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those who are merciful!

중일사랑 2019. 2. 2. 21:32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 (마 5:7)


1. 주님이 말씀하는 긍휼은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전달함을 의미한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을 따라서 불자들은 자비를 베풀고 공덕을 쌓아야 한다. 어질고 자애로운 공자님을 따라서 유생들은 인의예지를 행하고 인을 (仁) 특별히 베풀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도 긍휼 곧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신다.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나 이 면에서는 같다. 그런데 과연 같은가? 그렇지 않다. 

주님이 말씀하는 긍휼/ 자비는 (ἐλεήμων 엘레몬; 히, 라하마님, 라하밈) 타락한 인간이 (불자나 유생이나 무론하고) 절대로 베풀 수 있는 그런 자비나 긍휼이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인 그 긍휼/ 자비/ 인자하심을 말씀한다. 

기독교와 기타 종교들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이렇다. 기독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우리 성도들이 타인에게 전달하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심부름꾼으로 혹 청지기로서 주인의 (하나님) 것을 받아서 베푸는 자들이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성도는 벌써 성도가 아니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기독교에서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죽어야 성도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만약 이 명제를 인정할 수가 없다면, 혹은 이해할 수 없다면 그는 기독인이 (그리스도인; 기독은 한문에서 기리사독 [基利斯督 '그리스도'의 음역] 준말) 아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님으로 거듭 태어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내 안에 오셔서 사신다. 내 생명도 내 시간도 내 물질도 내 것이란 없다. 이전의 헬라 시대나 로마 시대 노비가 자기 소유물이 없었듯, 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내 소유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무슨 긍휼을 내가 타인에게 베풀겠는가? 내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먼저 긍휼을 받아서 베풀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 진리가 여타 종교의 진리와 차이를 보이는 실상이다. 내 것으로 베풀지 않는다. 만약 내 것을 베푼다고 판단하고 베푼다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과 무관하고 예수님과 무관한 헛된 구제 헛된 긍휼에 불과하다. 


2. 긍휼은 내가 먼저 하나님께 받아야 바른 긍휼을 베풀 수 있다. 

방금 우리가 언급했듯, 타인에게 우리가 바른 긍휼을 베풀려고 한다면, 먼저 내가 하나님께 긍휼을 받은 존재여야 한다. 하나님은 그 속성이 출 34:6-7에서 선포되었다:

출 34:6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κύριος ὁ θεὸς οἰκτίρμων καὶ ἐλεήμων μακρόθυμος καὶ πολυέλεος καὶ ἀληθινὸς;

히, rachum wechannun ´erek ´appayim werab-chesed we´émet)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 34:6의 헬라어역은 (70인역) κύριος ὁ θεὸς οἰκτίρμων καὶ ἐλεήμων μακρόθυμος καὶ πολυέλεος καὶ ἀληθινὸς인데 첫째 밑줄 그은 단어가 (엘레에몬) 바로 긍휼을 베푸시는/ 자비로우신이란 의미이고, 둘째 밑줄 그은 단어가 (폴루엘레오스) 긍휼이 많으신/ 자비가 풍성하신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한 첫 단어 '오이크티르몬' 역시 자비로운이란 의미고, 마지막 단어 '알레티노스'는 신실하신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를 속성으로 가지시는 분이시기에 권능도 인자도 (헤세드) 그분에게 속한다고 시인이 선언하였다 (시 62:11-12). 

하나님은 스스로 긍휼에 풍성하신 성품을 소유하신 분이시기에, 그 긍휼을 행동으로 드러내신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어 인간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는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사실에서 드러났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인간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자기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실 것을 거듭 약속해 주셨고, 그런 사실을 그림책처럼 짐승 제사를 통해서 반복 학습시키셨다. 그러다가 그 약속의 때가 차매 예수께서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십자가에 매달려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속죄 제물이 되셨다. 그리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셨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셨고, 또한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구원에 이르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사실을 "하나님의 긍휼/ 자비하심"이란 (οἰκτιρμός) 단어로 (70인역 출 34:6에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언급된 단어) 요약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

