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종교개혁 이신칭의 교리 재 검토

중일사랑 2017. 2. 6. 17:33

루터와 칼빈의 종교 개혁 신학의 이신칭의 교리 재 검토


들어가는 말

마틴 루터의 로마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고 종교개혁은 개신교를 탄생시켜 여러 로마 카톨릭의 비 성경적이고 혼합주의적 관례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로마서나 바울 신학에 대한 또 다른 새로운 관점이 등장하여 루터의 관점을 수정하고자 한다. 루터의 새 관점이 당대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 입장에 대한 도전이었고 당대 유럽 기독교권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였다면, 오늘날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루터의 그것에 비하면 약소하긴 해도 신약학계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적지 않은 찬반의 글들이 발표되어 바울 신학 특히 이신칭의 교리와 연관하여 많은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연구가 되어졌고 따라서 여러 면에서 바울신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지고 다듬어 지도록 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그 가설 자체의 신빙성의 문제를 떠나 신약학계는 물론이고 신학 전반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신학계에서 여러 비판을 초래했지만 비판들을 통해서 새 관점의 이론들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보다 생존 가능한 모양으로 변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구약학계의 전반적인 경향과 달리 구약이나 신약 자체에만 강조를 두는 일을 멀리하고 구약은 신약의 견지에서, 신약은 구약의 견지에서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해 마지 않는데, 여기서 루터나 칼빈의 이신칭의론을 나름대로 새롭게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자들이 제기한 이신칭의와 연관된 이슈들 중 몇 가지를 골라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바울에 대한 새 관점

그 역사 개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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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루터와 칼빈의 이신칭의론 재 검토 

루터의 바울 해석은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를 산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제기한 루터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필자는 루터의 바울 해석 중에서 몇 가지를 나름대로 고찰하고자 한다. 필자는 새 관점 학파 학자들에 상당한 동정적 사고를 갖는데, 특히 토마스 롸잇의 사고에 동정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도 바울 사상을 구약에 비추어 이해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 신학의 핵심을 말하라면, 구속사적 종말론이라고 부르겠다. 롸잇은 이런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필자와 유사한 사고를 가진 것을 여러 곳에서 발견하였다. 또한 구약의 견지에서 보자면, 율법이나 율법 준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다만 전통적인 개신교 입장에서 "율법의 행위들"이란 표현을 율법 준수를 통한 구원 획득이란 율법주의를 의미한다고 이해함으로, 율법이나 율법 준수를 부정적으로 판단하게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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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의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고자 갈구했었다. 그런데 딱 하나의 표현이 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라는 표현인데, 나는 그 표현이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의한 자를 처벌하실 때 공의롭게 다루신다는 의미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내 형편을 말하자면, 나는 비록 사람들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수도사였지만,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고통을 받고 있던 죄인이었다. 나는 내 공적으로 그를 기쁘시게 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의롭고 진노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를 미워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바울 서신들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가 의미한 바가 무엇일까 궁금해 하며 이해하고자 애를 썼다. 밤낮으로 나는 묵상하였는데 하나님의 공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진술 사이의 관계를 보기까지 묵상했다 (롬 1:17). 그러다가 나는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로, 순전한 긍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그 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거듭난 것을 느꼈다. 나는 낙원의 열린 문을 통해 낙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전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를 증오심으로 채웠지만, 이제 그것이 내게 더할 나위없는 달콤함으로 다가왔다. 이 바울의 구절은 내게 천국 문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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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율법의 행위들

