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기독교 시온주의자의 종국은 배교

중일사랑 2012. 4. 4. 20:24

기독교 시온주의자의 종국은 배교

 

 

열렬한 기독교 시온주의자 한 사람이 마침내 배교자의 길로 들어섰다. 기독교 시온주의자, 곧 자칭 기독인이라 하면서 불신앙으로 똘똘 뭉친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종말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대적하고 핍박했던 불신앙의 유대인들의 길로 추락하는 일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는 백방으로 기독교를 비방하면서 기독교는 구약을 왜곡시킨 가르침에 불과하므로 이제 유대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사탄과 동일시하는 그는 적그리스도에 다름 아니다.

 

이하에서 그 배교자의 글을 옮기되, 분홍색으로 표시하는 부분은 필자가 강조를 위해 덧입힌 것이다. 그리고 (유태민족이 예수를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이유 1) 같은 굵은 붉은 색 글자는 원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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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민족이 예수를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이유 1

 

 

다음은 랍비들이 설명한 유태민족에게 왜 예수가 거부되어야 하는지의 이유들 중 가장 심각한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글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모든 인류의 구세주로 설명하지만, 유태민족은 그를 거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개의 이유로써 설명해 놓았다.  그들 중에서 본 필자를, 반론할 여지도 없이 가장 크게 강타한 주제가 다음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가 과연 단단한 제대로 된 반석위에 지어진 것인지, 아니면 예수께서 비유하신 모래 위에 세워진 허상은 혹 아닌 것인지 근본 교리에까지 의문을 품게 한다. 

 

그리고 이미 기독교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일개 사도인 바울의 가르침 - 대개는 구약을 크게 왜곡해놓은 - 에서 온 것이란 점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신약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가르침이 극히 일부일 지언정 신학교수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볼 때, - 본 필자는 그들의 어떤 강의도 접해본 적 없다. 그렇게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수들이 있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 오늘의 이 세대는, 스가랴8:23의 말씀대로, 이제는 기독교가 해체되는 단계로 들어온 것이란 생각을 품게 하는 것이다.

 

생각들 해보시라. 현재의 기독교가 과연 옳은 방향을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대부분의 교회는 이미 물질적 축복, 심리적 치유, 잘 해보았자 윤리를 가르치는 정도에서 다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한 이야기 조차, 죽은 사후 세계에 관하여일 뿐이다. 그 속에 현실과 접한 생생하고 살아있는 종교란 증거는 없는 것이다.

 조금 전, 읽은 글인데, 파스칼은 루이 14세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이 있으시다는 증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답하기를, "유태인들입니다. 황제여. "라고 답했다고 한다.

 기독교회에게 묻고픈 것은, 파스칼은 왜 기독교도이면서 기독교를 하나님의 살아있으신 증거로 답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 필자가 답한다면, 바울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은 자들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기독교를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살아서는 축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외에는 별로 쓸 모가 없음을 본다. 죽을 때에만 필요한 저승용 종교인 것이다.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오늘, 아니, 어제, 출애굽하는 장면을 생생히 읽는다. 거기엔, 살아계신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친히, 430년간 노예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의, 이삭의, 야곱의 자녀들과 손자, 증손자들을 인도하며 이집트에서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역사 속에 이토록 살아 있는 하나님을 유태민족 외에, 누가 감히 겪었단 말인가. 얼마나 (유태민을) 사랑하셨더면, 구름기둥, 불기둥까지 세우시며 그들을 이끌어 내시는가.

 그 하나님의 심정으로 우리는, -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 유태인을 과연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해보았는가. 질문해볼 때가 온 것이다.

 각설하고, 유태교 랍비들은 왜 예수 아니, 기독교의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을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십자가상에 죽게 달리심으로써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대사역을 이뤘다고 설명한다. 즉. 예수의 피로 인한 대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들의 죄는, 원죄부터 시작해 과거에 지은 죄와 미래에 지은 죄까지 다 용서되고 천당가는 자격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십자가 사역은 율법이 실패한 일, - 인류 구원 - 을 대신 처리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온 것이고 그가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완성되어 -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28] - 곧,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완성한 것이라고 말하였고 우리들은 그에 한번도 의문을 품지 않고 여태 그렇게 믿어왔다.

