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중일사랑 2019. 3. 4. 23:38

마태 5:13-16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팔복에 (八福) 이어 산상 설교의 본론이 제시된다. 천국의 상속자들은 무엇을 세상에서 해야 하는가? 그들의 소명이 무엇인가? 팔복은 세상에서 천국 시민의 성품과 생활 방식을 약간 추상적이고 압축시켜 표현했다면, 이제부터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자기 처한 상황에서 착한 일들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성도들의 성품과 생활의 실제적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8복의 성품과 생활 방식을 추구하는 자들이 바로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다.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17 이하에서 7 마지막까지 묘사될 것이다. 성도들이 세상의 소금 빛이 되는 것은 착한 일들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이미 소금과 빛이기에 착한 일들을 행하게 된다. 착한 일들은 구원받은 자들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착한 일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다. 착한 일을 행하라는 명령은 구원을 받은 사실에 근거를 둔다.


산상 설교에 포함된 계명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 경우도 더러 있다. 예컨대, 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다. 그리고 7:21에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다. 이런 말씀들을 성경 전체의 사고와 분리시켜 생각한다면, 계명을 지켜 천국에 들어간다는 행위 구원론에 이르게 것이다.


재미 교포 목회자인 서사라 목사의 가르침이 바로 그렇다. 그녀에 의하면, 주님은 오른 눈이 범죄하면 찍어 내어 버리라고 하셨고 "또한 만일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백체 하나가 없어지고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하셨다면 ( 5:29-30) 사도 바울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말씀이 90퍼센트 이상 무게를 지녀야 하고 인간에 불과한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사도들의 말은 그저 참조할 정도로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칼빈은 사도 바울의 말을 근거로 이신칭의 (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사고를 만들어 내어 사람들을 락시켰으므로 형벌의 처소에 (지옥?) 있다고 한다. 이런 식이다


이런 사고는 단편적 성경 이해가 초래한 극히 잘못된 성경관이다.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만 (빨간 색으로 인쇄되기도 한다) 신적 권위를 가지고 기타 사람들이 기록한 책들은 그런 권위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고는 성경 영감론에 무지한 결과이다. 말씀을 누가 하셨느냐?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들을 기록하게 하실 , 인간 저자들을 통해서 모두 기록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도 인간 저자들이 기록하였다. 성령께서 인간 저자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기록에 오류가 없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방향으로 기록하도록 하셨다. 이것이 영감이다. 이렇게 기록된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이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성령님의 영감으로 주어졌기에 신적인 권위를 지니는 것이다. 누가 처음에 말씀을 했느냐? 신적 권위를 갖도록 하는 이유가 아니다.


그런데, 13-16절을 계명들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면, 계명들은 천국의 상속자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규범이다. 천국 규범 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한 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명들은 구원의 조건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엄밀하게 따져서 계명들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구약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도록 명령받은 것은 선택 받은 선민이기 때문이지,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선택을 받아 구원의 백성이 것이 아니다.


유사하게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직설법과 명령법을 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하였다 ( 6:6-7). 이는 직설법 형식의 진술들이다. 그런데 이어 사도는 진술을 명령법으로 전환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가운데서 다시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6:11-13).


이런 직설법과 명령법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일에 (십자가 죽으심, 부활, 승천, 다윗 후손 왕위에 앉으심, 성령님을 부어 주심 ) 근거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제는 구원 받은 답게 살라고 명령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 3:25, 8:1-3) "하나님의 긍휼들"이란 ( 12:1 τῶν οἰκτιρμῶν τοῦ θεοῦ) 단어로 압축시켜 표현한다. 그분은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자와 신실하심이 많은 하나님"이시다 ( 34:6). 그분의 긍휼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지, 우리가 착한 일들을 행한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9);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의로운 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3:4-7).


이제부터 제시 천국 시민이 따라야 계명들 규범들은 아주 극단적이고 철저하다. 누구도 그대로 엄두를 내기 어렵게만 들린다. 하지만 성령님으로 거듭난 자들은 자신들의 타락한 본성과 체질을 고치기 위해서 성령께서 어떻게 삶에 간섭하시고 우리 환경과 건강까지 깨뜨리신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자신의 생명이 극단에 처한다면, 극단적인 명령까지도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령 내가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면, 주님 앞에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분에 칭찬 들을 일이 있다면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일까? 가령 자신의 일생 쌓아 왔던 재물이 1조원이라 하자.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상속시키지 말고 교회에 바치라고 한다면 그런 음성을 거절할 있을까? 많은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우리는 아무리 극단적으로 들리고 나로서의 엄두가 나지 않는 계명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자아를 꺽고 순종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성도들 자신의 힘으로 이런 천국 계명들을 순종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이 주신 이 천국 계명들은 사도 바울이 해석하여 적용시킨 바대로 오직 성령님의 능력으로 순종될 수 있는 천국 윤리 규범들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네 몸같이 이웃 사랑하라는 말씀이야 말로 온 율법이 요약된 바라 언급한 다음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갈 5:16) 권면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와 같이 (갈 5:22-23) 우리 천국 시민이 가져야 할 덕목들은 우리 자신의 성품이 아니라 성령님이 임하여 우리에게 맺게 하시는 성령님의 열매이다. 우리는 이런 덕목들이 성령님이 우리에게 그냥 하늘에서 날라 건네 주시는 그 무엇이라 보지 않고 성령님께서 우리 삶에 역사하여 우리로 고난 중에 훈련 중에 맺게 해주시는 열매라고 본다. 


그런데 천국 시민들에게 주어진 계명은 구약 율법의 내면화, 철저화, 사랑화 특징지어진다. 예컨대, 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 5:21이하) 중심에 형제를 미워하는 일까지 금지하는 것으로 내면화, 철저화 되었다.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 5:27이하)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일까지 금지하는 것으로 내면화 철저화 되었다. 또한 "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계명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철저화 사랑화 되었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모든 계명은 "사랑"이란 개념 안에 모두 포함된다고 많은 구약 계명들의 정신을 요약해 주셨:


12:28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계명이 없느니라


13:8 피차 사랑의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것과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 가운데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5:14 율법은 이웃 사랑하기를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


안이숙, "만주 여자 사형수," 「죽으면 죽으리라」 하권, 46-69페이지에 묘사된 실천 사랑을 보라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일본 의사당에 박관준 장로와 방청객으로 참여했다가 우상숭배를 회개치 않는 일본은 유황불을 받아 망한다는 선언문이 적힌 전단지를 던져 의사당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죄목으로 안이숙이 평양 교도소에 미결수로 수감되었을 감방에서 여자 죄수들과 함께 사는데, 방에 20 중국 만주 여자가 들어왔는데 하루 종일 고래 고래 저주를 퍼붓는 통에 잠을 수가 없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간수에게 물으니 20세인데, 50 남편을 쥐약을 타서 죽이고 시체를 조각 조각 내어 압록강에 던졌다가 얕은 곳에서 걸려 조각들을 맞추어 결국 남자의 신원이 밝혀지고 부인을 수배했는데, 겁이나서 평양까지 도망왔지만 잡혀 평양 감옥에 갇혔는데 미쳐서 저렇게 고래 고래 고함을 지른다고 알려 주었다.