종교개혁 이래 개신교는 바울 사도께서 논박하는 "율법의 행위들에 의한 의"를 당대 유대교의 "율법주의"라 이해했다. 그런데 샌더스는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라고 결론 지었다. 그렇지만, 바울 당대 유대교는 다양한 사고와 그룹들이 있어 하나의 통일된 유대교 신학을 말하기 어렵다고 봄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오늘날처럼 발달된 통신 수단이 전무했던 그 당대에 유대교의 종말론이나 언약, 선택, 율법 준수 등에 관한 사상들은 다양했을 것이 얼마든지 예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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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칼빈의 이신칭의 론에서 (以信稱義) "전가" 사고 재 검토
사 61:10, 렘 23:6, 33:16 등에서 하나님 자신이 친히 우리의 의가 되실 것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야웨의 고난당하는 종은 많은 사람을 의롭게 만들 것이라고 예고되었다 (사 53:11). 이제 그 야웨의 종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속적 죽음을 죽으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는 자들이 의롭게 되는가?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죄인에게 전가되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분과 연합해서 그분의 의가 믿는 성도의 것이 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둘 다 성경적 사실인가? 
16-17세기 종교 개혁 전통에서 (칼빈의 개혁파나 루터파) 이신칭의론에 대한 광의적 공감대는 칭의를 성도가 성례를 통한 은혜의 주입에 의해 "의롭게 만들어지는" (facere iustum) 과정으로 이해했던 중세 로마 카톨릭 칭의론을 논박하는 가운데 정립되었다. 카톨릭 사고에 대조적으로 개혁파는 칭의란 무엇보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성도가 법적으로 무죄하다는 선고를 받는 일이라고 보았다.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함으로 (iustificatio impii),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하여 그를 의롭다고 자신에게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믿는 성도들에게 은혜로만 전가되고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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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교개혁 신학의 이신칭의(以信稱義)  중심 사고 재 검토

알리스터 맥그랫은 지적하길 "아마도 루터의 성숙한 칭의론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그가 그것의 신학적 중심성에 두는 강조일 것이다; 칭의 사고를 복음의 말씀으로 간주하고 다른 모든 것은 다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한 자는 누구보다도 루터였다"고 했다. 루터는 "이 조항이 서기 때문에 교회가 서고, 무너지기 때문에 교회가 무너진다"고 했다 (quia isto articulo stante stat Ecclesia, ruente ruit Ecclesia, WA 40/3.352.3). 17세기 개혁파 신학자 요하난 하인리히 알스텟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칭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칭의 교리는 교회의 서는 것과 무너지는 것의 교리"라 했다. 18세기 루터파 신학자 발렌틴 뢰셔도 "칭의 교리는 그것으로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그런 교리"라 (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했다.