 

그런데, 유태교 랍비들의 설명 - 왜 그들이 예수 피를 받아들일 수 없는지 - 은 충격적이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의 피와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바쳐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 속량하게 하는 방식은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옛날 가나안에서 벌어지던 바알과 몰렉신에게 바치는 인신봉양, 인신제물의 행태를 그대로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과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제물로 삼던 가나안족에게 몹시 혐오하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가나안 족속을 전부 멸망시키라고 유태인들에게 명령하신다. 그리하여 가나안 족속은 극히 일부 예외를 제하곤 모두 멸망했다.  

 랍비들은 질문한다.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여 인간들에게 절대 그 본을 따르지 말라고 엄명하셨던 바로 그 방식을 하나님께서 쓰실 것 같으냐고.

실제로 구약성경에 들어가 보면, 어느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제물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요구하였다는 귀절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조차, 하나님께서 따로 양을 준비하여 양을 죽이게 하셨다. 인간의 피와 제물을 원하셨다면, 이 때 양을 준비시키지 않으셨을 것이다. 

 

헌데, 바울이 가르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에 의한 죄의 속량이란 기독교 공식적 교리가 바로 딱 그 가나안족속  - 그리고 전 지구상에 퍼져 있던 인신공양, 인간제물 관습, 한국식으론 에밀레 종 같은 -  의 악습과 딱 똑같은 골격을 갖고 있다.

 

사도 바울은 짐승을 잡아 피를 쏟고 제물로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던 유태교의 제사내용에서 그 양이나 소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적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해 - 또는 하나님의 뜻으로 -  제물로 사탄에게 인간의 죄의 대속용으로 바쳐졌다는 식의 설명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사탄의 손아귀에서 풀려났고 영생을 얻었다 - 믿기만 하면 - 는 설명을 한다.

 

이런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무도 한번도 이것을 직시한 적 없거니와 - 여호와 천지창조주 하나님을 사탄보다 힘이 약한 부차적 존재로 등급하락시키는 우를 범한다는 점이다.

 

그 "피로 죄씻음"이란 기독교 교리대로 하면, 하나님은 사탄의 손에 잡히인 인간의 죄를 풀어낼 길이,  "인신제물"이란 방법 밖엔 없어서, 당신이 가장 혐오하신 그 인간제물 방식을 당신의 아들에게 적용, 십자가에서 가장 끔찍한  죽음으로 죽게 만든 것이 된다.  사탄이 하나님보다 더 막강한 존재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제물이나 사탄에게 바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정도의 허약한 하나님 - 그리고 예수를 향하여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 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하나님도 [기 창조된 자연법칙-당신이 정하신]을 거스릴 수 없어서, 아들을 죄의 제물로 바치는 것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길이 없으셨다 라고 설명한다.  수준이하의 설명이다.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거스릴 수 없으셨다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하며, 해를 저물지 말게 하라 했을 때, 그대로 해를 멈추게 - 자연법칙을 거슬러 - 하셨을 리 있겠는가.

 

또 기드온이 표적을 보여달라 했을 때 이슬젖는 양털을 양털만 안 젖게 또 양털만 안 젖게 하겠는가. 또 큰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를 소화의 법칙을 거스리고 도로 토해나오게 만드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거슬리지 못하신다면, 부활 역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거스릴 수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피의 제물로 인간구속용으로 죽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기독교식 설명은 그 자체로도 모순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여러분께는 이 주제가 관심없을 지 모른다. 아마 대부분 그러실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떤 분들에게는, 인간은 누구나 그 내면 깊숙이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저의 글의 끝이 어디로 갈 지 궁금들 해 하실 것이다.

 

그리고, 제가 이 주제를 꺼내든 이유 역시, 저 역시, 이 주제의 끝이 어디로 가는지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지금 첫 단서는 주셨으나, - 매번 그러하거니와 - 마지막의 귀결은 어떻게 끝이 되는지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러기에 글쓰는 필자로서는 더더욱 곤혹스러울 뿐이지만, 그러므로, 아무도 이 주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므로, - 이단이란 단죄 때문에 - 나는 해야할 소명을 느낀다. 주님께서 실마리만 주신다며는, 그 실이 풀려가는 대로 따라 가볼 것이다. 

 

흔히들은 말하길, 기독교 2천년 역사의 위력이 그 교리의 신뢰성을 입증한다라고 말한다. 헌데,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라고 하셨다. 그 논리대로 하면, 기독교 역사의 위력이란 고작 이틀짜리에 불과하다.

