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게인은 부지중의 죄와 연관하여 고대 중동 사람들의 사고를 엿보게 해준다 (Roy Gane, "Leviticus," in ed. J. H. Walton, Zondervan Illustrated Bible Backgrounds Commentary (Old Testament), (2009), I,294).
고대 중동인들은 신들이 초인적인 지각을 가지고 인간의 잘못들을 인간이 부지중에 했건 알고 했건 간에 처벌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은 이유도 모르고 재앙을 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떤 애굽인은 신에게 긍휼을 이렇게 간청하였다:
"많은 나의 잘못들을 처벌하지 마소서! 나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나는 소가 풀을 따라가듯, 온 종일 내 입을 따르는 정신 없는 놈입니다."
이런 종류의 불확실성은 신들이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로 더욱 가중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의로운 수난자는 이런 문제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는 이런 것들이 한 신을 기쁘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좋아 보이는 것이 신에게는 모욕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바가 그의 신에게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불확실성은 해결책을 요청했다. 신들을 달래기 위해, 혹은 귀신이 가져오는 재앙을 면하기 위해 행해야 했던 주술 의식들이나 주문들 제사들을 아는 것 외에, 제사장들은 종종 여러 변수들을 정리하고자 점술을 행하곤 했다. 예컨대, 왜 신들이 그처럼 행동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달래곤 했는지 등. 그러나 점술이 항상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어떠했던가? 그들에게 점술은 필요하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몇 가지 요소들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아주 단순화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1) 유일신 체제에서는 어떤 신에게 접근해야 할지를 결정할 필요가 없었다.
2) 제의 의식을 통한 해결책을 요청하는 죄가 야웨께서 주신 계명의 위반으로 규정되었다.
3) 부지중에 죄를 범한 이스라엘인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때에만 속죄제/ 정결제를 드려야 했다 (레 4:14, 23, 28).
4) 광범한 범주의 죄들을 해결하기 위해 제한된 제의 유형들이 (번제, 정결제, 배상제) 규정되어 있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가 주어지지 아니했던 이방인들은 (시 147:20) 자신들이 행한 잘못들에 대해서 초자연적인 존재인 신들이 처벌을 하는 것을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으나 도대체 자신들의 어떤 행위가 어떤 신을 진노케 하는지, 그 진노를 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를 못했다. 그저 오래 전에 자기 조상들에게서 전수되어 온 심하게 왜곡된 참 계시나 자신들이 머리로 고안해 낸 인위적 방식들을 통해서 신들이 내리는 재앙을 면하고자 온갖 점술과 미신적인 요소들을 동원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얼마나 인간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오늘날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오늘날 어둠 가운데서 자신에게 닥치는 재앙들이나 질병 사고 등에 대해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한다. 왜 내게 이런 일들이 닥치는지 알지를 못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성령님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으며, 자신의 죄를 온전히 회개할 때 모든 징벌적 재앙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믿음 생활이란 불신자들이 지지 않는 무거운 짐을 지는 (예컨대, 술 담배 금지, 주일 예배, 헌금, 십일조 등등)어리석은 짓 같으나 실상은 그 반대이다. 어둠 속에서 불확실한 사실들로 인하여 두려움과 초조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살이 대신에 참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서 그분의 기쁜 뜻을 행하는 삶에는 불확실성이 크게 감소되고 앞날에 대한 분명한 소망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과 소망찬 인생을 사는 신앙인들의 중요한 생활 패턴은 기도와 말씀 읽기 그리고 공적 예배로 구성된다. 매일의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신앙인의 심령은 매일 새롭게 되며 매일 위로부터 새 힘과 지혜를 공급받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인은 독수리처럼 창공을 박차고 올라가서 영적인 기류를 타고 유유자적 신앙의 세계를 날아가는 것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 .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 .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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