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무천년설의 (Amillennialism) 정의
무천년설은 과거에 천년왕국이 없다는 가르침인 양 잘못 인식되기도 했었다.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없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지상에 1천년간의 물질적, 정치적 왕국이 재림 이후에 들어서리라는 생각을 배격하고, 현재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말씀으로 통치하신다고 가르친다.
1.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천년왕국"이 현재 교회 시대에 영적으로 실현되고 있다고 가르친다. 천년왕국은 재림 이후에 기대할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실현된 천년왕국이란 (realized millennialism)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2. 무천년설을 따르는 이들 중에서
1) 어떤 이들은 계 20:4-6에 묘사된 대로 천년왕국은 세상을 떠나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영혼들이 (중간기 상태에 있는 자들) 그리스도와 더불어 통치하는 것을 가르킨다고 생각한다
2) 어떤 이들은 교회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영적인 승리를 현재 진행 중인 천년왕국의 실체라 생각한다.
3. 따라서 무천년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 하신 이후에 지상에 물질적 풍요와 이상적인 사회인 유토피아가 건설되리라는 사고를 배격한다. 후천년설자들은 지상 유토피아가 재림 전에 실현되리라 믿고, 전천년설자들은 재림 이후에 실현되리라 믿지만, 무천년설은 재림 전이나 후에나 지상 유토피아는 없다고 배격한다.
4. 무천년설은 세상이 새롭게 온전히 변화되는 신천신지의 역사가 있기 전에는 재림 전이나 후에나 지상 유토피아는 건설될 수 없다고 배격한다. 재림 후에 천년왕국을 기대하는 전천년설자들도 재림 이후에 세상이 온전히 새롭게 재창조된 후에 천년왕국이 세워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현 세상의 존속이 지속되면서도 지상 유토피아가 건설된다는 것이다. 현 세상이 존속되는 한에서는 악과 선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무천년설은 재림 이후에 세상이 재창조되고 신천신지의 영원 세상이 지속될 것을 믿는다.
현 세대 마지막 즈음에 큰 환난과 배교가 있을 것은 명백하나,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듯 그런 7년 대환란 시나리오가 아니다. 즉 유대인들이 주로 핍박을 당하고 유럽 공동체에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온 세상 권력을 주장하면서 공포 정치를 행한다는 식의 시나리오는 성경적일 수 없다. 재림 직전에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개종하여 예수님을 믿으리라는 사고도 성경적이 아니다.
무천년설자들은 재림 때에, 불신자나 성도나 함께 전체가 부활하고 전체가 심판을 받게 된다. 그 후에는 신천신지의 영원 세상으로 이어진다. 반면 전천년설자들은 재림 이후에 1천년간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가 있고 난 후에, 최종 부활과 심판, 영원한 세상이 도래하리라 기대한다.
B. 무천년설의 다른 특징적 요소들
1. 구약 예언의 해석
전천년설자들은 (세대주의 포함) 구약 예언의 많은 부분들이 주님의 재림 이후에 다윗 왕국이 재건될 때, 문자적으로 성취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무천년설은 그런 지상 왕국의 재건을 비성경적 사고로 이해하기 때문에, 많은 구약 예언들이 유대적 색채로 칠해졌지만, 실제로는 신약 교회에서 영적으로 성취되리라 해석한다. 그런데 최근에 안토니 후크마는 (Anthony Hoekema) 무천년설자이면서도, 구약 예언들을 보다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후크마는 말하길:
세대주의자들은 우리 무천년설자들이 구약 예언들을 대개 신약 교회에서 영적으로 이루어질 일이라고 상징적으로 해석하거나 한다고 장차 나타날 천국에서의 삶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해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유의 예언들이 교회에서나 하늘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될 새 창조된 새 땅에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새 땅의 개념은 구약 예언에 대한 바른 접근법으로 아주 중요하다. 너무 자주, 불행하게도 무천년설자들은 구약 예언을 해석할 때, 새 땅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지키지 못한다. 이런 구절들의 의미를 오로지 교회에나 하늘에만 적용하는 일은 그 구절들의 의미를 고갈시키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런 구절들이 재림 이후에 가정된 그 지상 천년왕국에서 성취되리라 생각하는 것도 역시 그릇되다. 그런 구절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예비하고 계시는 영화로운 땅에 대한 영광된 묘사들이라고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The Bible and the Future., 205-06).
2. 계시록 해석
대부분의 무천년설자들은 계시록 내용이 신약 전체 기간을 일곱 번 반복해서 다룬다고 점진적 병행법 구조로 이해한다(progressive parallelism. 이런 반복 구조는 영어로 반복설이라 (Recapitulation) 불린다.