10 가난한 부모가 자기를 감자 포대에 산골 산골 시골에 사는 50 남자에게 팔아 버렸다고 한다. 50 남자가 데리고 가서 데리고 사는데, 늙은 남편이 잘해 주고 사랑해 주었지만 싫고 미웠고 겁이났고, 자기를 감자 부대에 부모만 아니라 자기를 감자 부대에 남편도 너무나 미웠다. 그렇게 살다가 자전거를 타고 산골 시골에 쥐약을 팔러 다니는 20 청년이 집에 와서 약을 파는데, 청년은 이런 시골 산골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사는가? 하고 놀랐고, 여자도 청년에게 마음에 끌려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50 남편을 쥐약을 밥에 타서 먹이고 죽이기로 공모를 했다. 그래서 쥐약을 밥에 넣고 죽였는데 시체를 처치하고자 조각조각 내어서 압록강에 그렇게 던졌다가, 겁이 나서 평양으로 도망갔는데 잡혀서 이렇게 왔는데, 형사에게 얼마나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몰라, 몰라" 일관했다. 그러자 형사가 철사로 손에 구멍을 내어 끌어 당기며 고문을 했지만, 사형 당할까봐 몰라 몰라 하였고, 아이를 임신했었기에 아기를 낳아 젖을 먹이는데 젖이 나오지 않고 힘들어 하자 형사들이 아이를 빼앗아 버렸다. 여자는 이제 20세인데 미쳐 버렸다. 이런 여자가 바로 방에 수감되었는데 중국어로 저주를 퍼붓는데 말소리도 모르고 뜻도 모르는 무서운 음성은 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 자는 안이숙 귀에 요랍스럽고 가슴을 찌르는 것같이 스며들어 온다.

때에 "예수를 믿는다는 , 찬송이나 하고 성경 외우고 기도나 하면서 지옥을 면하려고 천국 가겠다고 하는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냐? 예수님이 죽으셨다. 사랑하시고 도우시고 건져 주시려고 죽으셨던 것이다. 사랑을 행할 예수님이 것이고 편히 앉아서 좋은 오기만 바라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자와 다른 것이 없는 것이다. 죽는 , 사랑 위해 죽는 것이 예수 믿는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마음이 괴로워질수록 92번을 내게 데려다 놓고 예수님 사랑을 붓는 길밖에 내게 안식을 주는 길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생각다 못해 간수나 구리야마 간수같이 순하고 좋은 이들한테 말하는 것보다 억세고 나를 좋아하지 않는 간수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을 같았다. 나는 일본인 간수에게 소청을 말한즉 그는 사무적 태도로 간수장에게 보고를 하겠다고 했다. 옳다, 되었구나! 하고 일이 어떻게 되는가 몹시 기다렸다. 일본인 간수가 교대해 왔을 소청을 간수장에게 보고한즉 이유를 말하라고 했다.


나는 간단히 이유를 말했다. 이유는 92번은 외국에서 낯선 땅에 와서 말도 모르고 미친 사형수인고로 사형 전에 내가 같이 있어서 이야기도 해보고 같이 있어 주고 싶다고. 그후 간수장은 소청을 소장에게 보고했다. 소장은 단번에 허가했다. 오후도 늦어서 남자 간수가 사람 들어오더니 방문이 열리고 92번을 억지로 끌어다가 방문을 열더니 집어 넣었다. 악취가 코를 찔러서 모든 우리 감방 사람들은 코를 쥐고 소리를 치며 한구석으로 모두 몰려 도망을 친다. 와들와들 떨며 92번은 흐트러진 머리 밑에 보이는 고름이 가득 빨간 눈으로 이리저리 살피며 무어라고 저주를 하면서 누구나 물어뜯을 것같이 흘겨본다. 감방 모든 사람들은 무서워서 악악 소리를 지르며 미친 여자에게 해를 받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피한다.


어찌나 냄새가 고약한지 눈이 쓰리도록 심했다. 나는 갑자기 92번에게 달려들어서 허리를 양손으로 부둥켜 잡았다. 쇠고랑을 그는 그의 머리를 숙여서 잡은 손을 물려고 애를 썻지만 미치지 못했다. 그는 잡은 팔을 놓치게 하려고 있는 힘을 다해서 풀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놓치면 그에게 물려 뜯기고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고로 더러운 잔등에 턱을 대고 붙든 팔을 죽어도 놓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온갖 힘을 다해서 손을 풀어 내려고 결사적이고 나는 놓치려고 결사적이고 우리 둘은 때문에 이리 자빠지고 저리 넘어졌다. 이렇게 죽을 힘을 다하니 숨이 차고 허덕인 씨름은 죽느냐 사느냐의 격투가 되어 버렸다.


감방 사람들은 악악악 소리를 치면서 구석으로 밀리고 구석으로 밀리고 간수는 밖에서 들여다만 보고 92번과 나는 기진맥진해서 결국은 92번은 다리를 뻗치고 한편으로 자뼈자 누운 움직이지 않고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그때에야 나도 숨이 차고 허덕이는 숨을 내어 쉬면서 그의 허리에서 손을 풀었다. 얼마나 녹아 빠졌는지 92번은 죽은 사람같이 다리를 내어 뻗고 한쪽으로 자빠진 땀을 흘리면서 숨만 쉬고 꼼짝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잠들어 버렸다.

나는 그의 발이 차지면 잠이 같아서 발을 가슴에 넣고 코를 찌르는 더러운 냄새가 나는 똥과 오줌에 굳어진 옆에 아무도 눕지 않는다고들 야단을 하는 그의 발을 가슴에 앉은 나도 누워서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이 되어도 그는 깨지 않고 코를 골며 계속해서 잤다 조반 때가 되자 모두 밥을 먹어도 그는 그대로 코를 골며 잤다. 그가 만일 코를 골았으면 우리는 그가 죽었는가 했을 것이다. 종일 그는 코를 계속해서 골며 잤다. . . . 거의 3일을 꼬박 셈이다.


나는 간수에게 부탁을 해서 다른 옷을 입혀 달라고 했다. 청소부들과 간수가 와서 우리 방문을 열고 깨끗한 옷을 가지고 와서 쇠고랑을 풀자 그는 소리를 지르더니 기절하고야 말ㄹ았다. 그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뒤로 고랑을 찾었기 때문에 까무러친 것이다. 새옷을 입힌 후에 우리는 그의 전신을 주물러 겨우 회복시켰다. 나는 간수에게 간청해서 다시 쇠고랑을 잠그지 말라고 애원했으나 위험하다고 거절을 당하고 다시 그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힘센 청소부 사람이 달려 붙어서 결국 쇠고랑을 채우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는 저주를 했다.


내가 그동안 모아 두었던 밥을 그에게 주니 개와 같이 엎드려서 훌쩍 훌쩍 모두 먹어 버렸다. 국도 주니 개같이 훌훌 빨아 마시는고로 그릇을 들어 마시니 눈을 흘기면서도 모두 들어 마셔 버렸다. 계속해서 그렇게 오래 자고 92번의 충혈되고 부은 눈은 기적같이 맑아졌다. 더덕더덕 붙은 눈곱은 땀을 흘리며 씨르하는 동안에 떨어졌고 기름과 때가 섞여서 얼고 말라 버렸던 얼굴 피부에 잔뜩 끼었던 가죽같은 때도 씨름하며 땀을 흘리는 동안에 떨어져 없어졌다. 그러나 그의 살빛과 맑은 눈엔 미움과 저주만이 가득했다. 그는 극히 심한 미움과 증오의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II,54).


