 청진역 북쪽 약 800m 지점, 청진공업대학 부근 낙타산의 해발 70m 고지(북위 41도 47분 53초, 동경 129도 47분 59초)에 ‘광주5‧18’ 때 ‘전사’한 북한인민군 534군 부대 특수요원 158명의 합동 가묘 2개와 (남녀를 합장하지 않는다는 관습에 따라 남녀 무덤 각각 1개) 추모비가 (공식 명칭: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 있다는 주장과 함께 현장의 무덤-추모비 사진과 명단이 공개된 바 있다.

김주호 박사는 이와 함께 북한 인민무력부와 보위부에서 대외비로 보관중이라는  광주5.18 참전 3개 군부대 (534·108·806군부대) 사망자 344명의 명단도 공개했다. 158명은 534군부대에서 발생한 사망자이다. 기자회견장에는 탈북자들과 천주교 나라사랑기도모임, 역사 바로 세우기 불교회, 탈북난민보호협회 등 10여개 시민 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전사자 158명의 이름은 추모비 뒷면에 적혀있다. 뒷면은 <여기에 청춘의 고귀한 신명을 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해 바친 님일세>라는 글귀로 시작해 158명의 이름을 빼곡히 적은 다음 명단 끝부분에 <사람들이여! 걸음을 멈추고 용사들의 불멸의 애국정신을 추억하라. 피로써 조국을 지킨 인민군 영웅 렬사들의 혁명정신과 찬란한 위훈은 후손 만대에 길이 빛나리라!>라고 쓰여있다.

한편, 스스로를 ‘자유의 투사’라고 밝힌 김계철씨 등 17명의 이름으로 2020년 6월 25일 출간한 <북한과 한·미·일 정보기관의 기록물로 본 광주사태>에 따르면 추모비에 이름이 새겨진 158명은 함경북도 534군부대 보위부가 보관중인 ‘남조선 혁명투쟁에서 희생된 인민군 영웅들’이란 이름의 문건에서도 중복 확인되고 있다. 

이 책은 “한·미·일 정보기관이 보유한 자료 분석과 당시 광주에 남파된 북한군 작전총국 직속 폭풍군단 (제11군단) 우레 3여단 5대대 3중대 문영진 (가명) 등의 도움으로 북한군 534·108·806군부대 작전과 전사한 북한군 명단 등 북한 자료를 공개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이 기술하고 있는 확인된 전사자는 534군부대 158명, 108군부대 112명, 806군부대 74명 등 도합 344명이다. 폭풍군단은 예하 경보병여단을 ‘번개’, 항공육전여단을 ‘우레’, 저격여단을 ‘벼락’으로 부르고 있다

이 책은 추모비에 적힌 158명은 북한 인민무력부와 534군부대 함경북도 보위부에서 대외비 문서로 보관 중인 명단과 인적 사항이 정확히 일치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인민무력부와 보위부에서 보관중인 명단은 붉은색 겉표지에 금색 글씨로 <당과 수령을 위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라고 적혀있고 중앙에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장이 (國章) 찍혀있다. 명단은 일련번호를 붙여 이름, 태어난 곳, 생년월일, 입대년도, 전사년월일, 군사칭호 (계급) 순으로 적혀있다. 명단 상단에는 왼쪽에 <대외비 한함>이란 글씨와 함께 <남조선 통일전선을 위한 투쟁에서 전사한 조선인민군 열사자료>라는 제목과 함께 작성 일자를 뜻하는  <조선인민군 무력부 534군부대(1980년 8월 1일)>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그리고 제목 맨 위에도 북한의 국장이 찍혀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들 344명의 사망일이 모두 ‘5‧18 광주사태’(1980면 5월18-27일) 직후인 1980년 6월 19일로 일괄 기록돼 있다는 점이다. 당시 북한에서 군인의 대량 전사(戰死)를 야기할 수 있는 전쟁이나 인민봉기, 군사정변 같은 것이 결코 없었는데 하루에 344명의 군인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북한의 ‘5‧18개입 작전’이 최종적으로 6월 19일 종결됐으며, 또한 이들이 북한 지역내에서 전사하지 않아 시체가 수습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공개하고 있는 전사자의 생년월일이 대부분 1950~1951년, 입대년도가 대부분 1967~1970년, 그리고 계급이 대부분 중‧상사 몇 명을 제외하면 소위‧중위‧상위 등 위관 장교란 것도 이들이 ‘광주5.18’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라는 지적이다. 북한군의 ‘광주5‧18’ 개입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청진의 이 추모비가  6‧25전쟁 전사자의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시간적, 역사적으로 전혀 맞지않은 주장이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발효로 끝났기 때문에 이들이 6.25때 18-20세로 전사했다고하면 생년월일은 대체로 일제 식민통치시기인 1930~1932년, 입대연도는 늦어도 1950년 6월 25일 전후여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사자 명단 작성일이 모두 ‘광주5.18’ 직후인 1980년 8월 1일자란 것도 이들이 6.25전쟁과는 무관하다는 걸 말해 준다. 