그 반복되는 일곱 부분들은
(1) 1-3장 (2) 4-7장 (3) 8-11장 (4) 12-14장 (5) 15-16장 (6) 17-19장 (7) 20-22장 등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계 20:1은 19장에 묘사된 주님의 재림이 있고 나서 일어날 역사적 사건을 다루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나타난 마귀의 결박을 다룬다. 즉, 계 20:1은 신약 시대 마지막 기간이 아니라, 첫 기간 곧 십자가 사건 당시를 다룬다. 이렇게 볼 경우, 계 20:4-6에 언급된 1000년간 왕 노릇 한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신약 시대 전체 기간에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여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1000년이라고 문자적으로 999년에 1년이 더해진 일천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질 그분의 계획의 완성의 기간이란 상징적 의미로 이해한다. 그 기간은 물론 신약 시대 전체 기간을 가리킨다.
언약 신학
어떤 이들은 언약 신학 체계를 따르는 이들은 모두 무천년설자들이라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언약 신학을 따르면서도 전천년설자들도 있다.
언약이란 쌍방 사이의 법적 관계 설명의 방편을 가리킨다. 우리 현실 생활에서는 "계약"이란 말을 사용하고, 국제적인 관계 곧 두 나라 사이의 관계 설정의 경우에는 계약 대신 "조약"이란 말을 사용한다. 계약이나 조약을 체결하면 그 계약이나 조약의 조건에 쌍방이 충실해야 한다. 어길 경우 법적 제재가 가해진다.
성경에는 크게 두 종류의 언약이 있다. 하나는 타락 이전에 "행위"로 구원을 얻는 방법이 제시된 행위 언약, 타락 이후에는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은혜" 언약들인데, 타락 이후에는 역사가 진전함에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뒷받침하는 차원에서 여러 언약들이 주어진다.
1. 행위 언약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다. 이는 선악과 먹는 경우 죽으리라는 조건이다 (창 2:15-17). 계명 준수 때에는 물론 생명이다.
2. 은혜 언약 -
아담은 타락했고, 결국 에덴에서 추방당했다. 그 이후로 창 3:15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고 선언하시는데, 이것이 내가 보기에 제2 아담 언약이라 할 것이다. 이 선언에는 타락한 인류의 구원이 희미하게나마 약속되고 있다. 그래서 이 언약은 (약속)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케 한다 함은 계시의 발전된 형태에서 밝혀진대로 (계 12:9), 뱀을 주장한 사단의 머리를 상케 한다는 의미이다. 사단은 인류의 조상을 미혹하여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사단을 멸함에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원시 복음 혹은 태아 복음이라 한다. 아주 희미하게 구원 약속이 제시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원시 복음이 곧 모든 후대 은혜 언약들의 기초이다.
노아 언약 (창 9장)-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류의 발 딛고 사는 무대인 세상을 홍수로 다시는 멸하지 않겠다는 보존 언약이다.
아브라함 언약 (창 12, 15, 17장) -
타락한 인류 중에서 한 사람 아브람을 택하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온 세상을 축복/ 구원 하시려는 언약이다. 사실 노아 언약이나 아브라함 언약은 모두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지만, 하나님과 노아,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같이 쌍방 사이의 관계가 설정되기 때문에 "언약"이란 말로 (히, 베리트) 둘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아브라함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인류의 구세주가 되심으로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복을 받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모세 (시내산) 언약) (출 20-23장) -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과 일가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라면, 그 내용은 자손과 그 자손들이 발딛고 거할 땅, 그리고 그 자손을 통해 만민이 복 받으리라는 세계 복음화 등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을 택하신 이유는 저들이 세계에 복의 근원, 곧 복의 통로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는 오늘날로 말하면 저들을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다. 복이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데서 모두 나오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복"은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아브라함 후손들이 증대하여 한 민족을 이룰 때에는 가족 중심의 소단위 사회 생활에서 필요치 아니했던 사회 규범들이나 법규들이 요청되었다. 이런 필요에 부응하여 모세 언약이 주어진다. 따라서 모세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토대 위에 주어진 보충적 성격을 갖는다.
다윗 언약 (삼하 7장) -
다윗 언약 역시 아브라함 언약의 보충으로서, 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윗 후손들이 영영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것이다. 이 언약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여 왕이 되심으로 성취되었다.