나는 진저리가 나지만 "에수님의 " 상상하고 예수님의 눈일듯한 눈을 지어 가지고 그를 사랑하는 태도의 눈을 짓고 얼굴을 하고 웃음을 띠어 보였다. 그는 저주를 하면서 시선을 옮겼다. 다시 그는 나를 극히 미워하는 눈초리로 달려든다. 나는 밥과 국을 그에게 먹였다. 그는 개구리가 모기 잡아 먹는 것같이 먹었는지 말았는지 배고 고파서 허덕였다. 누구든 배가 고프련만 살인수는 굶주린 사자 같았다. 다음 식사 시간이 때까 92번과 나는 무언의 씨름을 계속했다. 그는 나를 극히 미워하고 이해 못할 말로 저주를 퍼붓고 나는 예수님의 눈과 얼굴과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심장으로 그를 녹이려는 전쟁이었다.


그는 빨개진 눈을 흘기면서 나를 보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의 저주는 지금까지 해오는 저주보다 심하고 별스러운 저주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그의 언어를 모르니 태평했다. 이제라도 기회만 있으면 달려들어서 여지없이 물어뜯을 기세였지만 미안하게도 그는 깨질 대로 깨지고 상할 대로 상해서 전신이 아파서 맥이 빠져 늘어진 셈이나 묶어 놓은 맹수 같아서 다시 달려들 힘도 없었다. 나도 힘이 빠지고 전신이 아파서 욕을 하든 저주를 하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일을 그칠 것이 아니고 겨우 시작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연구했다.


", 이제는 싸움을 일으켰으니 싸워야 하지 않나?" 순간에 나는 싸움을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예수님 자신이 하신 것을 인정하지 않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을 너무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라는 것은 이렇게 더러운 외국인 중국 사람, 더욱이 살인범! 게다가 오줌 똥을 옷에 그대로 달을 뭉갠 고약한 미치광이가 만일 방에 있었다면 나는 질식 상태에 들어가도록 아우성을 치며 방에서 뛰어나가려고 했을 것이고 여자를 내쫓아 버리려고 죽을 힘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정반대가 아닌가?

예수님은 그러한 여자를 방으로 억지로 데려오게 하셨고 여자의 더러운 옷에 코를 박고 그의 허리를 잡아 씨름을 시켰고 예수님은 우리 둘로써 씨름을 하게 해서 땀이 나게 하셨고, 예수님은 무슨 굉장한 일을 하시려고 협조를 간청하시는 것이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머리를 들었다. 나는 어렸을 강에 가서 수영을 멋대로 익혀서 여름이 되면 헤엄치며 강가에서 놀다 오다가 전문학교에 가서 경도 아라시야마 밑에 있는 수영소에서 처음으로 다이빙을 배울 높은 나무 다리에 올라가서 수영 선생이 지도하는 대로 떨어질 많은 사람들은 무서워서 하는 일을 나는 "떨어져 보아야 무서운지 쉬운지 알게 아닌가?" 하고 결심을 하고 가장 높은 다이빙 다리에 올라가서 용기있게 떨어졌다. 떨어질까 말까 망설일 때는 겁도 났었고 무섭기도 했지만 마음에 작정을 하니 소망이 생겨서 용감해졌던 것을 나는 여러 회상한 일이 있다. 나는 이때도 그때의 일을 생각했다.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떨어져 내려가면 일은 쉬워지지 않겠나?" 그는 나를 미워서 흘겨본다. 나는 예수님의 자애의 , 사랑이 넘치는 눈을 만들어 보려고 애를 썼어도 효과는 없었다. 그는 나를 더욱 미워하고 더욱 사나 눈초리로 흘기며 저주를 쏟아 부었다. 다시 나는 그에게 최선을 다해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보아 주었다. 이러한 극적 장면은 자꾸 되풀이 되엇으나 거기에 아무 성과가 없었다.


이때에 여기에 만주에 다니며 야미 장사를 하다가 붙들려 여인이 있었다. 그는 만주어를 아는 고로 사형수의 꼴에 의분을 감치 못해서 주먹을 쥐고 달려들어 사형수를 처분해 보려는 기세 보였다. 나는 그것을 만류해 놓고 우선 그에게 " 말이 옳다" 라는 만주 말을 마디 배웠다. 나는 그의 저주가 조금 그칠 만한 기회에 "! 말이 옳다!" 하고 위로의 표정을 했다. 그는 저주하던 말을 끊었다. 그러나 다시 말로 나를 흘기며 발광적인 저주를 퍼부었다. 알아들을 없는 말이지만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그녀가 결코 받는다는 인상이 되도록 조심하면서 ", 말이 옳다!" 라고 했다. 저주를 한참 열심으로 들어준 후에는 나는 다정하게 "그럼, 말이 옳다" 라고 반복했다. 저주하는 어세가 조금씩 식어가는 같은 즈음에 나는 진실한 태도를 하고 " 말이 옳다" 하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웬일인지 무엇에 걸린 것같이 끊었다.


피곤이 극도로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픈 몸을 이기는 눈이 가늘어지며 고개가 점점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잠의 엄습에 빠져들어 갔다. 그러는 동안에 밤은 왔다. 잠이 그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코고는 소리가 마치 기차가 눈앞에 지나가는 같은 요란한 콧소리였다. 길고 , 얼마나 세월을 그는 분해서 잤고 무서워서 자지 못했고, 추워서 자지 못했고, 배고파서 자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심한 씨름 때문에 온몸은 깨지고 다치고 아파 쓰리고 저려도 그는 땀을 흘렸고 피곤이 전신을 녹여 놓았기 때문에 잠을 있게 모양이다.


죄수들이 코고는 소리가 너무 요란스러워서 코를 찌르고 발로 뺨을 차도 코의 콧소리는 멎지도 않고 약해 지지도 않았다. 나는 급히 쑤시고 아픈 몸을 일으켜서 더러운 벗은 발을 가슴속에 깊이 넣고 끌어안았다. 얼음덩이가 그의 발은 가슴의 온기를 대번에 식혀 내리고 온몸을 극도로 얼음이 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자고 깨어났다.


나는 만주어를 마디 배웠다. "나는 당신이 좋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마디를 외워 가지고 그가 나를 보면 나는 신실한 어조로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그는 말을 듣자 눈빛이 달라지더니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저주를 퍼붓는다. 나는 조용한 말로 했다. "나는 당신을 참으로 사랑해요." 그는 얻어 맞은 아이같이 저주하던 그치더니 나를 보며 다시 무어라고 저주를 한다. 나는 그의 저주하는 말을 야미 장사 부인이 알게 하여 주려고 하는 것을 하게 했다. 좋은 말이면 알아서 필요가 있지만 으레 나쁜 말일 것이니 알면 마음만 상할 뿐이고 아무 도움이 되기 문에 결코 뜻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야미 장사 부인은 화가 나서 92번에게 무어라고 만주 말로 야단을 쳤다. 그리고 무어라고 한참 말을 하니 92번은 나를 자꾸 보고 보고 그러면서도 중얼거리며 저주를 하며 미워했다. 부인은 대노해서 "선생님, 계집년은 정말 미쳤어요. 미쳤을 아니라 소나 만도 못해요. 저까짓 이제 죽게 내버려 두세요. 이런 년은 열두 죽어도 마땅해요. 이게 사람의 새끼인 아세요?" 그는 울분을 터뜨렸다.