 

이단을 정죄할 때 가장 써먹는 삼위일체론 조차, 아는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320년경에 열린 공의회에는 콘스탄틴 주재로, 이위일체론 (아들과 성부가 하나라는)이 확정되었고, 확정되자 마자 삼위일체론을 부르짖던 승려들은 쫓겨나고 처형되었다.  그 다음 380년경 다시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자,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콘스탄틴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콘스탄틴 주도하에 그동안 이위일체론이라 고집하던 교리를 확 변경, 삼위일체론을 확립시켰다. 그리고서 그 동안 교권을 자리잡았던 이위일체론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다 이단으로 몰아 내쫓고 죽였다. 피비린내로 점철된 것이 교리론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달린 강도가 삼위일체론을 알았을 리 없으나, 예수님은 그를 낙원으로 안위하셨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는 글을 갖고, 이단 시비는 안하였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히 본 필자의 바램이다.

 

기독교에서는 메시야가 피의 대속물로 죽어야 하는 그 이유가 되는 근거를 이사야 53장라고 말한다.  이사야 53장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다면 유태교에서는 이 귀절을 어찌 보는 걸까. 이사야 53장은 따로 뚝 떨어진 예언이 아니라 앞편의 예언들이 연결되어진 것으로 본다. 49장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야곱, 예루살렘이 당할 고난에 대한 예언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고 53편 이후는 바로 그 예루살렘이 받을 장래의 영광을 노래한 것이다.

 

다음은 이사야 53장의 전후를 연결한 것이다.  여기서 야곱은 단수로, 그로, 때로는 예루살렘으로, 고난 받는 그라는 단수로 지칭됨을 알 수 있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내가 너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살을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여호와께서 죄없는 순수한 인간의 피가 있어야만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예수보혈" 도식은 이 말씀앞에 허물어진다. )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지혜롭게 행하리니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제자가 될 것이니

 

위의 이사야 49장부터 54장에 이르는 부분은 총체적으로 야곱이 그 땅에서 쫓김받고 가는 곳마다에서 학대와 멸시를 당한 끝에 버려졌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는 스토리를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 타민족에게 외면당했고 냉대 받았고 수욕으로 점철되었으나 그들은 잠잠하였고 그들은 그들의 땅에서 끊쳐졌으나 다시 회복되었다. 그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하여, 이사야 53장에 나온 단수형의 "그는"은 44장에 나온 야곱과 동일인이며 그러므로 53장의 "그는" 즉 야곱후손, 곧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이 유태 랍비들의 해석이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사44:21]

 

바울이 설명한, 예수 그리스도는 성문밖으로 끌려간 속죄양이라는 "피의 제물" 이론에 대해 랍비들의 반론, 모세오경에 나온 제사드리는 율례의 경우에서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죄를 지은 사람이 속죄용 제물을 가져왔을 경우, 그 제물은 "반드시" 유태인 제사장 또는 그 죄인의 손으로 죽임 당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인 로마군인의 손으로 죽임 당했다.

 

2. 속죄용 제물을 죽일 경우, 반드시 잘 드는 칼로 목을 관통시켜 출혈을 줄이고 죽음의 고통을 적게 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라는 전대미문의 가장 고통스럽고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형벌로 죽임 당하셨다.  

 

3. 바칠 제물은 아무 흠이 없어야 한다.

==> 사람이 성장하며 30세가 넘기까지 아무 흠이 몸에 안 생기기는 쉽지 않다.

 

4. 포유동물을 제물로 드릴 경우는 반드시 나이가 일년 미만이어야 한다.

==> 십자가 처형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나이가 33세이었다고 전한다.

 

5. 포유동물 제물은 반드시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 위가 있는 종류여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는 포유동물은 맞지만, 굽이 갈라졌거나 되새김 위가 있는 종류가 아니다.

 

6. 속죄 제물은 도살한 후, 반드시 "성전"에로 옮겨져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의 죽고 난 시신은 성전에로 옮겨지지 않았다.

 

7. 속죄제물은 반드시 제사장의 손으로 피를 받아 그 피를 제단에 뿌려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그대로 땅에 흘려졌다.  

 

8. 속죄제물은 반드시 소금에 절여져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은 그대로 아마포에 싸여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다.

 

랍비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위의 하나님께서 요구한 사항들 중 하나도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여호와께 드리는 희생제물은 결코 되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에서 하나도 가감하지 말 것을 명하셨고 또 "인간제물"이란 형태를 얼마나 가증히 여기시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4: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신12:32]

 

"너는 스스로 삼가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께서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들의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자기들의 자녀를 불살라 그들의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여호와께서 꺼리고 가증히 여기시는 일이 바로 그 자녀를 죽여 그 신에게 드리는 행위라고 이토록 구약성경은 단호하게 준엄하게  말씀하셨다.  모방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우리가 첫째 알아야 할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제물을 원하셨는가? 천만에다. 구약성경을 냉철히 읽어나가면, 절대로 진실로, 천만에, 천만에인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주장하는 인간제물, 예수의 십자가는 누구에게 드려진 제물인가? 하나님께? 사탄에게?