루터 이래 종교개혁 신학은 이신칭의 사고를 바울신학만 아니라 모든 성경의 중심적 사고로  간주하고 모든 성경을 그 교리로 판단해 왔던 종교 개혁 신학 전통은 이제 더 이상 견지되기 어렵다. 우리는 대신 "구속사적 종말론"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간주한다. 우리는 바울 신학을 포함하여 신약의 모든 저작들의 근본 사고를 "구속사적 종말론"으로 압축시킬 수 있다고 이해한다. 이신칭의 교리는 그 구속사적 종말론 가운데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구속사적"이란 말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시작하신 그 구원의 역사 곧 구약에 기록된 구원 역사를 지시하고, "종말론"이란 그 구원사가 구약에서 약속과 예언의 형태로 제시되었다면,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약속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심으로 약속 예언들이 성취되는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제시함으로, 신약 시대 전체를 종말 시대로 언급함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자기들의 시대가 끝나면 이제 인류의 마지막 시대가 오리라고 기대함으로 인류의 역사를 자기들의 시대와 자기들이 사는 날들의 끝 이후에 전개될 마지막 시대로 구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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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신칭의 교리와 최후 심판과의 관계 재 검토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의 중심 교리로서 교회가 서느냐? 무너지느냐?의 조항으로 (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간주된 이신칭의 개념은 여러 비판에 노출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심각하게 인정해야 할 비판은 사람이 자기 행위와 무관하게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심판 때에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바울 사도는 롬 8:13, 14:10–12, 고전 3:10–15, 고후 5:10, 9:6, 11:15, 갈 6:7–8, 골 3:25, 엡 2:10, 6:8, 딤전 5:24–25, 딤후 4:14 등에서 행위 심판을 언급했고, 바울 외의 저작들에서는 마 12:36–37, 16:27, 25:31–46, 요 5:28–29, 약 2:14–26, 계 20:11–15 등에서 행위 심판을 말씀한다. 지금까지 여러 학자들이 이신칭의와 마지막 행위 심판 사이의 긴장 문제를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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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론 
신학이란 각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성경을 자기 시대적 상황에서 새롭게 조망함으로 각 시대마다 새롭게 발전시켜야 할 과제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물려 받은 귀한 신앙 선조들의 신학 사상들이나 신앙 실천 항목들을 버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물려 받은 좋은 신앙 유산들을 완전한 것인 양 떠 받들어 우상화 시키거나 미이라로 만들지 말고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받은 전승을 성경과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새롭게 다듬고 발전시켜 나가자는 것이겠다. 
그런 의미에서 개신교 전통에서 핵심 교리로 자타가 인정하는 이신칭의 교리 역시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루터나 칼빈이 자기 당대의 상황에서 행위 구원론을 주창하고 있던 로마 카톨릭과의 힘든 싸움에서 정립시켰던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는 분명 성경적 교리이긴 하나, 그 세부 사항에서는 성경적으로 새롭게 다듬을 부분들도 적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롬 1:17의 하나님의 의나 신약에서 8번 언급된 "율법의 행위들"이란 표현,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에서 나는 의가 성도들에게 전가된다는 사고, 이신칭의 사고를 기준으로 모든 성경의 진위 여부를 판단한 자세, 끝으로 이신칭의와 최후 심판 사이의 관계 등을 새롭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였다. "하나님의 의"란 표현의 경우 새 관점 학파의 토마스 롸잇이 제기한 구약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로마서의 문맥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리는 바울 사고의 핵심 사고가 구속사적 종말론이라 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들이란 표현의 경우에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그렇게 열성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확신했던 유대교의 교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반드시 깨뜨려야 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 제안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사고는 칼빈의 경우 능동적 순종에서 나는 의와 수동적 순종에서 나는 의로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전체 순종이 산출한 의가 우리 죄인을 의롭게 한다고 보았고,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분의 의나 부요가 모두 성도들의 것이 되고 성도들의 죄는 그의 것으로 전가된다고 했다. 능동적 순종이나 수동적 순종에서 나는 의의 전가 사고는 신약적으로 뒷받침 되기 어렵다고 본다. 전가 개념 보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고가 성경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종교 개혁자들이나 일정 부분 후대 신학자들이 이신칭의 교리를 바울 사상의 핵심이자 중심이라 보는 견해는 적절치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들을 통해 주셨던 이스라엘의 회복 약속과 열방의 구원 참여 약속을 그리스도께서 때가 차매 인간으로 오시어 성취하셨다는 구속사적 종말론이 바울 신학의 중심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신칭의는 성도들의 삶에서 율법과 무관하게 오직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의롭게 된다고 강조함으로 율법과 무관한 자유 방임의 삶을 영위하도록 만들 위험이 다분히 많다. 그런데 성경은 최후 심판 때에 성도들이 분명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하였다. 그래서 혹자는 성도들도 최후 심판 때에 비로소 행위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신 하나님의 칭의 선언을 받으리라고 이른바 유보 칭의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는 성령님의 감화 가운데 철저한 회개를 이룸으로 최후 심판의 행위 심판은 이미 면제 받는다는 것이 성경적인 사고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 근본 전제는 성도들은 믿은 이후에 분명 믿음에서 나는 열매들로 자신이 거듭난 성도임을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이런 글이 과연 선교지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필자는 중동 지역의 한 선교사와 대화하는 가운데 "선교사도 결국 선교지에서 목회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크게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었다. 무엇으로 선교지에서 목회 하겠는가? 인류학, 선교 이론들 등 선교학 과목들이 선교지에서 목회하는 데 얼마나 유용할까? 결국 선교사도 처한 문화적 상황이나 지리적 정치적 자리는 달라도 결국 목회자라고 볼 때 혹은 신학 교수라고 할 때, 성경을 가지고 목회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논의는 선교지에서도 의미가 반드시 있다고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