나는 92번이 나를 무어라고 저주하든지 모든 것이 기뻤다. 그래서 나는 그의 저주 소리가 흥이 났다. 그가 나를 때마다 나는 똑같은 말을 계속했다. 이러는 동안에 기적이 속에 일어났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았던 살인범에게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하며 계속하는 동안에 심장 , 심령 안에 92번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 일이다. 나는 설레는 가슴을 부둥켜 안으면서 "! 이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이었구나!" 하고 황홀해졌다. 마음 속에 92번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그가 나를 쳐다볼 때마다 음성이 떨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저주하던 말을 그치고 나를 바라보면서 우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었다. 문구멍으로 들어오는 밥과 국을 먼저 92번에게 먹이고 밥과 국도 먹여 주었다. 3일간을 그는 완전히 밥과 국을 먹었다. 나는 수척해 지고 그에게 먹여 주는 국그릇을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모든 사람들은 92 때문에 내가 먹지 않는다고 그를 미워했고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것은 틀린 태도라고 책망하고 그들도 같이는 하더라도 불쌍한 살인범을 사랑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아무나 92번을 미워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제멋대로 대소변을 함부로 옷에 싸지만 내가 변소 통을 가리킨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 같이 통에 가서 대소변을 보았다. 나는 이것을 보았을 몹시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밥을 3일간 먹은 그는 내가 이같이 쇠약해지고 자기에게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을 보았는지 저주도 그치고 미워서 보는 눈초리도 달라졌다. 나는 간수에게 간청을 해서 그의 수갑을 풀어 달라고 했다. 간수는 보고했다. 그리고 남자 간수가 들어와서 그의 쇠고랑을 풀었다.


너무 오래 차고 있던 쇠고랑이었고 팔이 뒤에 매여 있은 오래여서 그는 수갑을 풀어 주었을 손을 앞으로 가져오지를 못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그의 양팔을 문질러 주었다. 문지르고 문지르고 자꾸 문질러서 조금씩 앞으로 가져왔다. 그래도 그는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면 나는 그의 양팔을 아프지 않게 자꾸 문질러서 마침내 그의 양팔이 앞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양팔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조금씩 운동을 시켰다. 자꾸 운동을 시킨즉 팔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코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닌 것을 알았다.


나는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기 때문에 같은 일은 도저히 자신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분명한고로 이것은 모두 예수님 자신이 나를 시켜서 하시는 것임을 너무도 알았다. 나는 그의 사랑이 속에 부어져서 그의 손과 팔과 몸이 것을 통해서 하시는 것임을 알았다. 예수님의 사랑을 나는 보았으므로 가슴은 감격에 넘치고 눈물은 자꾸만 흘렀다. "주님, 주님의 사랑이 이렇듯 큽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인 것을 보았어요. 눈으로 만이 아니라 몸으로 전체로 주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가슴은 시원해지고 생수가 솟는 것같이 기뻐지고 화평해 지고 평안해졌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실 때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자기의 양식이라고 하셨는데 생수를 주신다고 하신 것을 생각하였을 때에 과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양식이어서 그의 뜻을 순종하니 양식이 풍족한 것같이 기쁨과 만족으로 배불러지고 생수를 주신다고 하셨으므로 생수가 뱃속에 흘러서 시원하고 화평 해진 사실을 나는 엎드려서 감사했다.


92번은 무서움과 추위에 얼마나 잤던지 일단 잠이 들면 좀처럼 깨어나질 않았다. 나는 그에게 오래 자게 하기 위해서 그의 발을 가슴에 언제나 묻어 주었다. 그는 언제나 코를 골면서 잤다. 잠을 많이 그는 그의 얼굴이 부드러워지고 입에는 저주가 완전히 그쳤다. 힘살이 굳어서 머리 위로 올라갈 없는 팔을 조금씩 올려서 그는 그의 길고 흐트러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기 시작했다. 나는 극히 조심스럽게 그의 태도에 주의하면서도 모른 척하고 도와만 주었다.


나는 야미장사 부인에게 만주어를 배웠다. 만주어를 배우면서 놀란 것은 만주어는 한문 그대로 발음을 하면 거의 되는 것이었다. 나는 재미가 있어서 얼마 동안 배우는 동안에 알아 버리고 말았다. 만주어를 3일간에 배워 가지고 통역장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거짓말도 분수 있게 하지" 했는데 말이 사실일 수가 있는 것을 있었다. 나는 92번에게 말을 있는 정도가 되었다. 나는 그의 점점 아름다워져 가는 얼굴을 황홀해서 쳐다보면서 "아름다운 여인, 얼굴이 아름답다. 눈이 아름다워" 이렇게 마디씩 해도 그는 들은 척하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리 감방 사람 중에 사람이라도 92번에 대해서 못된 언사나 짓궂은 행동을 하면 꾸짖고 92번을 아꼈다. 자연히 92번에 대해서 모두 조심했다. 얼마 후에 92번도 우리들같이 앉아서 아침 점검을 받았다. 우리들이 하는 것같이 꿇어앉아서 경례를 하니 간수장 할머니가 라서 92번을 보고 "마아 고래가 아노 규주니방까. 가왔다와네 (, 이것이 92번인가. 변했구나!)


나는 말을 92번에게 통역했다. 그가 우리와 같이 앉아서 보통 사람이 것을 보니 무언지 나도 예수님이 다르게 만들어 주셨음을 느꼈다. 나는 이런 느낌이 너무 많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은즉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동자가 마주쳤다. 나는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쳤다. 나는 조용히 "나는 너를 참으로 사랑한다. 너는 알지?" 그는 얼마 있다가 낮은 음성으로 " 당신은 나를 사랑해요? 같은 것을." 나늑 그가 말을 한게 몹시 기뻐서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으나 참고 조용한 말로 "? 너는 나와 똑같으니까." 자기와 같다는 말을 들은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당신도 남편을 죽였소?" 나는 말에는 대답을 하고 "너와 나는 똑같은 인간이야!" 그는 분명히 호기심을 가지고 추궁했다. "당신에게도 남편 외에 연인이 있군요?" 나는 그의 말엔 대답을 안하고 "우리는 같은 사람이거."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어떤 방식으로 당신은 남편을 죽였소?" 나는 그래도 똑같은 태도로 "나와 너는 똑같으니까 똑같은 줄만 알면 되는 거야."


그는 내가 자기와 똑같ㄷ아는 말이 그에게 위로가 같았다. 나는 힘을 얻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너와 똑같은 사람들인데 틀린 점은 너는 만주 사람이요. 우리는 한국 사람인 것뿐이야." 말을 듣고 그는 눈에 표정을 하면서 " 사람들이 남편을 죽였어요? 나같이. 옳지. 감옥엔 남편 죽인 사람만 잡아넣는 데구먼."