 

구약과 전혀 맞지 않는 도식이다. 더 말하자면, 바울이 주장하는 그런 제물행태는 곧, 그리스와 중근동에 퍼져 있던 인간제물의 도식을 그대로 빌어온 행태에 불과한 것이다.  전혀 구약적이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고 말씀으로 요구하신 행태가 절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율법이 요구한 -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  하나님의 제물 드리는 예법 및 절차에도 도무지 맞지 않는다. 

 

그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인간의 피가 필요했다는 것은, 그러므로, 구약과 토라에서 직접 하나님께서 그의 민족에게 밝히시고 요구하셨던 율법들에 대치되는 교리인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제물을 요구하는 류의 신이 아니시란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이 구약을 통해, 전체적으로 명료하게 드러남에도 바울은 이를 변조, 인간의 피가 있어야만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그런 신으로 격하시켰다.

 

기독교의 예수에 관하여 확립된 교리 - 바울이 확신하고 세운 - 가 그러하므로, 율법을 아는 유태민족들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율법시대에 쓰여졌을 시편저자[다윗]의 다음 귀절은,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이 "인간피"가 아니라 "통회"와 "순종"이란 것을 말하여 준다.

 

시편40:1, 6,8 :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편40:1,6,8]

 

시편의 위 귀절은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주의 법" 행하기를 원하신다라고 말씀하는 귀절이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다음과 같이 왜곡되면서 "인간제물"을 정당화한 귀절로 강조되었다.

 

히브리10: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10:5,6,10]

 

한글성경의 시편40:6에는 히브리원문에서 다음 귀절이 누락되었다. "나의 귀는 너[다윗]를 향해 열려있어서" 이것이 한글성경에서는 밋밋하게 "귀를 기울이사"로만 번역되었다.  구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인간을 향해 귀를 열어놓으신 하나님이다.

 

기독교가 전하는 하나님은 "예수의 피"를 통하지 않고는 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예수의 피"를 통하지 않고는 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처음부터 예수의 피가 있어야 했다. 아담 범죄 즉시로.

 

 "예수의 피"만 통하면, 모든 인간은 - 하는 행위야 어떠하든 - 구원받고 거룩한 "성도"로 된다는 것이 바울 교리의 핵심이다.

 

유태인들이 만난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향하여 언제나 귀를 열어 놓으신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야곱이 외롭게 혼자 돌을 베고 잘 때 그에게 찾아와주신 하나님은 친절하고 마음 여리신 하나님이시다.

 

반면, 기독교사도 바울이 설명한 하나님은 예수의 피가 아니고는 인간을 향해 귀를 닫는 교리에 꽉 막힌 하나님이다. 그리하여 바울 이후 신약저자들은 한결같이 강조하기를, 그러므로 "인간제물"이신 예수가 필요했다라고 가르쳐 왔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이단과 마녀사냥으로 괴롭히고 살인했다. 

 

삼위일체 교리 조차도, 예수 떠나시고 3백년이 지나서 일개 황제 콘스탄틴에 의해 그리된 것임에도 지금도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회에서 최상위 교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본 필자가 의문을 품는 것은 - 이단 정죄자들은 정당한 의문까지 이단시한다 - 사울왕도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타락한 사울왕과 또 다른  일단의 사람들도 성령을 받아 춤을 추고 방언하였다고 사무엘서에 나오는데, [ "그 후에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10:5,6,10]  어떻게 그 일개 성령이란 기운이 하나님과 동위란 것이냐 는 점이다. 