이 책은 그러면서 광주사태는 북한군 남파, 내란, 민주체제 하의 정치적 사건 등 복합적 성격을 띤 것임을 보여준다면서 따라서 북한군이 전면 남침을 하지 못한 이유도 이런 복합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5.18광주사태’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우리 정부는 공식 부인하고 있으나 탈북자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돼 왔다. 

1997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와 김덕홍(金德弘) 전 려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은 1998년 6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1980년 광주사태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했다. 김덕홍 사장은 “조선노동당 대남 부서가 있는데 그 부서에 소속되어 있던 상당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 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 술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황장엽 전 비서는 “광주학생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北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을 (남한에) 전가한 일”이라 면서 북측이 광주사태를 사주하고도 그 책임을 남측에 전가했다고 말했다. 



5.18에 북한 대남전략기구가 개입했다는 북한의 고(故)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김덕홍 전 려광무역사 총사장이 1998년 6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행한 증언

김덕홍: 북한 통일전선부에서는 분기에 한 번씩 강연을 하는데 광주문제를 자기네들이 한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황장엽: 북한 내부에서 대남사업을 내용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상식화돼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높아가는 한국에서 왜 데모나 운동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모두 북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남정책의 두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남로당 때와 같이 조직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것. 그래서 지하당을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 누가 지도하는지 모르게 합니다. 둘째, 노동자나 군인보다는 학생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겁니다. 

김덕홍: 김일성종합대학 옆에 3호 청사가 있다. 광주운동 이후에 3호 청사 사람들이 표창을 많이 받았습니다.

황장엽: 동생, 그런 얘기 했다가 또 혼이 나려고 그래?

김덕홍: 형님, 우리가 이런 얘기 하자고 남한에 온 것 아닙니까. 여기 남한에 와서 꼭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3호 청사에 소속돼 있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일제히 훈장을 받았습니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술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겁니다.

전 북한 특수군 출신 김명국(가명)씨의 증언
2006년 여동생, 딸 등과 함께 탈북한 전 북한특수군 출신 김명국(가명)씨의 증언도 5.18 북한 개입설을 뒷받침 하고 있다. 다음은 그의 증언을 요약한 것이다.

“1980년 5월 19일 전남 광주시로 남파돼 작전을 수행하다가 5월 27일 북한으로 철수하던 도중 북한군 포 사격훈련장을 통과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1국기훈장 1급을 받고 5.18 영웅 대접을 받으면서 2003년까지 북한군 특전사 교관(중좌)으로 복무했다.

“광주봉기에 대한 북한군 침투 총화(결산)가 6월 15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직접적인 참석 하에 평양에서 열렸다. 남한에 침투됐다가 살아서 귀환한 군인, 전사한 군인 모두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가 수여됐고 분견대 대장 2명은 조선인민군 교도지도국(특수전사령부) 작전부에 승급 배치됐다. 김일성은 소좌급만 분견대장들에게 대좌의 군사칭호를 수여했다.”

하지만 이 인터뷰 기사는 국가정보원이 “광주5.18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니 기사화되면 정말 큰일 난다”면서 강력하게 보도자제 협조 요청을 해오는 바람에 당시 기사화 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황장엽과 김덕홍은 국정원 보호‧감시 하에 있었기 때문에 국정원 감시요원들이 인터뷰 장소 장막 뒤에서 인터뷰 대화 내용을 다 듣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충격적인 인터뷰 기사는 인터뷰를 했던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상 기자가 (현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5년후인  2013년 4월 22일 TV조선 ‘신율의 시사열차’에 출연해 처음 보도됐고 그해 월간 조선 5월호에 실렸다. 김용삼 전 편집장은 국정원보다 먼저 황장엽과 김덕홍의 망명 작전을 민간 차원에서 ‘주도’하는 과정에서 1996년 6월 모종의 경로를 통해 이들로부터  북한군의 ‘5.18개입’에 대한 이야기를 메모 형태로 전달 받은 것으로 보도됐다.