새 언약 (렘 31:31-34)
이는 구 언약을 (모세 언약) 최종적으로 갱신하는 언약으로 종말론적 언약이다. 더 이상 새로운 언약은 없다. 이 새 언약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가지신 최후의 만찬 때에 예기적으로 체결되었고,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현실적으로 비준되었다. 예수님은 그 성찬 때에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셨는데,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를 예기하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피는 생명의 상징인데, 자기 생명을 드려서 인류의 죄값을 갚고, 또 자기를 믿는 자마다 죄 용서를 받도록 하신 것이었다.
구약 시대에 언약 체결은 반드시 제물을 잡아서 쪼개어 양편에 벌여두고 그 사이로 언약 체결 쌍방이 통과하며 언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이 제물처럼 쪼개어 지리라는 자기 저주 맹세를 하거나 (창 15장, 렘 34장), 아니면 제물의 피를 언약 체결 쌍방에 뿌려 쌍방이 언약에 충실하지 못할 경우 피가 뿌려지듯 (죽음) 자신도 드렇게 되리라고 자기 저주 맹세를 하여야 했다 (출 24장). 주님은 이제 제물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언약 체결을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혹은 제물로서 새 언약 체결에 참여하신 셈이다.
새 언약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1) 종말론적 언약 (렘 31:31 보라 날이 이르리니 - 종말의 날에;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언약),
2) 참여자 모두에게 죄 용서를 준다 (렘 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3) 구 언약이 이스라엘 중심이었다면, 이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세계적 범위를 갖는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복음의 세계성)
여기 이스라엘과 유다 집은 유대인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이제 이스라엘에 더하여 열방도 믿음으로 새 언약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4)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렘 31:33) 등이 그것들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법을 십계명 두 돌판에 새기셨으나 이제 새 언약은 마음판에 새기신다.
세대주의 신학
언약 신학 체계와 달리, 세대주의 신학체계는 성경을 각 시대별로 구분한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시대별로 달리 사람들을 다루셨다고 한다. 이는 다른 말로 해서, 각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하셨다고 한다. 이처럼 세대주의는 각 시대마다의 구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언약 신학은 타락 이후 전 기간에 걸쳐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연속성을 강조한다.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세대주의 신학을 따른다면, 율법 시대에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모세조차도 말이다. 그렇지 않다.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을 통해 구원을 받으라는 구원의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과 구분되도록 살 수 있는 한 기준을 정해 주신 것이다. 이방인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 역할을 하였을 뿐 구원의 수단은 아니었다. 타락 이후로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전부 구원을 받는다.
세대주의가 말하는 일곱 세대들: 무죄, 양심, 정부, 약속, 율법, 은혜, 왕국 시대 등이다.
다음은 김기준의 세대주의 옹호론인데, 세대주의 신학자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흔히 “세대주의”라는 말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칼빈주의에 입각한 언약신학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세대주의를 배격하고 있으며, 심한 경우는 이단이라고까지 부르지만, 이것은 세대주의에 대한 오해와 큰 편견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대주의를, 율법시대, 교회시대, 왕국시대 등 “시대를 나누는 체계” 정도로만 이해한다. 아니면 세대주의를 표방한 일부 이단들 때문에 시한부종말론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전혀 잘못된 개념이다.
사실 “세대주의”라는 용어도 그리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이 신학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번역해 붙인 표현인데, 이미 기독교계의 용어로 정착되어 있기 때문에 세대주의자들도 그냥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세대주에 해당하는 영어는 “Dispensationalism”이다. “dispensation”이란 경륜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경영하시는 방침을 말한다. 반면 세대라는 말은 “generation”이라 하는데, 이는 어떤 특정 부류의 대상, 즉 사람들을 말한다. 물론 이 둘이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어떤 시대를 사는 어떤 특정 부류에 따라 그 경영방침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 대상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경영방침은 어떤 특정 사건으로 구분되는 시대들에 따라 독특하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율법시대”라 할 때 그것은 율법이라는 경륜으로 경영되는 시대를 말하는데, 이 경륜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주어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부터 십자가에서 종결될 때까지이며, 이스라엘이 그 대상인 “세대”이다. 마찬가지로 “은혜시대”라 할 때 그것은 “교회시대”라고도 하는데, 은혜라는 경륜을 통해 교회, 즉 하나님의 신약적 백성들을 한 세대로 하여 다스려지는 시대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형성된 오순절 때부터 교회가 들림받는 휴거 때까지다.
