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시사

임종덕 장로,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

중일사랑 2021. 5. 11. 09:58

미국 육사 교과서에 기록된 한국인 영웅

 

1949년 당시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된다.


임종덕 소년이 고아가 되어버린 그날의 불행을 6.25전쟁 7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 십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가서 교실옆 목조 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있던 큰나무에 올라가 나무속에 숨었다. 잠시후 인민군 찌프차가 집앞에 도착 인민군 요원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침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 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당신네들은 반동분자이기 때문에 인민 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형식적인 재판이 끝나자 총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미리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때 미군을 만났다. 

 

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리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부터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15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그러나 어느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 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도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돌맹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얻어 먹기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하면서 계속 돌맹이를 던지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시간 후에 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다 모아서 비빕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서 임종덕은 행복했다.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나니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 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써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 몇가지를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 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고아 동생들을 살리기 위해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살 돈이 없기에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했다. 그 해가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그리고 약값에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에서 부잣집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디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어느 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좀 고급스러운 손님을 찾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임종덕은 미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6.25 전쟁에 공군을 총지휘하는 제 5공군 사령관 스티브 토마스 화이트 중장) 환송차 대기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미 공군 특급 작전계획 1급 비밀문서가 담긴 가방이었다.

 

문서는 미공군의 북한 폭격 지도였다. 장성은 다른 이가 아니라 5공군 사령관이었기 때문이다. 절도 사건으로 한국의 남대문 지역 경찰과 헌병은 난리가 났다. 당시 남대문 파출소 소장 최중락이 ( 1929-2017년; 서울경찰청 강력과장 역임) 길에서 임종덕을 만나서, ", 났다! 공군 사령관의 가방이 도난 당했는데, 거기에는 북한 공산당을 폭격하는 지도가 들어 있다. 북한을 폭격하지 못하면 다시 공산당이 우리나라에 내려온다!" 임종덕은 자기 부모를 무참하게 살해한 공산당이 다시 내려온다는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 내가 했는데요." 임종덕은 서류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카메라는 남대문 시장에 팔았는데, 다시 가서 보니 서류가 그대로 있었고, 모두 수거할 있었다. 임종덕이 경찰서에 구류되자 같이 있던 고아들이 모두 서울역 앞으로 모였다. 임종덕은 그들에게 무조건 침을 발라서라도 눈물을 흘리며 "쏘리, 베리 쏘리!" 하라고 시켰다.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미군에게 사정을 했다. 미군 사령관은 임종덕의 처지를 알게 되었고 임종덕을 하우스 보이로 (하우스 보이는 의식주가 해결되는 당시 최고의 자리다) 데려가고, 고아들은 미군이 운영하는 제주도 고아원으로 보냈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토마스 화이트 (Thomas Dresser White 1901 –1965) 중장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 비행 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어느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아들이 되라고하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땡큐를 Thank you!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 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 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공군 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즉 같은 하우스 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이란 소년을 만났다 (후일 수원 중앙교회 원로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왔느냐”며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하는 이곳의 하우스보이 자리를 임종덕이 차지할려고 온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며 너무 궁금하다면서 계속 캐 물었다. 김장환은 임종덕과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 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형무소 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 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는 미군들이 먹다 남은 각종 음식이 많이 있어서 김장환은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가 몇 켤레 있는 것을 보고 “저것도 가지고 가서 시장에 팔면 돈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김장환은 절대 반대했다. “음식은 남은 것이니까 다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는 가지고 가다 들키면 도둑놈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적극 만류했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 후에도 혼자서 흙투성이가 된 군화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 가지런히 놓아 주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김장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미군이었다. 김장환은 이날의 인연으로 나무 지게꾼 소년에서 하루 아침에 수원의 미공군 부대 하우스 보이가 된 것이다.

 

김장환의 얘기를 다 듣고난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다 절도와 관련된 운명으로 하우스 보이가 되었구나 하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다. 김장환도 일요일이면 여중생들과 항상 모임이 있는데 너도 꼭 놀러 오라고 했다. 그후 임종덕은 일요일만 되면 초코렛과 온갖 과자를 가방에 가득히 넣고 김장환을 꼭 찾아갔다. 김장환을 꼭 찾아가는 첫째 목적은 여중생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 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아 있았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 상관인 공군 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 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 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 사항이 있다면 말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쓰 는데 하루 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 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이날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난 2010년대에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 목사를 역임한 임동선 목사다 (2016년 작고).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그러나 처음에는 미국행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타일렀다.