 

바울은 주와 합하면 하나라고 가르쳤는데,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주와 합하였으므로 그럼 하나님과 동위가 되는 것이냐는 의문도 가능하다. 이런 의문을 기독교는 불경죄라고 말하며 침묵시킨다. 그러면서 성령받은 사람들이 이후 타락하고 범죄하면, 그 때 받았던 성령이 가짜거나 또는 그래도 그 사람은 구원받는다고 고집부린다. 그 모든 것이 구약과는 안 맞는 이질적 하나님 상인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불연속성을 갖고 바울과 기독교인들은 그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율법은 폐해지고 [새계명]으로 되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는 새 계명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 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인용: 렘31:31이하) 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8장]

 

이 "새 언약"귀절에서 빌려다 쓴 구약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3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  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3131-36]

 

위 귀절은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에 관해 하신 예언이며, 이 "마지막 때"란 이스라엘 자손이 뿔뿔이 흩어졌던 땅에서 본토로 돌아온 후가 되는 때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24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 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에 함께 살리니 ....2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 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31:23-28]

 

유태교에서 묻는 질문은,

 

유태민족이 이스라엘땅에서 쫓겨나고 뿔뿔이 전 세계로 흩어져 죽음과 치욕을 당하게 된 일(디아스포라)이, 과연 기독교도들의 주장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죄 때문이라면, 그들(유태민족)이 예수를 영접하거나 그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본토로) 돌아오는 일이 가능헀겠냐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위의 귀절은 - 다른 구약성경 귀절들도 -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다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하신 말씀이다. 즉, (유태민족들이) 뽑히는 것과 다시 심기는 것 사이에는 - 이 귀절로 볼 때 - 하나님의 결정하신 때 외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전단계의 회개 같은 요구가 없다. .  

 

로마군대가 유태국을 실질적으로 점령한 일은 BC63년의 일이었다.  예수를 죽인 죄로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다고 말하는 AD70년은 성전파괴가 있은 해다.  BC63년 - 예수 나기 60년전 - 에 하시몬왕조의 형과 아우를 각기 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치열한 내전으로 로마의 동방군 대장 폼페이를 불러들이면서 로마는 유태를 점령했으며 폼페이는 당시 지성소 안까지 들어갔다고 알려진다. [관련글: 예수님의 포위에 관한 예언 ] 그 때부터 유태인들은 이미 세계로 흩어져 나갔다.

 

사도 바울이 지중해변을 따라 설교하던 곳들은 바로 그 디아스포라한 유태인들, 바리새인들이 지중해변에 세운 회당들이었다.  성경을 연구하던 바리새인들과 랍비들이 다른 진리도 알기 위해 바울과 같은 설교자들을 초청하고 귀를 열어 들은 증거가 바로 사도행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곧 유태란 나라가 예수를 죽인 죄 때문에 로마에게 점령당하고 멸망했다는 것은 역사적 순서로 볼 때 전후가 맞지 않는다. 

 

히브리서에서 "새 계명"이라며 인용하였던 예레미야 31장의 해당원문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1. 이스라엘이 본토에서 뿌리 뽑히고 무너지며 온 세계로 흩어져 나갈 것. 그리고 다시 되돌아 올 일.  

 

2.  (이스라엘이 본토로 돌아와 농부와 목자가 함께 그 곳에 살게 될 때), 새 계약이 되어질 것. 여기서 계약은 베릿, 두명의 양측이 동의하여 맺어지는 계약이며 이 새 계약은 구 계약의 조건이 보완된 계약을 말함이다. 신약성경이 말하듯, 과거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계약하는 것이 아니다.

 

3. 그 새로 맺는 계약의 주체자는 하나님이시고 상대는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온) 이스라엘과 유다. ==> 이방기독교도가 아님.

 

4. (그 날에는- 이스라엘이 본토에 다시 살게되고 하나님과 새 계약을 맺은 후에는 )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게 된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주를 알라"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이미 다들 "주님"이 누구신지 알기 때문이다.

 

5. (그 날에는 - 이스라엘이 돌아오고 새 언약을 맺을 때에는) 그들의 악행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든지,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든지,속죄제물이 있어야 한다든지 하는 선행조건은 붙지 않는다. 무조건의 용서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고 새 언약을 맺게 하시리란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무조건적 용서와 사랑으로 이스라엘민족을 고토에 불러 들여 모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대하고 있다.

 

6. 그 새 법은 그들(이스라엘)의 마음에 기록된다. 기록되므로 아무도 "주님"에 관해 가르칠 필요도 가르치지도 않는다.

 

7. "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렘31:36]  

 

즉, 이스라엘이 이천년만에 다시 나라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세운 새계약은 실재로 효력이 있는 계약임이 증명되었고 예레미야의 예언은 사실로 실현된 예언이 되었다.

 

예레미야가 말한 "새계약"의 내용은 위에 보듯,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앞으로 되어질 일에 관한 것임에도, 히브리서의 저자와 바울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과거의 율법은 폐해지고 새 계명이 도래했으므로 율법이나 절기나 족보(이스라엘인들의 족보)는 필요치 않다라고 가르쳤다. (** 이스라엘인의 족보는 DNA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족보를 이천년간 어느 곳을 헤맬 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했다.)