 

 


추모비에 새겨진 북한 특수군 534군부대 전사자 158명 명단
탈북자들은 北인민무력부와 보위부가 관리하는 명단과 정확히 인적사항이 일치한다고 말한다
홍성표, 김석준, 한창준, 오부진, 김운선, 김응수, 김국식, 김한수, 서대석, 우준선, 조영규, 리진혁, 염종식, 유해유, 김종돈, 천수만, 유리국, 김귀옥, 서진남, 김창록, 김영석, 김수전, 김용성, 전순돌, 리계찬, 림한석, 김진우, 박원용, 황송열, 김동철, 리진섭, 강원철, 최귀한, 리창용, 손원백, 현택룡, 박경화, 김수근, 김인준, 방동환, 전성규, 남창섭, 강일권, 리봉섭, 주창동, 김인현, 윤장우, 리정부, 김은태, 최은신, 김태환, 김명규, 리동근, 김승미, 리동철, 리양수, 허명신, 염철남, 영홍식, 리정환, 최철순, 염근원, 김학준, 조기림, 리승봉,림용현,
2011년 11월에 촬영된 사진으로 여기 적힌 158명의 명단은 북한 인민무력부가 작성한 534군 부대 전사자 명단 및 전투 기록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상단 좌측 세로 셋째 줄 ‘홍성표’에서 읽기 시작해 상단 우측 ‘김석준’ 등으로 가서 마지막에 하단 우측 ‘조영학’에서 끝난다(아래 명단 참조). 전사자 명단은 펜글씨로 1980년 8월 1일자로 작성돼 보관돼 온 것을 1990년대 중반 전산화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한다.
 

5.18광주사태 참가기’를 쓴 탈북 군인도 있다. 5.18때 광주에 왔다가 북한의 영웅이 됐지만 다시 탈북한 북한 특수군 중좌 (중령) 출신 김명국(가명. 출간 당시 성남시 거주로 알려짐)이라는 사람은 2012년 3월 22일 자로 자신의 ‘광주5.18 참전기’성격의 단독 수기를 냈다. 김명국은 16세에 북한군 특수부대에 입대한 후 특수훈련을 마치고 19세 때 지휘관 호위병으로 5.18광주에 왔던 이야기를 또 다른 탈북자의 이원명의 필력을 빌어 증언집을 내놓았다. 그는 광주에 온 뒤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 작전이 시작된 5월 27일 광주를 빠져나와 육로로 비무장지대를 넘어 29일 북한으로 탈출했다고 수기에서 적었다. 그는 수기에서 자신이 1961년 함경북도 회령시 출생으로 1977년 8월 26일 평양시 순안구역 대서리 북한대남연락소(112 훈련소) 아동훈련소에 입대했으며 1년후인 1978년 10월 평양시 서포구역 대양리에 있는 노동당 중앙당 연락소(1010군부대) 2처 전투정찰부대에 입대해 각종 무술을 훈련하고 부대장 호위병으로 근무하고 있던 중 1980년 5월 19일 광주에 남파됐다고 적었다. 북한으로 복귀한 뒤 1980년 10월 30일 태천교도지도국(특전사)군관학교에 입교해 장교가 된 후 2003년 제대할 때까지 중좌로 있었다면서 2006년 중국 밀무역사건에 연루돼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체포되기 직전 가족과 함께 탈북했다고 밝혔다. 

 

 


한편 2006년 12월 20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는‘광주 5‧18’에 북한군 특수부대의 개입을 주장하는 탈북 인민군 특수부대원들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회견에는 임천용‧최중현 자유북한군인연합 공동대표, ‘한국판 레미제라블’로 불리는 ‘요덕 스토리’ 안무가로 유명한 김용순, 전 북한 사회안전성 소속 특수부대 군관 출신 탈북자들과 육군첩보부대(HID)출신의 오복섭 애국청년연합 대표 등이 참가했다.  