한편 임종덕은 지금 양아버지께서 미국 본토로 근무지가 바뀌어서 곧 출국하는데 만일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또다시 고아 신세가 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1953년 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 사령관으로 발령 받아 본국으로 귀환한다. 한편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에 만족하면서 하루 100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는데, 만일 하루에 단어 100개를 못 외우는 날은 그날 저녁 식사를 굶으면서 밤을 세워 가며 단어를 외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임종덕은 하바드 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면서 그의 향학열은 더욱더 불타 올랐다.

 

1957년 하바드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다른 동료들은 모두 여행을 떠났지만 임종덕은 기숙사에서 방학 숙제와 리포터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주제로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 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바드 대학교 학생 잡지에 게제 되면서부터 이 논문은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에다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서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썼는데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한편 임종덕은 <2차 대전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바드 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이날 임종덕의 박사 학위식에 참석한 임종덕의 양부모는 감격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소매치기와 절도로 전락한 전쟁 고아를 자신에게 맡겨 오늘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하게 한 하나님의 섭리에 화이트 장군은 계속 감사 기도를 드렸다. 특히 이날 학위식에는 미 공군 제4대 공군 참모총장인 Chief of Staff of the United States Air Force (1957-1961) 아버지 화이트 장군의 가까운 동료 장성들이 대거 참석해서 자신의 아들처럼 임종덕을 껴안고 박사 학위를 뜨겁게 축하해 주었는데, 하바드대학 개교 이래 그야말로 최고의 “별들의 잔치” 였다.

 

한편 1967년 임종덕은 25살의 나이로 군 입대를 해서 4년간 장교 훈련을 받았는데, 특히 낙하산 훈련과 특공대 훈련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대사관 무관이었다. 미국 정부는 임종덕을 외교관으로 키울 계획이었지만 임종덕은 6개월만에 월남전에 지원 특수부대로 갔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어느 날 임종덕 대위가 작전을 마치고 찝차로 귀대중 매복 중인 베트공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불리함을 판단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대신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

 

임종덕은 먼저 포겟 성경을 끄내어 급히 손에 잡히는데로 몇장을 찢어 몸속에 감추고 성경을 풀속에 던겼다. 이 포겟 성경은 지난날 장교 훈련소에서 함께 지낸 동료가 준 선물이었다. 이때만 해도 임종덕은 확고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동료는 임종덕을 항상 안타깝게 여기고 “너는 키도 작고 연약한 몸이니까 앞으로 전쟁 터에서 하나님이 너를 꼭 지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 임종덕은 그 친구의 강력한 권고로 성경을 꼭 세 번 읽고 난 후부터 성경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임종덕은 그때 비로써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때 장교시절 자신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준 동료가 지금 미국 뉴욕에서 거대한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고 했다.

 

한편 앞서 포로가 되기 직전 성경에서 몇장 찢어서 늘 간직한 것이 성경의 시편 1장에서 3장까지 였는데 특히 3장의 내용이 임종덕에게 항상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시 3:1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2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시온 성전) 응답하시는도다(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임종덕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은 왜 나를 포로가 되게 했느냐”고 짜증석인 기도를 자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속에 탈출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그는 절박함 속에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했다. 총탄이 빗발처럼 날라왔다. 단신의 체구에 단 한군데도 부상이 없이 월맹군 부대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찾아왔다. 부대는 함성으로 뒤덮혔고 특히 월맹군 지역의 포로수용소 위치와 주요 부대의 배치 내용도 알고 왔다.

 

한편 임종덕은 이때 국방성으로부터 정식 그린베레 대원으로 임명 받았다. 그의 활약은 주야간없이 강행되었다. 적진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적군의 고위 지휘자를 납치하며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임무였다.그러나 그는 또다시 두번째 포로가 되었다. 첫 번 포로에서 탈출한지 3개월만 이었다.