나는 92번이 이제는 다른 수인과 별로 다른 점이 없다는 일에만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나와 완전히 나와 같이 되려면 울기도 하고 웃을 줄도 알아야 하지 않는가? 나는 그가 어떻게 해서 미소라도 지을 있는 여인이 되길 바랐다. 어느 때는 장난도 쳐봤지만 그는 웃으려고 하는 기척도 없었다. 그는 저주하는 것은 멎었지만 저주 대신에 한마디 똑같은 말이 입에서 언제나 흘러나왔다. 그것은 "뽀미" 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뽀미"하고는 기백이 떨어진다. 뽀미라는 말은 "강냉이 "이라는 뜻이다. 어려서부터 강냉이 떡을 제일 좋은 음식으로 먹어왔기 때문에 그는 먹던 강냉이 떡이 그렇게 먹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그의 간절한 강냉이 생각에 무시로 나오는 뽀미 모시를 들을 마음이 초조해지고 안타까워졌다. 사랑도 있고 도와 수도 있고 자도록 발도 가슴에 품어 있지만, 강냉이 떡을 먹일 있는 능력이 내겐 도무지 없었다. 나는 보지도 못한 강냉이 떡을 얼마나 사모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여자에게 뽀미 덩이를 먹일 있다면 어떠한 희생을 가져오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해볼 심정이 되었다. 나는 구라야마 간수와 간수에게 의논을 보았다. 그들은 똑같은  말로 "그런 말도 들어본 일이 없고 일도 없소"라고 하면서 상대도 했다. 그는 말이라고 한다면 뽀미 하는 것밖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밤에 추위를 이겨서 모두 잠을 자고 깨어 있는데 뒷벽에 높이 달린 조그마한 유리창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모든 수인들은 달빛을 모두 한숨을 쉬며 생각을 하고 가족 생각을 하며 울었다. 92번은 다른 수인들이 하듯이 달빛을 한참 바라보더니 " 아이, 어린아이!" 하며 부르짖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주의해 보았다. 그는 다시 " 아이야! 어린아이, 아들아!" 그는 소리로 똑똑히 " 어린 아가! 너는 어디 있느냐. 어찌되었느냐. 너를 누가 데려가서 굶겨 죽이지 않더냐. 너는 어찌 되었니?" 나는 그의 슬픈 가슴에서 나오는 말소리에 간장이 상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다시 "아이야, 아이야. 어디 있니. 너는 살았느냐? 죽었느냐? 엄마도 보고 아버지도 없고 외국 땅에서 젖도 없이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했다.


그는 마루에 엎드려서 어이어이 하며 한없이 울었다. 소리가 너무 서럽고 처량하여 나도 목이 메도록 울었다. 다른 사람들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울고 나더니 그는 눈물을 씻으며 일어나 앉았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으면서 "92 우는 일은 좋은 일이야. 잠을 자는 일이 제일이고 다음에는 우는 일이거든. 실컷 울면 마음이 시원해지지?" 그는 아직도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 아이는 어찌되었을까요?" 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에게 아이가 있다는 일을 생각해 일이 없어서 물어 보았다. "네가 잡혀 애기를 어떻게 했는너가?"


"나는 아들을 낳았어요. 낳자마자 형사한테 잡혀 왔는데 나를 너무 때리고 고문을 너무 무섭게 해서 젖이 나오지 않자 갓난애기를 내게서 떼어 갔어요. 아무리 애기를 도로 달라고 하여도 어찌 되었는지 없대요. 죽었겠지요.?" 나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아무 지식이 없었다. "글쎼"라는 말밖에 아무 말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꾸 울었다. . . .


그가 울고 울어서 피곤이 때를 나는 기다렸다. 그는 멍하니 앉아서 달빛을 바라보며 추워서 떨고 있다. 나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92! 너는 멀리서 누가 이름을 부르며 울면서 너를 찾는 이가 있는 아느냐?" 그는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우리 부모는 나와 원수예요. 나는 그들이 나를 감자 부대에 팔아먹은 것에 원한을 품고 원수를 갚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내가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되었어도 아무 생각이 없을 거야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그러나 나는 " 어머니 아버지보다 너를 지으신 이가 너를 찾으며 부르고 계신단다" 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의혹의 눈을 하면서 "나를 지으신 이가 나를 찾으며 나를 불러요?" 나는 옳다 되었다 하고 "그럼! 네가 아이를 자꾸 부르며 찾아도 아이는 어디 있는지 엄마를 모르고 헤매는 것과 똑같이 너를 지으신 하나님이 자꾸 너를 부르시면서 너를 찾는 것이야. 그래도 너는 모르지?"


그제야 그는 깜짝 놀라면서 "! 선생님은 선교사시구먼요." 나는 그가 선교사라고 하는 말에 놀랐다. 그리고 반가웠다. "그래 내가 선교사로구나!" 나는 마음에 만족하고 랑스러웠다. 그는 나를 존경하는 태도로 몸을 다시 가지면서 나를 달빛 안에서 보고 다시 보았다. 그는 한참 나를 보더니 "예수님, 교회, 주일학교, 선교사!" 나는 놀랐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듣고 알았나?" 그는 옛날을 추억하듯이 "내가 어렸을 코가 크고 노랑 머리인 미국인 선교사가 와서 나를 데리고 교회에 갔어요. 거기서 '예수 사랑하심은'하는 찬송을 배웠지요. 그러나 우리 부모는 자꾸 일만 하라고 하고 나를 주일학교에 가게 했어요. 그래도 주일학교에 가고 싶어서 몰래 도망쳐서 갔다 와서는 무수히 매를 맞고 다시는 수가 없었어요. 살이 되었을 우리 부모는 나를 감자 부대를 받고 남편에게 팔아 먹었어요. 남편은 나를 부모보다 훨씬 사랑해주었지만 나는 그가 그렇게도 밉고 무섭고 싫었어요. 나는 부모가 너무 미워서 원수를 갚고 남편도 미워서 원수를 갚았어요. ! 그러나. . ." 하더니 그는 이번에는 우는 대신에 치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원수를 갚은 일은 잘못한 것이죠?" 그는 나를 본다. 나는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제일 좋을지 몰랐다. 나는 하는 없이 "예수님은 그러한 죄를 지은 것도 잘못한 줄만 알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란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하니까. 예수님 앞에는 죄니 작은 죄니 하는 일이 없고 같이 보이니까." 그는 내게 끌린 듯이 가까워지며 "선생님은 내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시죠? 저는 무서운 일을 했어요. 그렇게도 밉고 밉던지 원수를 갚아도 마음이 시원하도록 갚았어요. 부모에게 갚을 원수는 그렇다 치고 남편을 기어이 소원대로 죽여 가지고 각을 뜨기까지 했으니까요. 각을 뜨면서 속이 시원했어요. 그런데 선생님!"

그는 추위와 두려움과 회심에 (悔心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 전신을 와들와들 떨면서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후회스러울까요? 부모를 미워하고 남편을 미워한 만큼 내가 미워지는 같아요. 그리고 각을 버림을 당한 남편이 그렇게 불쌍해 지고 가엾어져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선생님! 남편은 지옥에 갔지요?" 라고 그는 당황하고 급한 말로 내게 물었다. 나는 놀라서 대답하기에 곤란했다. 나는 대답 대신에 질문을 하였다. "누가 네게 지옥이라는 것을 말해 주더냐?" "우리는 언제나 지옥에 ! 지옥에 ! 그렇게 욕하며 살아요? 그러나 지옥이 있는가요?"


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욱 당황하고 급한 말로 "그러기에 남편은 지옥에 갔을 것이 아니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 하고 탄식의 한숨을 짓고 자기의 머리를 잡아 뜯으며 고민하면서 잠을 자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자라고 아무리 재촉을 해도 그는 자려고 하지 않았다. 말도 없이 그는 깊은 고민에 잠기어서 자기를 수없이 미워하고 있었다. 입술을 물고 있다가 머리를 잡아 뜯고 가슴을 때렸다. 아침이 되었을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했다. 모질고 악한 살인범은 마치 무슨 아름다운 초상화 같았다. 검고 머리는 뒤에 늘어지고 맑고 얼굴에는 수심이 끼고 눈은 애원하는 불안의 눈이었지만 그렇게도 아름다웠다.