그러면 “율법으로 경영된다” 혹은 “은혜로 경영된다”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 그 대상에게는 율법, 혹은 은혜라는 방침을 적용하여 다스리신다는 말이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아주 세밀한 율법 규정들을 주시어, 그것들을 일일이 지키게 하셨다. 경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도 세밀한 규례에 따라 희생제를 드리게 하셨으며, 그 규례를 어기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모든 의식적인 법들을 따라야 했으며, 그것은 그들의 종교적 규례 뿐아니라 사회적 규례도 되었다. 이 율법은 오직 구약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며, 이방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또한 십자가 이후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거나 하례를 받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부해야 한다. 이것은 행위에 따른 율법이며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을, 저주받을 “다른 복음”이라고 명시했다(갈 1:8-9). 대신 우리는 교회 시대, 혹은 은혜 시대에 살기 때문에 은혜라는 경륜의 적용을 받는다. 누구도 희생제를 드림으로 용서받지 않으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단번에 구원받는다. 어떠한 의식적 규례도 우리에게는 무의미하다. 왜나하면 십자가 이후에 하나님의 경륜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경륜은 그 시대와 대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래서 성경을 공부할 때 그 경륜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구약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을 우리의 규례로 잘못 적용할 수 있고, 그것은 심지어 구원에 대해서도 이단 교리로 연결될 수 있다. 은혜로 다스림받는 시대에 행위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이단 교리이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에 대한 설명이지만, 의외로 이러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예를들어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아 구약 시대처럼 지키려는 안식교도는 물론이거니와, 일요일을 안식일로 여기는 사람들도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겨졌다고 할 뿐, 여전히 일요일을 “안식일”의 개념으로 지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요일을 주일로 정해 예배드리는 것은 그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지, 창세기 2장에 근거해 그날 하나님께서 쉬셨기 때문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어떠한 요구도 하시지 않았다. 단지 기독교 신앙은 부활 신앙이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경배를 드리는 것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오해하다 보니, 많은 교회들에서는 구약적 형태로 교회를 운영한다. 목사들이 마치 구약의 제사장처럼 군림하기도 하고, 교회의 모임 장소인 예배당을 구약의 성전처럼 취급하기도 하고, 그래서 강단 휘장이나 강단 촛대 등 구약적 산물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배당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각자 안에 거하시는데 말이다(고전 6:19).
구약과 신약의 교리적인 구분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약 성도들도 우리와 똑같이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아 거듭났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구약의 온갖 희생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할 뿐, 십자가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구약 성도들은 동물의 피로 일시적 용서만 받았을 뿐 신약적 의미의 완전한 구속을 받지는 못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단번속죄를 받았으나(히 9:12), 그들은 자주 희생제물을 드렸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구원을 확신할 수 없었는데, 왜나하면 언제라도 타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한번 구원받으면 비록 타락한다 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거듭난게 아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성령으로 태어나게 되어 거듭났다(요 3:5).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한 번 들어오시면 나가지 않고 완전히 거하신다. 이것을 성령의 “내주하심”이라 말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내주하심이 없었다. 필요에 따라서 그 사람 안에 들어가시기도 하셨지만 떠나가시기도 하셨다. 사무엘상 16:14을 보면, 주의 영이 사울 왕을 “떠났다.” 다윗이 죄를 지었을 때 성령께서는 다윗을 떠나실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11에서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어 가지 마소서.”라고 간구한다. 결과적으로 성령께서는 다윗을 떠나지 않으셨지만,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불완전한 신앙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율법이라는 “행위”의 규례로 다스림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 교회 시대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다스림받기 때문에 죄를 좀 지었다고 성령께서 떠나가시지 않는다. 성도가 죄를 지으면 징계를 받기도 하고(히 12:6),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시지는 않게 되지만, 그렇다고 떠나시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구원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윗처럼 성령이 떠나감을 염려하는 기도를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대적 경륜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안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대적 경륜은 구약과 신약으로만 나뉘어지는 게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구약 성경 내에서도 크게 양심시대와 율법시대로 나뉘어지고, 신약 시대 이후에는 환란 시대와 왕국 시대로 나뉘어진다. 성경에는 많은 시대들과 많은 대상들이 나뉘어진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교리적으로 혼동될 뿐 아니라 이처럼 신앙 생활에 많은 실제적인 문제를 안고 살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모든 성경이 신약 교회를 위해서만 기록되었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신약 성도의 하나님만이 아니시다. 구약 성도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셨고, 천년왕국 때에도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경은 그 모든 시대와 대상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 따라서 시대적 경륜들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그 모든 다양한 다루심들을 무시하고, 오직 “우리”에게만 적용하는 편협한 관점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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