사도 바울은 이미 롬 3:25에서 속죄 제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했었고 (롬 8:3도 참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이스라엘 회복 약속과 열방의 구원 참여에 대해서는 롬 1:5에서 암시하고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15:8이하에서도 언급한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속죄 제물로 ('힐라스테리온'; 한, '화목제물')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15:8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고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바), 또한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는 구원의 방편이었다. 이방인들의 구원은 특히 이사야서 후반부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에 함께 나타나리라고 거듭 반복되고 있다. 이사야서 후반부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바벨론 추방생활로부터의 회복 보다 근본적인 회복 곧 죄와 사단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의미하였다. 예컨대, 사 40:3-5에서 바벨론 추방생활에서의 귀환을 암시하는 듯한 말씀을 하시지만 (광야에 대로를 예비하라). 실상은 죄와 사단의 세력에서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주 예수를 위해 죄를 회개하여 심령에 대로를 만들라는 의미였다 (마 3:3, 눅 3:4, 막 1:3). 

나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던가? 나는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청산하였다. 내 죄의 무거운 빚을 모두 탕감 받았다. 그래서 나는 빚진 자이고, 긍휼을 입은 자이다. 긍휼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내 이웃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서 전달하는 삶이다. 

내가 가령 1985년도에 방글라데시에서 온 피터를 만났을 때 고국에 돌아갈 비행기 표값이 없다고 했을 때, 기도하니 네가 주라고 하셔서,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 피터와 함께 동생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돈을 얻어서 전달하였을 때, 당시에 50만원 가량이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피터에게 긍휼을 베풀었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 동생에게서 그 돈을 얻어서 전달만 했기 때문이다. 그 후 십 수년 후에 피터가 찾아 왔을 때는 이전의 그 멋진 모습이 아니라 반신 마비자로 나타났는데 그 때는 왜 그런지 긍휼의 마음이 일지 아니하였다. 얼마든지 내 것으로 (주님이 주신 것이 많아서) 그에게 긍휼을 베풀 수가 있었지만 말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οἱ ἐλεήμονες) 긍휼을 베푸는 자이다. 최요한 목사,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이란 책에서, 30배, 60배, 100배 축복 사건이 묘사된다. 30배는 자기 사례비를 몇 개월치 헌금으로 드려서 얻은 축복이고, 60배는 어떤 권사님이 주신 많은 금액 중에서 빚 갚고 남은 3천 만원으로 집 한 채 살려 하다가 사모님 권고로 선교비 신학생 보조 등으로 드렸을 때 받았고 100배는 어떤 목사에게 사기를 당하여 1600평 부지를 사려 계약금을 1억 걸었다가 그 땅을 제3자가 살 수 없는 땅임을 알고 돈을 돌려달라 하였으나 돈이 없다고 버틸 때 고소를 하기로 작정하고 모든 서류를 작성했지만, 기도할 때 네가 이전에 30배 60배 축복을 받아 이 교회당 건물을 공짜로 얻은 것을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하나님, 네가 용서할 수 없겠느냐? 는 말씀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순종했더니, 1억의 100배 100억 짜리 교회당 건물을 지을 수 있게 인도해 주셨다 한다.

최요한 목사, 40일 금식 기도를 세 번이나 하시고, 남자가 남자되기를 거부하고 사는 목사. 


3. 긍휼히 여기는 자만 긍휼을 받는다

마 18:23-35에서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기 동료에게 100데나리온을 빌려주었다. 1만 달란트를 임금에게 빚진 이 사람은 (임금의 종, 곧 청지기이다) 임금에게 사정해서 1만 달란트를 탕감/ 면제 받았다. 공짜로 빚을 청산했다. 기분이 짱! 


그런데 임금님에게 빚을 면제받고 돌아가는 길에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임금님의 종/ 청지기) 만났다. 그 동료가 허리를 굽혀 사정을 하길, "좀 기다려 달라 꼭 갚겠다"고. 그러나 이 면제 받은 자는 "뭐야, 이 새끼 저 새끼, 지금이 몇 번이야? 엉, 이제는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다고." 멱살을 잡고 관청으로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산술 계산을 좀 해 보아야 한다. 