내게 제일 깊은 인상을 것은 그의 음성이었다. 말하는 것이 그렇게도 음악적이었다. 나는 그에게 반한 듯이 바라보면서 "92! 너는 굉장히 이쁜 여자다!" 라고 하니까 그는 "나의 연인인 남자도 언제나 그렇게 말했어요. 누구든지 저를 보는 사람마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어느 어떤 사람들이 와선 나를 마적단의 여왕으로 삼겠다고 했는데 나는 강한 남자들이 무섭고 싫어서 거절했지요." "92번의 말소리에 나는 반했어." "선교사가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을 가르쳐 주면서 소리를 천사 소리보다 좋다고 말을 아직도 잊었어요."


나는 생각했다. "천사보다 아름다운 음성을 가졌으면 무엇하며 남보다 유달리 예쁜 얼굴과 눈을 가졌으면 무엇하나?" 사형수! 면치 못할 신세였다. 나는 가슴이 저리고 아팠다. 그는 항상 앞에서 어려워하는 태도였다. 무식하고 가정 교육도 받고 포악하고 악독스런 살인범 사형수가 어디서 이렇듯 바른 예절을 배웠으며 어떻게 이같이 조심하는 태도를 지키는지 나는 기적같이 생각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날도 풀려서 그렇게 몸도 떨리지 않는 아침이었다. 아침 기도가 끝난 후에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선생님!" 하고 불렀다. 나는 대답을 하고 그의 마음에 심상치 않은 무엇이 있는 것을 짐작하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조금 주저하더니 "선생님, 부탁 하나 해도 될까?" ", 되고 말고 내가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볼 테니 말해 ." 그는 더욱 심각해지면서 "선생님이 예수님께 부탁 하나 해주실 있을까요?" "무슨 부탁인데?" "선생님이 예수님께 부탁하시면 예수님은 들어주실 거예요." "그래 무언데?" "예수님께 부탁을 해주세요. 부탁해서 저를 우리 남편 있는 지옥에 보내 달라고요. 저는 남편에게 가서 힘을 다해서 사과하고 남편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을 제가 받으려고 해요. 그래 남편을 위로하고 사과홰야만 되겠어요. 선생님, 부탁 해주세요. 저는 여기서 선생님 말씀을 듣고 제가 회개했으니까 예수님이 저를 천국에 보내실까봐 두려워졌엉됴. 같은 것이 어떻게 천국에 가서 있을 있겠어요. 불안하고 미안해서 저는 도무지 천국에 있을 면목이 없으니까요. 저를 지옥에 보내 달라고 부탁해 주세요."


그가 너무도 간청하고 너무도 안타까워하므로 나는 그의 모습만 보고 그의 말을 듣고만 있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 애가 듯이 " 가지 선생님 부탁하겠는데 들어주세요." "무언데?" "저를 속히 사형하도록 부탁해 주세요. 이때까지 저는 죽는 것이 너무도 무서워서 무엇을 묻든지 '몰라요' 왔는데, 이제는 제가 판사 앞에 나가서 사실을 말하고 속히 사형시켜 달라고 하겠어요. 사는 것이 너무도 괴로워요. 남편 생각을 하니 너무 괴롭고 아파서 살겠어요. 만일 판사가 속히 사형해 주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어요."


나는 일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의 기한이 되어서 어느 아침에 남자 간수 사람이 굵은 노끈과 쇠수갑을 가지고 여감방에 들어왔다. 앞에 서더니 92번을 불렀다. 92번은 놀라지도 않고 조용히 일어나더니 손을 이마에 잡아 대고 중국식의 절을 하면서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는 깊이 허리를 숙이고 이마를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다시 손을 잡고 이마에 채로 엎드려서 내게 절을 하면서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다시 번을 했다.


문이 열렸는고로 남자 간수 셋과 여자 간수장과 담당 간수는 눈을 둥그레 뜨고 92번의 하는 모양을 보고 있다가 92번이 조횽이 문밖으로 나서며 손을 내어민즉 수갑을 채웠다. 수갑을 92번이 먼저 걸어나간다. 밧줄로 매어 끌어가야 줄로 알고 남자 간수가 셋이나 들어왔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쳐다보며 92 뒤로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몰랐다. 그러나 눈물인지 감동의 눈물인지 모르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어찌 안이숙만 천국 시민의 법인 사랑의 계명을 이렇게 멋지게 지킬 있었다고 할까? 오늘날도 적지 않은 성도들이 산상설교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08 12 21 KBS 스페셜로 방영된 “엘렌 가족 이야기, 8년”이란 생활 영상이 있다. 미국 볼티모어에서 살고 있는 69세인 시각 장애인 올스 니콜스 부부. 니콜스는 연방 공무원으로서 사회보장국에서 42 간이나 일하고 있다. 부부는 시각 장애인으로서 한국에서 버려진 시각장애아 4명을 차례로 입양하여 예수님의 사랑으로 키웠다. 명의 시각 장애아들은 (김병관, 1976 12 입양), 마크(강태우, 1978 10 입양), 엘렌(김광숙, 1983 12 입양), 세라(신강미, 1984 3 입양) 등이다. 아이들은 입양될 당시부터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부부가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사람의 성인으로 키워 내기까지의 과정을 취재했다. 막내는 25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담요와 젖병에 싸서 버려진 아이였다. 시각 장애 아니라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였다. 막내는 장애인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집에 오면 똥오줌을 많이 눈다.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빠 니콜스는 때마다 기저귀를 갈아준다. 언니 세라는 한국명 신경미인데 정상인과 결혼하여 정상 아기를 분만하여 살고 있다. 세라는 자폐증을 지닌 막내 동생과 특별한 교감을 갖고 있다. 니콜스 부부는 말한다: “사랑은 성과를 바라지 않는다. 스스로 말할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입양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조건없이 사랑할 뿐이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Ὑμεῖς ἐστε τὸ ἅλας τῆς γῆς· ἐὰν δὲ τὸ ἅλας μωρανθῇ, ἐν τίνι ἁλισθήσεται; εἰς οὐδὲν ἰσχύει ἔτι εἰ μὴ βληθὲν ἔξω καταπατεῖσθαι ὑπὸ τῶν ἀνθρώπων)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 땅의 소금”이라 부른다. 여기서 그가 염두에 두신 것은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방부력일 것이다. “세상”으로 번역된 헬라어 "" 땅이란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는 인간 사회, 우리 삶의 처소로서의 세상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신앙 생활을 통해서 세상에서 방부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어 세상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시지만 ( 104:30) 그분의 빛을 받는 성도는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서 부패를 막는다.


예수께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이렇게 중대한 과업을 맡기신 것은 세상을 대하는 성도들의 시각에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요하네스 바이스나[1] 밀림의 성자로 불렸던 알버트 슈바이쳐 (Albert Schweitzer)[2] 같은 비평학자들은 주님이 유대인의 묵시 사상에 심취하여 세상의 종말이 바로 다가왔다는 기대감 속에서 사셨다고 했다. 그런 사고에 의하면 산상설교는 주님의 사역 기간과 임박한 종말 세상 사이의 짧은 중간기에 실천해야 중간기 윤리 (an interim ethics), 잠정적 윤리이다. 아니다. 이른바 바이스나 슈바이처 같은 유대적 묵시 사상에 영향 받은 묵시 종말론적 틀로 주님의 사고를 조명한 것은 방향에서는 좋았으나 결론에서는 전혀 잘못된 사고로 나아간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주님은 임박한 세상 종말과 시대를 기대하고 십자가에 자기 몸을 던졌으나 몸은 산산조각 찢어졌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의 기대와 달리 지속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슈바이처는 주님의 고귀한 구속 사역을 실패로 단정해 버린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부정적이고 금욕적인 생활양식을 제시하시지 않고,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하여 불교처럼 염세주의적 자세를 가지라거나 세상 일에 무관심하라고 요청하신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 사회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라고 명령하고 계시다.


