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빈의 종교 개혁 신학의 이신칭의 교리 재 검토
들어가는 말
마틴 루터의 로마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고 종교개혁은 개신교를 탄생시켜 여러 로마 카톨릭의 비 성경적이고 혼합주의적 관례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로마서나 바울 신학에 대한 또 다른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여 루터의 관점을 수정하고자 한다. 루터의 새 관점이 당대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 입장에 대한 도전이었고 당대 유럽 기독교권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였다면, 오늘날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루터의 그것에 비하면 약소하긴 해도 신약학계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적지 않은 찬반의 글들이 발표되어 바울 신학 특히 이신칭의 교리와 연관하여 많은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연구가 되어졌고 따라서 여러 면에서 바울신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지고 다듬어 지도록 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그 가설 자체의 신빙성의 문제를 떠나 신약학계는 물론이고 신학 전반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신학계에서 여러 비판을 초래했지만 비판들을 통해서 새 관점의 이론들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보다 생존 가능한 모양으로 변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구약학계의 전반적인 경향과 달리 구약이나 신약 자체에만 강조를 두는 일을 멀리하고 구약은 신약의 견지에서, 신약은 구약의 견지에서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해 마지 않는데, 여기서 루터나 칼빈의 이신칭의론을 나름대로 새롭게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자들이 제기한 이신칭의와 연관된 이슈들 중 몇 가지를 골라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바울에 대한 새 관점
그 역사 개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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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루터와 칼빈의 이신칭의론 재 검토
루터의 바울 해석은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를 산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제기한 루터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필자는 루터의 바울 해석 중에서 몇 가지를 나름대로 고찰하고자 한다. 필자는 새 관점 학파 학자들에 상당한 동정적 사고를 갖는데, 특히 토마스 롸잇의 사고에 동정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도 바울 사상을 구약에 비추어 이해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 신학의 핵심을 말하라면, 구속사적 종말론이라고 부르겠다. 롸잇은 이런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필자와 유사한 사고를 가진 것을 여러 곳에서 발견하였다. 또한 구약의 견지에서 보자면, 율법이나 율법 준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다만 전통적인 개신교 입장에서 "율법의 행위들"이란 표현을 율법 준수를 통한 구원 획득이란 율법주의를 의미한다고 이해함으로, 율법이나 율법 준수를 부정적으로 판단하게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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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의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고자 갈구했었다. 그런데 딱 하나의 표현이 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라는 표현인데, 나는 그 표현이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의한 자를 처벌하실 때 공의롭게 다루신다는 의미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내 형편을 말하자면, 나는 비록 사람들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수도사였지만,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고통을 받고 있던 죄인이었다. 나는 내 공적으로 그를 기쁘시게 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의롭고 진노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를 미워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바울 서신들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가 의미한 바가 무엇일까 궁금해 하며 이해하고자 애를 썼다. 밤낮으로 나는 묵상하였는데 하나님의 공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진술 사이의 관계를 보기까지 묵상했다 (롬 1:17). 그러다가 나는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로, 순전한 긍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그 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거듭난 것을 느꼈다. 나는 낙원의 열린 문을 통해 낙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전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를 증오심으로 채웠지만, 이제 그것이 내게 더할 나위없는 달콤함으로 다가왔다. 이 바울의 구절은 내게 천국 문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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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율법의 행위들
종교개혁 이래 개신교는 바울 사도께서 논박하는 "율법의 행위들에 의한 의"를 당대 유대교의 "율법주의"라 이해했다. 그런데 샌더스는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라고 결론 지었다. 그렇지만, 바울 당대 유대교는 다양한 사고와 그룹들이 있어 하나의 통일된 유대교 신학을 말하기 어렵다고 봄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오늘날처럼 발달된 통신 수단이 전무했던 그 당대에 유대교의 종말론이나 언약, 선택, 율법 준수 등에 관한 사상들은 다양했을 것이 얼마든지 예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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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교개혁 신학의 이신칭의(以信稱義) 중심 사고 재 검토
알리스터 맥그랫은 지적하길 "아마도 루터의 성숙한 칭의론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그가 그것의 신학적 중심성에 두는 강조일 것이다; 칭의 사고를 복음의 말씀으로 간주하고 다른 모든 것은 다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한 자는 누구보다도 루터였다"고 했다. 루터는 "이 조항이 서기 때문에 교회가 서고, 무너지기 때문에 교회가 무너진다"고 했다 (quia isto articulo stante stat Ecclesia, ruente ruit Ecclesia, WA 40/3.352.3). 17세기 개혁파 신학자 요하난 하인리히 알스텟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칭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칭의 교리는 교회의 서는 것과 무너지는 것의 교리"라 했다. 18세기 루터파 신학자 발렌틴 뢰셔도 "칭의 교리는 그것으로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그런 교리"라 (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했다.
루터 이래 종교개혁 신학은 이신칭의 사고를 바울신학만 아니라 모든 성경의 중심적 사고로 간주하고 모든 성경을 그 교리로 판단해 왔던 종교 개혁 신학 전통은 이제 더 이상 견지되기 어렵다. 우리는 대신 "구속사적 종말론"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간주한다. 우리는 바울 신학을 포함하여 신약의 모든 저작들의 근본 사고를 "구속사적 종말론"으로 압축시킬 수 있다고 이해한다. 이신칭의 교리는 그 구속사적 종말론 가운데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구속사적"이란 말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시작하신 그 구원의 역사 곧 구약에 기록된 구원 역사를 지시하고, "종말론"이란 그 구원사가 구약에서 약속과 예언의 형태로 제시되었다면,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약속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심으로 약속 예언들이 성취되는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제시함으로, 신약 시대 전체를 종말 시대로 언급함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자기들의 시대가 끝나면 이제 인류의 마지막 시대가 오리라고 기대함으로 인류의 역사를 자기들의 시대와 자기들이 사는 날들의 끝 이후에 전개될 마지막 시대로 구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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