폭풍군단’으로 불리는 북한의 경보교도지도국 예하 19여단 2대대 상위(대위)출신의 임천용 대표는“허울을 쓴 민주화 인사들이 북한정권과 입을 맞추며 광주의 희생을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역이용하고 특정 집단의 상징적인 업보로 선동하고 있다”며 “파괴되는 국가 사태 앞에서 더 이상 입을 다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기자회견을 열게 됐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임대표는“광주사태의 발단과 시발점은 민주화 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주장하고 1980년 5월 광주에는 북한의 최정예 특수부대원들이 1개 대대 이상 투입 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 증거로 △당시 봉기상황이 북한으로 실시간 생중계된 것 △봉기자들이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것 △현재까지 미해명으로 남아있는 12구의 신원 미상자 △전기톱에 의해 두개골이 파괴된 시체 △봉기군이 봉기군을 사살한 것 △봉기군의 아지트와 봉기군이 탈취한 군용트럭·탱크·장갑차 안에서 대량 발견된 술병 △방위산업체·감옥·방송국 등 국가기관 점거와 군 능력을 초월해 전면전을 불사한 것 등을 언급했다. 

그는 “남파된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은 각 군단 소속 특수부대들에서 차출됐고, 반은 국방군(한국군) 복장이었고, 반은 민간인 복장으로 내려갔다. 국방군 복장을 입은 특수부대 요원들은 괴뢰군(진압군) 행세를 했다.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들은 봉기군(광주 시민)행세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광주사건과 관련한 발언을 했다며 입수내용을 밝히기도 했다. 임 대표에 따르면 김일성은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6‧25, 4‧19, 5‧18) 놓쳤는데 그중에서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다”라고 말했다. 

이는 김일성이 1986년 1월 6일 ‘폭풍군단’으로 불리는 평안남도 덕천시 소재 경보교도지도국본부(Light Infantry Guide Bureau)에서 열린 지도국 산하 여단장 정치위원을 위한 군사정치일군 상학(수업)에서 발언한 내용이며 전 인민군에 배포된 정치 상학 자료에서 출처를 얻었다고 임 대표는 밝혔다. 폭풍군단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예하에 4개 경보병, 7개 항공육전, 4개 저격 여단을 두고 각각 ‘번개’, ‘우뢰’, ‘벼락’으로 부르고 있다. 

임 대표는 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82년 3월 북한 특전여단들이 북부지구에서 벌인 쌍방 게릴라 훈련장에서 “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단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날 회견에서 5.18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 정치장교였던 최중현 대표는 5‧18 직전에 있었던 김일성의 비밀 교시를 소개하고  인민군 4군단 70정찰대대 출신인 이덕선씨로부터 북한군이 5‧18사태에 개입했다는 자세한 정황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최 대표는 김일성이 5‧18의 도화선 중 하나였던 사북(舍北) 탄광사태에 다음과 같은 교시를 내렸다고 소개했다.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 일어났습니다…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빈민 등 각계  각층의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사북사태란 1980년 4월 21-24일 나흘간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인 강원도 정선군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광부와 그 가족 6천 여명이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하여 시위를 벌인 대규모 노사분규로,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발전했다. 

최 대표는 “5‧18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저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에서 광주사태에 대해 속보를 전해 들으며 출전 명령을 기다렸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북한 7군단 10사단장이었던 여병남과 7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두산을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며 “그 후로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 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돌았다”고 덧붙였다. 

최 대표는 또“북한군 4군단 70정찰대대 전투원으로 복무했던 이덕선씨로 부터 당시 정찰국 소속 정찰대원들의 광주 침투 상황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며 “이씨에 따르면 광주사태 당시 2군단 정찰대대를 모토로 각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 가운데 3분의 1이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만이 귀대했다”고 말했다. 

이덕선 씨가 알고 있는 광주봉기 침투자는 조장이었던 4군단 70정찰대대 상좌 황종인과 부조장이었던 4군단 33사단 중좌, 조원(組員)으로 침투했던 4군단 정찰대대 작전집체조의 홍씨 성을 가진 참모였다고 한다.  

통상 북한 당국은 남파돼서 임무를 수행하고 귀대하거나 임무수행 중 사망한 공작원 또는 전투원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와 함께 각종 훈장을 수여하는데 그 수는 1년에 불과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정도였다. 