 

바울은 과거의 것이 폐해졌고 새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시작되었으며 이것이야말로 몽환선생 즉 율법에서 해방된 법이므로 율법에로 되돌아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되돌아가면 율법의 저주아래 갇힌다라고 협박한다.  이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면 완성되는 것이다 라고 가르친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헌데, 율법에는 남을 사랑하는 것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고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훨씬 큰 뜻이 들어있다. 아니 더 중대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민족, 국가란 뜻이 들어있다.

 

또 히브리8장이 설명한 새계명에는,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자손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으로 된다.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히8:9]

 

비교해보면 히브리서는 예레미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절묘하게 왜곡했다.

 

"내(하나님)가 그들(이스라엘, 유태)의 남편이 되었어도" 가 히브리서신에서는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라고 왜곡되었다. 이스라엘민족을 하나님에게서 버려진 민족으로 단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지 않고 버리셨으므로, 이 후 예수 그리스도로 된 "새 계명"을 마음에 심기만 하면 그 사람은 구분없이 성경이 말한 이스라엘이고 시온이라고 바울과 기독교는 이천년간 사람들에게 말하고 가르쳐 온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명확하시다.

 

이스라엘이 없어지면 하나님의 법도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안 사라지고 다시 모여 국가를 이루었으니 그 법은 안 사라지고 실효한 것이다. 이 중대성을 교회는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성경의 어느 자도 틀림없다고 주장해온 바로 그 히브리서가 틀려지고 바울의 가르침이 틀려졌다는 것이 이제는 드러난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에베소2:14,15]  

 

에베소에서 바울이 예수를 빙자하여 법조문의 계명, 율법을 폐하셨다라고 선언하였는데, 바로 그 율법, 계명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금도 떠받드는 유태민족이 온 세계 역사 앞에 전면으로 등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폐기되어야한다. 그리고 유태교 랍비들의 이천년간 목숨을 짓이겨져가며, 개종에의 위협을 받아가며, 죽음 앞에서도 하셈을 찬양하며 율법을 지켜온 그 사람들의 말에 이제는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들에게야말로 더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이 말한 새계명은 위 예레미야31장에서 보듯,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스라엘이 본토에 돌아오고 심겨진  뒤에 일어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주님을 알으라 고 전할 필요도 없이 체결될 그 때의 계명이다. 그러므로 아직 성사되지 않았다. 즉, 구약 예레미야의 새 계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천지개벽적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가 하나님과 이방인간의 새계약이란 바울의 가르침은 구약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새계약은 "예수 믿으세요."라고 선교하고 다닐 필요도 없는 그런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빌어 확실하게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는 유태인들이 여기저기 선교하고 다니면서 "예수 믿음"이야말로 그 "새 계명"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회의 말을 받아들일 리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   

 

2010.12.19.파아란 한은경.

 

유태인들이 예수를 거부하는 이유 4

유태 랍비들이 보는 예수 족보, 마태/누가의

 - 유태교가 예수를 메시야 아닌 근거로 보는 예언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보가 두 차례 나온다. 하나는 마태가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에 의한 것이다.  마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가계도이며 누가의 그것은 밑에서 위로 올라갔다.

 

일설에는 마태의 가계도와 누가의 예수 가계도가 서로 다른 것에 대해, 마태의 그것은 아버지 요셉의 것이고 누가의 것은 어머니 마리아의 것이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녀잉태되었으므로 사실상 요셉의 가계도는 의미가 없다고 볼 것이, 마리아의 혈육만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양 가계도를 같이 검토하고 어째서 유태교 랍비들이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지 설명드리겠다.

 

그리고 이런 유태교에서 보는 입장을 개진하는 이유는, 일부 몰상식한 기독교에 의해 유태민족과 유태교가 마치 저주받은 족속이어서 예수를 거부했다고 하는 주장들이 기실은 얼마나 비성경적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과 상관없이, 인간적 잣대로만 갖다대는 성급한 결론인지,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하는 측면에서다.

 

진실로, 만약, 신약성경들이 실제로 성경학자들이 설명하듯,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와 전후하여 기록되기 시작한 것들이라면, 그 편편이 흐르는 지독한 유태인 혐오증적 문구들로 인해, 초기 기독교의 도덕성은 여지없이 허물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든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자르지 않으시는 착하신 하나님이다.