 

임종덕은 이제 처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날 장교시절 룸메이트였던 그 친구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하나님은 너를 들어 쓰실려고 이 고된 훈련을 시키니까 지금의 우리들 훈련을 잘 받아내야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너를 도와 줄 것이다”라는 그 말이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다시 탈출의 기회를 노리는데 어느 날 특별한 심문을 받는 날이 왔다.북한군 몇사람이 임종덕을 유심히 보더니 “이 놈은 틀림없는 남조선 군인이다” 하면서 한국말로 심문하는데 임종덕은 그들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영어를 사용했다. 자신은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은 야구 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임종덕을 엎드려 놓고 그야말로 개패듯이 내려쳤다. 임종덕은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임종덕의 입에서 “아이구 죽겠네! 아이구!” 이런 말이 단 한마디만 튀어나오면 한국 군으로 인정할려는 것이다. 그러나 임종덕은 고통과 신음 속에 “오마이갓”이란 말만 계속했다. 북한군은 자기들끼리 조용한 음성으로 “이놈이 진짜 남조선 놈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계속 의심을 하면서 수용소를 나갔다.

 

한편 임종덕은 월맹의 최북단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곳은 당시 소련, 중국, 북한으로 쉽게 보낼 수 있는 포로들의 집합소였다. 그런데 이 수용소에서 임종덕은 기막힌 현장을 목격했다. 어느 날 임종덕은 수용소 사무실로 불려나갔다. 월맹군 장교 4명과 경호원 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소련제 권총에 실탄 1발만 장전해서 임종덕에게 건네는 것이다. 6발이 장전되는 탄창에 1발만 넣고 탄창을 몇 바퀴 돌렸다. 그리고 이 권총을 임종덕에게 주면서 자신의 머리에다 대고 발사하라는 것이다.권총 방아쇠를 당길 때 탄창칸에 다행히 실탄이 없으면 살고 만일 있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 한다. 그러니까 생존 확률은 6대 1이다. 소위 "러시안룰렛"이란 살인 놀음판이다. 당시 책상에는 승자가 가질 돈이 놓여 있었다. 임종덕이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 각자가 택한 것에 돈을 걸어놓고 놀음판을 벌리는 그야말로 인간의 목숨이 파리 목숨이었다.

임종덕은 이 순간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가 지금 이순간 이 악독한 무리들에게 제 생명을 빼앗긴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드디어 경호원의 명령으로 임종덕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히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긴 팀의 군인이 책상 위의 돈을 자신의 포켓에 다 넣었다. 수용소의 고위 관리자들이 하루 하루 일과가 너무나 심심하니까, 이 "러시안 룰렛" 놀음판을 매일 한번씩 하는데 어떤 날 권총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시체는 바로 옆에 있는 강으로 던져 악어가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임종덕은 이 절박한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나 깨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에 매달렸다. 그리고 탈출의 계획을 세웠다. 다시『러시안 룰렛』놀음판에 불려 나가면 지난번과 같은 상황에서 4초안에 현장에서 그들을 무력화 시키고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즉 4초란 것은 1초에 한명씩 박살내고 100미터 정도 떨어진 매콩강에 뛰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놀음판에 불려가던 순서가 임종덕에게는 한달이 되었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임종덕은 날로 초조했다. 곧 월맹을 떠나 북한, 중국으로 끌려 갈 것으로 생각했다. 임종덕은 한달동안 “4초 탈출”이란 작전을 세우고 마치 운동 연습하는 흉내를 내면서 “4초 탈출”의 연속 훈련을 한달동안 계속했다

 

임종덕은 후일 “그때 한 달동안 그들이 나를 부르지 않은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의 탈출을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깨달았다. 한 달이 지난 어느날 드디어 임종덕이 그들에게 불려 나갔다. 4명이 권총을 차고 서로 2명씩 마주보고 앉았다. 이날 따라 여자 경호원이 총을 옆에 세워놓고 서 있었다. 임종덕은 경호원 옆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힘차게 불렀다.

 

“하나님 한달동안 훈련시켜준 4초 탈출의 승패가 지금 하나님 손에 달렸습니다. 우선 권총의 탄환이 첫 번째 탄창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상대방 한명이라도 사살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장교 1명이 자기들끼리 보는 앞에서 권총에 탄환 한 발을 장전 두루룩 돌린후 임종덕에게 건넸다. 권총을 받은 임종덕은 순간 용기가 생겼다. 조금전 그토록 불안했던 마음은 순간에 사라지고 틀림없이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한 달간 연습한 “4초 탈출” 작전을 개시했다.