1데나리온 =노동자 하루 품삯 (오늘날 한국 상황에서 10만원이라 하자)

6000데나리온 =1달란트; 1달란트 =100,000원 x 6,000데나리온 = 600,000,000 (6억원)

1만 달란트 =6억원 x 10,000달란트 =60,000억원 (6조 원)

일당 10만원 받는 사람이 매일 쉬지 않고 일하여 100데나리온 벌려면, 100일이면 된다. 그런데 1달란트를 벌려면, 6000일을 일을 해야 한다. 6000일은 365일을 1년으로 쳐서 16년에 해당된다. 하루도 쉬지 않고 16년 일하면, 1달란트 번다. 1만 달란트를 벌려면, 16년 x 10,000달란트 = 160,000년 (16만년)을 일을 해야 한다. 이 못된 놈이 고관이라 일을 하면 일당이 100만원이라 하자. 1.6만년을 벌어야 1만 달란트를 벌어 갚을 수 있다. 조금 더 일당을 높여 하루 1천만원을 번다 하자. 1600년을 (1천 6백년) 일해야 1만 달란트 빚을 갚을 수 있다. 더 높여 1억을 하루에 번다 하자. 160년을 벌어야 1만 달란트를 갚는다. 

여기서 초점은 이 못된 놈은 절대로 일평생 일해도 자기 빚 1만 달란트를 갚을 수가 없다. 

그렇게 큰 빚을 면제 받았으면서도 겨우 100데나리온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긍휼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못된 놈은 바로 '나'가 아니던가. 내 삶이 그러했었다. 못된 놈으로 살았다. 

그러자 그의 동료들이 (임금의 종들/ 청지기들) 자기 동료가 자기는 임금님에게 막대한 천문학적인 빚을 면제 받았으면서도, 다른 동료에게 못되게 구는 것을 보고 자기네 주인 임금님에게 이 사실을 일러 바쳤다. 그들의 주 임금은 그 못된 종, 곧 자기 동료의 작은 빚도 기다려주지 못하고 감옥에 쳐 넣은 그 자를 향하여 불호령을 내린다: 

"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그 1만 달란트 빚을 다 갚지 않으면 너도 감옥에서 나올 생각을 말라고 가두어 버렸다.  

긍휼히 여기는 자만이 긍휼을 받을 수 있다. 나는 1만 달란트 빚을 하나님께 탕감 받은 자이로되 100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갚을 길 없는 은혜를 받은 자신을 돌아보고 이제 그 은혜받은 자 답게 살기 때문이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참고로 읽어 보실 것

Philip Massey

Matthew 18:23-35 records the parable of the two debtors: one owed the king 10,000 talents, and one owed his fellow servant 100 denarii. The NIV footnotes usually say that this is equivalent to “several million dollars” versus “a few dollars.”

A more accurate comparison is based on how much time it would take to earn these respective amounts of money. Let us begin with 100 denarii.

The denarius was one day’s wage for a typical day laborer, who worked six days a week with a Sabbath day of rest. Allowing approximately two weeks for various Jewish holidays, the typical laborer worked 50 weeks of the year and earned an annual wage of 300 denarii (50 weeks x 6 days). Therefore, 100 denarii was one-third of a year’s salary, or four months’ wages.

Now suppose you continued to work as a day laborer earning 300 denarii each year. After 20 years of such labor, you will have earned 6,000 denarii.
At this point, the king would say to his debtor, “Congratulations. You have worked for 20 years and have now earned 6,000 denarii. That’s enough to pay back one talent. You only have 9,999 more talents to go.”

From this, we can easily see that if it takes 20 years to earn one talent, then repaying 10,000 talents would require working 200,000 YEARS! How absurd then for the servant to beg for mercy and tell the king that he would “pay back everything.” As a day laborer, he had no hope—almost literally “not in a million years”—of ever repaying his debt.

What would 100 denarii and 10,000 talents look like in today’s dollars? Currently, California’s minimum wage is $8.00 per hour. From Matthew 20:1-16, we know that laborers worked 12 hours per day, which is 72 hours per week. Under California law, they would be paid 40 hours a week at $8 an hour and 32 hours of overtime at $12 an hour for a weekly wage of $704. Thus, their annual wage, assuming they work 50 weeks as above, would be: $704 per week x 50 weeks = $35,200

Therefore, if 100 denarii equaled four months’ salary, at current minimum wage, it would be equivalent to $11,733.33, which is substantially more than the NIV footnote of “a few dollars.”

Earning $35,200 per year at minimum wage, how much would you earn in 200,000 years to equal 10,000 talents?

$35,200 x 200,000 = $7,040,000,000 $7.04 billion

For perspective, $7.04 billion is approximately one-eighth of the total wealth of Bill Gates. Bill Gates, the richest man in the U.S. and second richest in the world, has a net worth of $53 billion as of 2010:

If you had $7.04 billion available to repay a debt, you would be #102 in the 2010 Forbes list of billionai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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