 

그 심정을 본받지는 못할 망정, 지구상에서 가장 잔인한 국가에 속하는 로마에게 온 민족이 뿔뿔이 짓밟히고 모조리 참수되고 십자가형으로 죽고 노예로 팔려가는 지옥 속에 던져지던 유태인들을 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는 커녕, 그것을 빙자, 그 이유가 예수를 죽인 데 있다는 식으로 고소해하는, 유태인들이 독사의 자식이고 살인자의 자손이고 거짓말장이의 후손이라는 단정으로 일관하는 복음서와 서신들이 바로 그 동시대에 나왔다는 자체가 기독교의 능멸이며 수치라고 생각한다.

 

예루살렘과 유태인들이 뿌리째 뽑히던 주후 70년 이후 복음서들이 쏟아져 나왔다면, 게다가 그 내용들에서 그 유태인들을 독사의 자식이니, 아비가 살인자니, 거짓말장이의 후손이니 처음부터 마치 예수를 죽이려 획책하는 유태인들이었던 듯이, 유태민족들 전체를 싸잡아 비난에 비난을 행간마다 삽입한 것이 기독교 복음이고 서신들이면, 그것이 이천년 내려왔다면, 신약성경을 읽은 후 그것이 구약과 맞지 않음에 이상해한다거나, 아니면 신약성경에 심취하면 할 수록 반유태 반이스라엘적 가치관을 갖게 되는 이 모든 현상은 매우 오래도록 사탄이 그 하나님의 민족을 지구상에서 도말하려한 그 계략의 일환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 글을 읽는 분들마다 유태교가 예수를 거부하는 이유가 과연 비성경적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에 근거한 타당한 이유가 있음인지 합리적으로 판단하시기 바란다.

 

마태에 나온 예수 족보는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다말)-베레스-헤스론-람-아미나답-나손-살몬(라합)- 보아스(룻)-오벳-이새-다윗왕(우리야의 아내)
-솔로몬-르호보암-아비야-아사-여호사밧-요람-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동명:여호야김;바벨론포로) -여고냐(동명:여호야긴)
-스알디엘-스룹바벨-아비훗-엘리아김-아소르-사독-아킴-엘리웃-엘르아살-맛단-야곱-마리아의 남편 요셉-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누가에 나온 예수 족보는 다음이다.

 

예수-요셉-헬리-맛닷-레위-멜기-안나-요셉-맛다디아-아모스-나훔-에슬리-낙개-마앗
-맛다디아-서머인-요섹-요다-요아난-레사-스룹바벨-스알디엘-네리-멜기-앗디-고삼-엘마담-에르
-예수-엘리에서-요림-맛닷-레위-시므온-유다-요셉-요남-엘리아김-멜레아-멘나-맛다다-나단-
-다윗-이새-오벳-보아스-살몬-나손-아미나답-아니-헤스론-베레스-유다-야곱-이삭-아브라함

 

바울은 이런 글을 남겼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1:4]

 

바울이 마태와 누가가 열거한 "끝없는 족보를 만약 디모데전서를 쓰기 전 보았더면, 위와 같은 귀절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 바울은 "끝없는 족보"를 경멸하는 글을 남겼을까?

 

디모데전서는 바울 전도말기 주후 약62-67년 경 쓰였다고 추정한다. 누가는 80-90년 사이 쓰여졌다. 마태복음도 예루살렘 함락이 이루어진 후인 주후70년 이후에 쓰였다고 성경학자들은 본다.

 

즉, 바울로서는 유태교 랍비들의 "끝없는 메시야 족보" 타령에 역겨웠던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의 서신에다 신자들에게 유태인의 "끝없는 족보" 타령에 오염되지 말도록 요구하는 글을 남겼지만, 바울 사후, 마태와 누가는 족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그래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쓰며 비로소 예수님의 족보를 찾아, 그 때까지도 마가에는 없던 족보를 넣었을 것이고, 이는, 창세기로부터 민수기, 열왕기와 역대기 등 구약성경에 거듭 거듭 등장하는 유태인들의 족보에 맞서기 위함이라는 목적이 클 것이다.

 

메시야 예언의 가장 중요한 하나는 족보다. 그것의 첫번째는 다윗 계보라는 예언이다.