이덕선 씨에 따르면 1980년에 2군단 75정찰대대에서만 41명의 공화국 영웅이 배출됐고 타 부대들에서 21명, 도합 62명의 영웅이 나왔다. 북한의 경우 평화시에는 남파간첩이나 전투원이 아니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는 일이 거의 없음을 감안할 때 한 해 동안에 62명의 전투영웅이 탄생했다는 것은 대남침투관련 거대 작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최 대표는 지적했다. 

사회안전성 대위 출신 김용화 씨는 “봉기 당시에 북한 인민군 중위로 있었고 황해북도 송림에 위치한 사회안전부 연봉부대에서 자동차를 관리하며 인민군의 수송을 담당했었다”며 “그 당시 ‘너구리 작전’이라고 해서 대동강 하류를 따라 남한군의 옷을 입고 자동보총을 들고 나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밤 1, 2시가 되면 10명 정도를 태운 배가 조용히 빠져나갔고 그때는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며 그 때 빠져나간 북한군들이 광주에 가기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북한에서는 광주사건은 북한에서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민주화항쟁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5.18역사학회는 2020년 12월 5일 5.18역사 왜곡 처벌법은 헌법의 기본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무시하고 역사해석을 처벌하겠다는 것은 사악한 독재”라고 주장했다. 5.18역사학회는 또 5.18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은 북한군의 개입 여부등 5.18진상을 조사하겠다고 규정하고있는 데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처벌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헌법 제19-22조가 보장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및 학문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역사학회측은 문재인 정권은 5.18역사 왜곡처벌법을 만들면서 왜 ‘6.25역사왜곡 처벌법’이나 ‘천안함 폭침 왜곡 처벌법’ 같은 것은 만들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6.25가 김일성에 의한 남침이 아니고 이승만에 의한 ‘북침’이라거나 남북한 쌍방 과실에 의한 ‘내전’이라고 왜곡, 주장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을 왜 만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울러 북한 어뢰정에 의한 천안함 폭침을 좌초 침몰설, 이명박 정부의 고의적인 조작에 의한 파괴설 등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은 왜 만들지 않느나? 고 말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6.25를 ‘내전’으로 표현한 데 이어 2019년 6월 스웨덴 의회연설에서는 “남북은 어떤 나라도 침략한 적이 없다”고 말해 6.25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는 또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인 2015년 3월 25일 천안함폭침 5주기를 하루 앞두고 천안함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5년만에 처음으로 인정했다.

 
무릇 역사에 대한 해석은 학계의 몫이며,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과거에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서 “역사는 역사학자가 판단해야 하며 어떤 경우든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이념전쟁은 독재 권력의 전조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적어도 역사 교육에서는 획일적인 교육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한 문 대통령의 약속은 어디로 갔는가?

자료:

 

1980년 5.18 당시 광주 일에 뿌려진 삐라

 

함경북도 청진시 낙양동 청진역 북쪽 약 800m 지점, 청진공업대학 부근 낙타산의 해발 70m 고지(북위 41도 47분 53초, 동경 129도 47분 59초)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인민군 특수군 534군부대 전사자 158명의 묘비와 무덤. 탈북자들에 따르면 이 묘역에는 1980년 광주-전남 일원에서 무장반란을 선동하며 작전을 수행하다 사망한 조선인민군 특수군 534군부대 전사자 158명의 무덤 2개와 추모비란 것이다. 추모비 뒷면 양쪽엔 가묘 2개(시체가 회수되지않아 부대와 집에 남아있는 유품 등을 넣어 만든 무덤이라한다. 전사자들은 남녀 합장을 하지않는다는 관례에 따라 남자묘와 여자묘 각 1개)가 보인다. 그러나 2012년 9월 27일 한국에서 ‘광주5.18’에 ‘참전’한 북한군의 전사자 명단이 적힌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비)’ 사진이 공개되고 전사자 관리 부대가 발표되자 다음날인 9월 28일 북한의 보위부와 대남공작부서에서 긴급비상대책회의를 열고 묘비를 철거하기로 결정, 2014년 여름 철거해 모처에 보관중이라고 탈북자들은 말하고 있다.
 
서옥식 ((사)대한언론인회 부회장 겸 편집위원,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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