천국의 시민들의 세상에서의 이러한 삶은 그들의 삶이 영적인 삶에 (예배나 기도, 성경읽기, 성도들의 모임 ) 종속되는 부차적인 삶이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은 성도들의 본질적인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 맛을 잃은 소금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짓밟힐 뿐이라는 가르침은 성도들이 수도원에 들어가서 세상과 담을 쌓은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어진다. 성도들이 소금의 “짠”영향을 세상에 끼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것은 소금으로서의 , 착한 일들을 하는 삶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으나, 구원 받은 자이기에 소금의 맛이 당연시 된다는 의미이다. “밖에 버리워”라는 표현은 우리 성도들이 세상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8복의 마지막 항목에서 의를 위해서 핍박을 당하고 주님 때문에 욕을 먹는 일이 복되다고 하셨다면, 그런 핍박과 먹는 일은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주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받는 일이 소금이 짓밟힌다는 말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소금이 짜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핍박하고 욕한다는 것이다. 만약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소금을 밖에 버린다/ 던진다는 것은 영원한 형벌에 처할 세상 사람들의 형편에 떨어지리라는 암시를 준다.



[1] Johannes Weiss, 「하나님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Jesu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1892); 독일어 원작 Die Predigt Jesu vom Reiche Gottes, (Goettingen 1892).

 

[2] Albert Schweitzer (1875-1966),「역사적 예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1906); 독일어 원작 Von Reimarus zu Wrede-eine Geschichte der Leben-Jesu Forschung.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Ὑ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οὐ δύναται πόλις κρυβῆναι ἐπάνω ὄρους κειμένη)

구절의 의미는 15, 16절과 함께 고려해야 밝혀진다. 15, 16절에서 점은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과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13) 말씀을 함께 고려해 보자. 말씀은 성도들이 소금과 빛이라는 것인데, 주님은 소금에는 ""이란 () 단어를 사용하시고 ""에는 "세상"이란 (코스모스) 사용하셨을까? 우리는 어가 서로 병행어라 이해한다. 권연경 교수는 헬라어 ""에서 ""이란 의미에 강조점을 두어 "세상"이란 의미와 구분하고자 한다.[1] BDAG 사전은 '' 의미를 1) 인류의 거처로서의 지구 표면 (하늘과 대조된다); 2) 지구 거민들, 인류 ( 5:13, 10:34); 3) 지구의 일부, 지역, 나라; 4) 바다와 대조되는 마른 , ; 5) 대양 아래를 형성하는 지구 모양의 표면; 6) 지구 표면, 경작지 등으로 정의했다. 과연 권교수의 주장대로, 경작지로서의 ""이란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를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했을까? 권연경은 주장하길, 13절에서 "땅의 소금"이라 하시고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라고 하신 것은 소금이 방부제나 맛을 내는 조미료로서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믿음이 부패해 지는 점에 강조점을 두셨고, 결국 여기서 소금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구약에서 정복한 땅이나 저주 받은 땅에 소금을 뿌리듯 ( 29:23, 9:45) 혹은 복되지 아니한 땅을 "소금 "이라 ( 47:11) 하듯 부정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너희는 (사람들 사는) '세상' 소금" 아니라, "너희는 '' 소금"이라고 강조하고 부정적인 측면에 주님의 강조점이 있다는 권교수의 주장은 설교자들이 일방적으로 소금의 긍정적인 측면만 강조한 대한 반발일 있으나, 그의 주장이 전부 옳다고 없다. 오히려 "땅의 소금"이란 의미보다는 "세상의 소금"이란 번역이 적절해 보인다. 비록 주님이 잃은 소금이 밖에 던져지고 사람들의 아래 짓밟힐 것을 강조하셨지만, "너희가 / 세상의 소금이라" 하실 때는 긍정적 의미도 얼마든지 포함되었다고 가정할 있기 떄문이다. 권교수의 주장대로, 여기서 헬라어 '' ""이란 의미라 하자. 그렇다면, 주님의 의도는 "너희는 (저주 받은) 땅에 뿌려지는 소금이다"라는 의미이겠는가? 아니면 "너희는 (저주 받은) 땅을 적시고 있는 소금이다"라는 의미이겠는가? 만약 맛을 잃는다면"이라는 (가정적) 부정적 사고는 "너희는 / 세상의 소금이라" 진술 다음에야 도입되는 사고이기에 처음부터 그렇게 부정적인 개념을 담은 진술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지만 만약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 . ." 으로 이해해야 옳다.


그리고 구약에서 저주 받은 땅에 소금이 뿌려진다는 사고나 생수가 채우지 못한 경작에 좋지 못한 소금 땅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는 "소금" 주님의 말씀에서의 "소금" 동일시하기란 어렵다. 소금과 땅이 부정적으로 결합되는 구약적 사고에서, 저주 받은 것은 땅이지 잃은 "소금" 아니기 때문이다. 경작지로서 부적합한 "소금 "이란 말에서의 "소금"이란 의미도 주님이 사용하신 "소금"이란 말과 연관되지 않는다. 맛잃은 소금이 땅에 던져지고 짓밟히는 상황의 소금은 이미 맛을 상실해서 땅을 소금 땅으로 만들 능력도 없는 것이다.

다시 우리의 질문에로 돌아가서, 주님은 "땅의 소금" "세상의 소금"이라고 달리 표현하셨을까? 우리가 보기에, 헬라어 "" 말은 "코스모스"처럼 여기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래서 결국 단어는 동의어이고, 같은 의미를 다른 단어로 표현한 이유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수사적 요소 때문이라 본다. 그렇다면 헬라어 "코스모스" 단어의 의미는 BDAG 사전에 어떻게 정의하는가? 1) 치장, 단장 (adornment, adorning 2) 질서 잡힌 상태, 질서 3)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의 총합 (the sum total of everything here and now), 세상, 우주 4) 동물들 이상 차원의 모든 존재들의 전체 총합, 세상 5) 인류의 거처로서의 지구/ 세상, 하늘과 대조되는 지구/ 세상, 자기 집과 대조되는 외부 세상 6) 인류, 세상 7) 여러 측면들을 지닌 인간 존재의 체계, 세상 (the system of human existence in its many aspects, the world) 8) 총합, 전체의 집합적 측면 (collective aspect of an entity, totality, sum total) .


신약이나 70인역에서 헬라어 '' '코스모스' 함께 사용된 경우들은 다음과 같다: 2:1, 4:17, 시경 (Book of Odes 동방 정교회의 ) 12:2, 지혜서 1:14, 11:22, 3:26, 24:21, 17:24, 11:38, 13:8, 17:8 등이다. 이런 구절들 중에서 지혜서 1:14, 13:8, 17:8 등에서 단어가 병행어로 나타난다. 병행어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단어가 동일한 의미와 뉘앙스를 구절들에서 전하는 것은 아니다. 단어는 병행어로 사용될 때에도 약간 다른 뉘앙스를 전한다.