 

드디어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는 척 하다가 가장 경계하는 표정의 상대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꼬꾸라지자 임종덕은 평소 그린베레의 무술로 상대방이 권총을 꺼내기 전 평소 훈련했던 4초만에 그들을 격파하고 강을 향해 뛰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순간이었다.

 

강물로 뛰어든 임종덕은 지난날 특수전 훈련때 배운대로 뛰어든 그 물속 그 위치에서 10분을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월맹군들이 강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잠깐씩 숨을 쉬기위해 순간 수면에 올라와보니 월맹군들은 멀리 2백미터쯤 떨어진 강물에 사격을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그동안 2백미터이상 도망간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임종덕이 뛰어든 강은 매콩강 지류이기 때문에 악어와 5미터 이상되는 물뱀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임종덕은 강물을 헤엄쳐 떠내려 가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하나님 저 악어들과 물뱀들이 나를 보지 못하게 저 동물들의 눈을 가려 주옵소서” 계속 이 기도만 했다. 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난 임종덕은 드디어 밀림 속으로 숨어 들었다. 매일 같이 큰 개구리를 잡아 먹었으며 어떤 날은 4미터 이상되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나무 위에 걸쳐 말리면서 1주일간 먹었다.


임종덕은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쪽이 남쪽이라고 판단 계속 밀림 속을 걸었다. 어느 날 미군 헬리곱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순간 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강가의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미친 듯이 펄쩍 펄쩍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리곱터는 베트공 복장을 한 임종덕을 발견하고 그가 베트공인줄 알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임종덕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단 한 군데도 부상없이 밀림 속에 숨었다. 임종덕은 엄청난 절망감으로 쓰러져 누웠다.

 

의식이 몽롱해진 임종덕에게 다시 그 헬리곱터 소리가 들려왔다. 임종덕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큰소리로 외치면서 무조건 백사장으로 다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펄쩍 펄쩍뛰었다. 그 순간 미군 헬리곱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했다. 즉, 비록 베트공의 군복을 입었지만 저 사람은 분명 월남군인의 패잔병으로 판단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백사장에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임종덕은 헬리곱터에 타자마자 실신되어 공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임종덕은 의식이 회복되자 자신은 미군 그린베레임을 밝혔다. 즉시 신원을 확인한 미군 수사관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겠다고 연락처를 대라고 했다. 임종덕은 미국 공군 참모총장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연락을 취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임종덕을 조금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임종덕은 즉시 메모지에다 아버지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해 주었다. 공군 참모총장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공군대장 이라고 적어 주었다.

 

[이 부분은 연대기상으로 약간 착오가 있어 보인다. 화이트 장군은 1965년 65세 나이로 소천했기 때문에, 1967년에 베트남 전에 참전한 임종덕과 대화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을 다른 곳에서 옮겨 왔고, 임종덕이 화이트 장군 가방 소매치기 한 부분에서 착오를 바로 잡았으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대조해 볼 원문을 찾지 못하였다]

 

밀림속에서 미군 헬리곱터에 극적으로 구출된 임종덕은 사이공의 공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미국 공군 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 통화가 되었다. 아버지 화이트 대장은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탈출해서 사이공에 왔다는 아들의 육성을 듣고 “이게 혹시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너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네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 했단다!”

 

당시 월남전에서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중 임종덕 대위가 제1호 탈출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물론이며 미국내 참전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화이트 대장은 “아들아 내가 너를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구나 그래 어디 부상 당한 데는 없느냐?”며 계속 울먹이며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울먹이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그가 항상 아버지께 한 말을 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늘 얘기했잖아요?” 임종덕은 1주일 간 공군병원에서 요양을 하면서 3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특히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끝까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째 되는날 임종덕은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았다. “존손 대통령께서 귀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십시오!” 임종덕은 즉시 아버지께 이 내용을 알렸더니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다면서 나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임종덕은 거구의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미 36대 1963-1969년) 은성 무공 훈장을 (Silver Star; 미국 군대에서 수여하는 명예 훈장, 수훈 십자장에 이어 3번째로 높은 훈장) 받으면서 감격했다.