 

"슬프다 그 날이여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이 없으리라 그 날은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그러나 그가 환난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1)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예레미야30:7-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집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사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렘33:17]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셀라)"[시편89:34-37]

 

그리하여 마태와 누가복음의 두 각기 다른 예수님의 가계도는 다윗을 공통으로 포함시켰다. 그런데 다윗 이후부터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렇다면, 일차, 예수 그리스도의 혈과 육이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물려받았으므로 마리아의 가계도라 하는 누가복음의 것을 친다면 어찌할까.

 

그에 대해 유태교는 이렇게 말한다. 유태민족은 모계를 잇지 않는다라고.

 

어디서 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으나 한국 기독교는 유태인들이 모계를 잇는다고 흔히 말한다. 그것이 틀리다, 유태사회는 부계사회라는 것을 유태교 랍비들은 공언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 요셉에로 예수 입양설도 있지만, 그것 역시 성경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다윗의 씨, 즉 핏줄에 의한 가계와는 상관없게 된다.

 

그러므로 유태교에서 인정하는 메시야는 철저히 다윗의 계보에서 남자가 혈통을 이은 바로 그 후손이어야 하고 예수 메시야는 거기 맞지 않는다는 것이 정론이 되므로, 누가복음의 마리아 계보에 의한 메시야론은 자동적으로 탈락이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민수기1:2] 랍비들의 지적이 맞음을 보여주는, 유태인들은 남자 계보에 의한 혈통이어야 함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도 마리아에 의한 계보는 탈락되어야 한다.  

 

"둘째 달 첫째 날에 온 회중을 모으니 그들이 각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인 남자의 이름을 자기 계통별로 신고하매" [민수기1:18] 

 

그 다음 더 중요한 예언이 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원한 왕위 혈통과 함께 하나님이 거부하신 혈통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예레미야서의 다윗의 자녀에게 그 왕위를 영원히 견고히 하시겠다는 말씀 전에 나온다.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하고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렘22:24,28-30]

 

고니야는 바벨론으로 8살에 끌려가고 37년간 감옥에 있은 여호야긴 또는 여고니야를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거명하여, 여고니야를 천하고 깨진 그릇이므로  그의 자손 중에는 다윗 왕위에 앉을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 이름이 마태복음의 - 누가복음 가계보는 (모계라는 점 때문에) 탈락되었다 - 가계도에 - "여고냐"로 - 버젓이 올라있다.

 

마태가 기술한 대로, 여고니야가 정말 예수님의 족보에 있는 조상이라면, 예수는 그 여고냐 계보라서 메시야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저주에 해당하게 된다.

 

마태가 정말 예수의 족보를 조사하여 기록한 것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교회는 일단 마태복음의 족보 건에 대하여는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경은 한점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영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려면, 최소한 예레미야 예언과는 맞아야 한다.

 

마태가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인정하게 들면, 신약성경 전체의 신뢰도를 다시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랍비 주장에 복음주의 교회는 학개2:23을 들어 여고냐의 아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에게 하나님이 왕위를 주실 것처럼 하신 말씀을 들어서 예레미야22장의 여고냐에 대한 저주는 무효다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랍비는 답한다. 학개2:23에는 하나님의 맹세가 없으나,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예레미야 22장의 여고니야에게 하신 저주의 예언에는 하나님의 맹세가 앞서 붙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렘22:24]

 

여호와 하나님이 맹세코, 메시야 가문에서 여고니야, 혹은 여고냐의 혈족은 제외시키겠다고 단언하셨는데 마태의 예수님 가계보는 여고냐를 포함시켰다. (마태의) 오류이겠는가. 아님 진실이겠는가. 어느 쪽이든, 교회는 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랍비의 - 예수 가계에 대한 - 구약성경적 메시야 입장에 대한 결론은 이것이다.

 

첫째, 처녀 몸에서 탄생한 것이면, 그 사실만으로 (유태인의 메시야로는) 자동 실격이다. 이유는 다윗을 부계로 한 핏줄에서여야 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마태복음의 가계가 사실대로라면, 그것만으로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고냐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에 걸리기 때문이다.

 

세번째, 누가복음의 가계대로라면, 그래도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다. 누가는 여고니야의 저주를 피할 복선으로, 다윗의 아들들 중, 솔로몬 아닌 나단의 핏줄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왕상9:1,2,5]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명령 - 맹세까지 하신 - 에 근거하여 예수를 메시야 아니라고 거부하는데 누가 유태민족에게 - 예수를 주로 안 받아들인다고 -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런 짓이야말로 성경을 공부 안한 무식한 소치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아닌 일개 천사의 하찮은 말인양 - 사도 바울 처럼 - 여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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