13절과 14절에서 "" "코스모스" 병행어로 사용되었어도, 단어 사이에 세밀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보기에 특별히 차이나는 뉘앙스는 없어 보인다. 사람사는 세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는 "세상"에서 착한 행실을 행함으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οὐδὲ καίουσιν λύχνον καὶ τιθέασιν αὐτὸν ὑπὸ τὸν μόδιον ἀλλ᾽ ἐπὶ τὴν λυχνίαν, καὶ λάμπει πᾶσιν τοῖς ἐν τῇ οἰκίᾳ)

14절에서 문장의 관계는 무엇인가? 둘째 문장의 사고는 성도를 세상의 빛으로 비유한 말씀에 부속되는 것인가? 아니면, 둘째 문장은 첫째 문장의 사고와 병행되는 것인가? 병행된다고 이해할 있다. 빛된 성도들이 사는 위의 도시는 낮에는 햇빛을 받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밤이 되어도 집에서 빛을 발산하므로 사람들에게 숨길 수가 없다. 14절의 사고는 15 사고와 병행된다. 등불은 켜서 등대 위에 두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친다. 집안 사람들은 빛에서 숨을 없다. 또한 산위에 있는 도시는 낮에도 모습이 드러나지만, 밤에도 빛을 발산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도시를 안다. 위에 위치한 도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가 없다. 여기서 도시는 교회이다. 사람들 눈에 도시의 모든 것이 드러나고 있다.


위에 있는 도시라는 표현은 라트가 " 예루살렘" 의미한다고 이해 했다. 예루살렘은 오늘날 교회의 다른 명칭이며, 교회란 (에클레시아) 성도들의 모임을 지시한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나 빛을 발하라! 명하셨다 ( 60:1). 왜냐하면 저들의 빛이 임하였고, 야웨의 영광이 저들 위에 임하였기 때문이다. 2:2-5에서는 말일에 열방이 성전이 위치한 시온 산을 향해 물밀듯 모여들리라 한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말씀한다 ( 2:5). 열방이 시온산 예루살렘으로 물밀듯 모여드는 이유는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이기 때문이다 ( 2:3).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우리가 야웨의 빛에 행하자" 권고하는 것은 성전에 좌정하신 야웨께서 빛을 비추시기 때문이다 ( 80:1, 3, 7, 19, 94:1). 예수님은 9:2에서 캄캄한 흑암의 갈릴리 지방에 나타난 " "으로 묘사되었고, 예고는 4:16에서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거주하시고 사역하심으로 성취되었다.


예수께서 빛으로 세상에 환한 빛을 비추신 일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라는 말씀에 ( 10:38) 비추어 본다면, 그분의 성령 충만한 사역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셨으며, 또한 배고픈 자들에게는 양식을 () 공급해 주셨다. 그리고 모여든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저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선포와 가르치심, 공급과 치유, 그리고 귀신 축사 등으로 요약될 있다. 이런 사역들이 흑암의 땅에 모두 빛을 비추는 일이다. 영적으로 혼미한 자가 복음을 듣고 영혼에 밝은 빛을 받아 살아나며, 세상적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 그릇된 사고에 잡힌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침으로 저들이 온전한 생각을 갖게 되고, 병든 자가 고침 받아 건강하게 되고 귀신에게 잡힌 자가 자유를 얻으며 배고픈 자가 배부름을 얻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해야 착한 일들이고 (16) 어둔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역이다.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οὕτως λαμψάτω τὸ φῶς ὑμῶν ἔμπροσθεν τῶν ἀνθρώπων, ὅπως ἴδωσιν ὑμῶν τὰ καλὰ ἔργα καὶ δοξάσωσιν τὸν πατέρα ὑμῶν τὸ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여기서 14, 15절의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빛은 성도들의 행하는 착한 일들이다 (καλὰ ἔργα). 성도들이 행하는 일들이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처럼 빛을 발한다. 세상 사람들은 빛처럼 다가오는 성도들이 행하는 일들을 듣고 보고, 자신들의 어두움의 일이 잘못된 것임을 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5:8) 권면했다. 빛의 자녀들 혹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는 착한 일들은 20 이하에서 언급된 6가지 대조에서 주어진 주님의 가르침들을 따르는 삶일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21-26), 간음치 말라 (27-30), 이혼 (31-32), 맹세 (33-37), 동해 보복법 (38-42), 원수 사랑 (43-48) 등에서 주님은 당대 유대교의 율법 해석과 차원이 다른 해석을 가하셨다. 그리고 6-7장에서 지속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 삶이 착한 일들이다. 착한 일들은 궁극적으로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일들을 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마태복음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은 여기서 처음 나타난다. 구약에서 종종 하나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그분의 아들로 언급한다 ( 4:22, 32:5, 6, 1:2, 63:16 ).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의 아들로 지칭된 것은 개개 성도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란 집단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개개 성도의 아버지로 친근하게 소개한 것은 예수님의 교훈에서 처음 나타난 사고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아버지라는 명칭은 개개인이 그분과의 부자 관계를 형성함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향유할 있다는 영적 비밀을 알려준다. 그리고 개개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교제할 , 하늘 아버지의 천국에 당당히 들어가는 특권을 소유한다는 암시도 준다 (9, 13:43, 12:32 참조).


이렇게 개인들에게 적용된 "하늘 아버지"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구원사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이상 이스라엘 민족에게 속하는 특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성도 개개인의 권리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하나님을 자신들의 아버지라 부를 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혈통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타파하고자 했다 ( 3:9). 당대 유대인들의 생각과 달리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개인적인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번역한 표현은 헬라어 원문에서 τὸν πατέρα ὑμῶν τὸ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인데, 단순히 하늘에 계시는 분이란 의미가 아니라, 말하자면,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표현한다. 말하자면, 하늘은 땅과 구분되는 어떤 우주의 영역이란 의미라기 보다, 하나님의 거처 혹은 통치자의 처소를 의미한다. 우리가 백악관이라 (白堊館) 하면, 문자에 매달려 "하얀 " (White House), 빨강색이나 검은 색으로 칠한 집이 아니라, 하얀 색으로 칠한 집이란 의미라 이해한다면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표현에서 "하늘" 복수형인데, 이는 구약의 용례를 반영한 것이고, 하늘응 여기서 인간의 거처와 구분되는 하나님의 거처 혹은 우주의 통치자가 거하는 집을 의미한다. 예컨대, 66:1에서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하지 않았던가? 또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하였다 ( 5:2).


그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표현은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너희 아버지" 번역함이 적절하다. 1:5에서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잡은 자를 끊으리니' (wühikraTTî yôšëb miBBiq`at-´äwen wütômëk šëbe† miBBêt `eden) 아람 백성이 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했다. 한역은 "아웬 골짜기에서 (보좌에) 앉은 자를 끊으며/ 벧에던에서 잡은 자를 끊으리니" 번역해야 병행법에 어울린다.


리델보스는 그의 마태복음 주석에서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매우 개인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거의 매번 복수 대명사형을 사용하셔서 '너희 아버지'라고 한다든가 제자들에게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사실을 주목했다. 그것은 단지 예수께 항상 한두 사람 이상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만은 아니라 "그가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시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늘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부자 관계는 예수님과의 연합, 나아가 주님을 믿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연합으로써만 이룰 있다는 것이다. 앞에 언급한대로 예수께서 당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대조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개개인의 책임을 강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버지”라는 말과, 예수께서 계속하여 사용하셨던 복수형 “너희 (하나님)”라는 표현은 그가 구약의 언약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1] 권연경, "빛과 소금 본문의 ( 5 :13-16): (신약성경 바로 읽기)," 유튜브 방송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