 

 

 

미군 대위에서 소령이 되는데는 6년이 걸리는데 임종덕은 대위에서 바로 소령 특진을 받았다. 특히 은성 무공 훈장을 받은 것은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한다. 훈장 수여가 끝나자 존슨 대통령은 ( 신장 192cm) 임종덕을 신기한 표정으로 아래 위를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키가 164cm의 이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공군 참모총장에게 “귀관은 어떻게 이런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하고 물었다. 대통령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변을 못하자 임종덕은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하자 존슨 대통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에 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즉, 권총 살인 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미노 주연 배우에는 로버트 드 니로를 Robert De Niro 비롯한 존 케세일 John Cazale, 존 세비지 John Savage 등이 출연한 이 영화가 바로 디어 헌터 (The Deer Hunter)였다. 하지만, 이 영화 내용 자체는 임종덕과 하등 무관하다.

*그 후의 이야기

5년후 닉슨대통령의 요청으로 대통령 안보비서관 임명을 받고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했다. 미국과 중국이 적성국가로 외교가 단절된 상태이고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외국의 어떤 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탁구 경기만이 중국 정부와 국민이 거부 반응이 없어서 임종덕비서관은 미국 탁구 선수단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지로 순방하면서 탁구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켰다. 임비서관은 당시 중국 총리 주은래를 여러번 만나면서 주은래가 동생처름 호의를 베풀면서 임종래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모택동도 다섯 번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소개로 결혼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키신저가 가는 길에 인접한 일본에도 알려야겠다고 할때 , 한국도 알려야 한다고 하자 한국은 당신이 가서 알리시오 해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렇게 좋아하면서 일 하느라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은 내가 서겠다고 하며 육여사에게 당부하여 한국의 전통 가문인 민씨 가문의 규수를 소개하여 결혼하고 더욱 친밀해졌다.

1971년 키신저의 중국 극비 방문에서 합의 한 대로 1972년 2월 닉선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양국 공식 성명이 발표되었다. 불과 2.5g 의 작은 탁구공이 미중외교를 성사시킨 1등 공신으로 노벨 평화상감으로 선정되어 세계를 흥분시켰다.

 

임비서관은 LA출장 중에 한국에서 온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 했다가 설교한 목사님을 본 기억이 났다. 20여년 전 1953년 15살 때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화이트장군과 여의도 미군공군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한국공군군종감 임동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목사였다. 그래서 임비서관은 임동선목사에게 70년대에는 한국에서 이민을 많이 올텐데 와서 서로 위로 받을 이민교회를 세우자고 하여 1970년 동양교회를 창립하여 8000명의 교포가 모인 가장 큰 한인교회가 되었다. 1975년에 임종덕비서관을 장로추대를 했으나 자신이 장로될수 있는지 고민하고 장로학과 장로란 책 두권을 필독하고 부족하다고 사양했다.

 

*미국 대통령 4대에 걸친 안보 비서관

함께 일한 헨리 키신저가 국무장관이되어 미,중 외교에 전념하여 순조롭게 이루어졌는데 1965년 양아버지가 65세로 사망하고 화이트장군은 재산을 임종덕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하바드대학과 모교인 미 공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임종덕 비서관은 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안보 비서관을 잘 수행했다. 중국과 친선경기로 시작한 핑퐁 외교도 1979 양국간 국교가 수립되었다.

 

*미군철수를 고집하는 카터 대통령과 결별.

카터대통령이 주한미군을 4~5년사이 완전 철수 하겠다고 할때 주한미군 사령부 참모장 싱글러브소장이 철군 반대를 주장했다. 이틀뒤 5월19일 카터 대통령은 싱글러브장군을 소환하고 참모장 직에서 해임시킨후 카터대통령은 임종덕 비서관에게 “당신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보시요!”하여 "현재 4만여 미군이 주둔하여 북한이 도발을 못하며, 한국은 경제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 카터가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한 도망병을 전부 사면하라는 지시에 아무도 말 안할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달 앞둔 임종덕은 싱글러브장군과 같이 불이익을 받을 줄 알면서도 “전투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이 사면하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 바치겠냐?”고 했다. 

 

그는 1986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후 임동선 목사가 개척한 LA 동양교회 장로가 되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 나온 과정을"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미 육군 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