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시사

시리아-팔레스티나, 주후 70년 예루살렘 함락, 신령화

중일사랑 2023. 10. 31. 13:46

[위키 백과 영문판, 시리아, 유대-로마 전쟁 등 참조]

 

시리아 

여러 문헌들에 따르면 시리아라는 이름은 주전 8세기 루위어 (지금 터키 동남부와 시리아 북부 지역 거민들의 언어) 용어 "수라/수리"와, 파생된 고대 그리스 이름인 Σύριοι, Sýrioi 또는 Σύροι, Sýroi에서 유래되었다. 둘 다 원래 메소포타미아 북부 (현재 이라크) 지역 아슈르에서 (Aššūr 앗시리아) 파생되었다. Robert Rollinger, "The terms "Assyria" and "Syria" again," Journal of Near Eastern Studies. 65 (4) (2006): 284–287; R. N. Frye, "Assyria and Syria: Synonyms," Journal of Near Eastern Studies. 51 (4) (1992): 281–285.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주전 323~150년) ‘시리아’란 용어가 레반트 (Levant) 지역에도 적용되었다. 이 시점부터 그리스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앗시리아인과 레반트의 아람인을 구별하지 않고 “시리아인”이라 불렀다. 현대 주류 학계의 견해는 그리스어 단어가 궁극적으로 아카드어 Aššur에서 파생된 동족어인 (cognate) σσυρια '앗시리아'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 그리스어 명칭 ‘앗시리아’는 주전 8세기 씨네쿄이 Çineköy 비문에 기록된 페니키아어 ʾšr "Assur", ʾšrym에 (앗시리아인들 Assyrians)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레반트 지역/ 문화권

시리아’란 단어가 지정하는 지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경되었다. 고전적으로 시리아는 지중해의 동쪽 끝, 남쪽의 아라비아와 북쪽의 소아시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륙으로 뻗어 이라크 일부를 포함했다. 그런데 대 플리니는 (Pliny the Elder) 서쪽에서 동쪽으로 Commagene, Sophene 및 Adiabene을 포함한다고 설명하기 떄문에, 시리아 북동쪽 지역은 경계가 확실치 않다.

 

시리아는 주전 64년에 로마 공화국에 합병되었으며, 당시 로마 장군 폼페이는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13세 아시아티쿠스를 처형하고 그의 후계자 필로로마이오스 2세를 폐위시켰다. 폼페이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Marcus Aemilius Scaurus)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로마 공화정이 무너지고 로마 제국으로 변모한 후, 시리아는 로마 제국의 황제 속주가 되었고 특사에 의해 통치되었다. 제국 초기 시리아의 로마군은 파르티아와의 (지금 이라크, 시리아 지역) 국경을 방어하는 보조군과 함께 3개 군단으로 구성되었다.

 

주후/ 서기 6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분봉왕 ethnarch 헤롯 아르켈라오스를 폐위시키고 유대, 사마리아, 이두메아를 로마의 유대 속주로 통합했다. 유대 속주는 코포니우스를 유대 총독으로 (Prefect) 임명한 시리아 특사 (Legate)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의 (Publius Sulpicius Quirinius) 직접적인 권위 아래 놓였다. 헤롯 빌립 2세가 죽고 (주후 34년) 헤롯 안티파스가 제거된 후 (주후 39년) 이두래, 트라코니티스, 갈릴리, 베뢰아도 시리아 지방의 관할권 아래로 옮겨졌다.

주후/ 서기 37년부터 41년까지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은 시리아에서 분리되어 헤롯 아그리파 1세가 통치하는 로마의 속국으로 (client kingdom) 변모했다. 헤롯 아그리파 2세가 죽은 후 그의 왕국은 점차 로마 제국에 다시 흡수되었고, 공식적으로 로마 속주로 변모했다.

 

플리니우스 시대에는 시리아 속주가 로마 제국 아래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독립 행정 구역이었다): 남서편의 유대, 나중 주후 135년에 ‘팔레스티나’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늘날 중동 이스라엘, 팔레스틴 자치 지구들 및 요르단); 194년 설치된 페니키아 (Phoenice; 현대 레바논, 다마스쿠스 및 홈스 지역에 해당); 코엘레-시리아 (Coele-Syria 동공 시리아 Hollow Syria) 및 엘류테리스 Eleutheris 강 남쪽 지역. "Syria: Roman provincial organization".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시리아-팔레스티나 (주후 135년 유대 속주를 개명)

 

 

유대인의 3차 반란들

유대인의 1차 반란은 네로 황제 통치 제12년인 주후/서기 66년에 시작되었으며, 로마 총독의 억압적인 통치, 부유한 귀족과 억압받는 대중 사이의 격차, 로마와 유대교의 종교적 긴장에서 비롯되었다. 반-과세 시위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거주하는 가아사랴 같은 혼합 도시들에서의 유대인과 이교도 간의 충돌로 인해 위기는 더욱 커졌다. 로마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는 (Gessius Florus)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에서 돈을 압수하고 수많은 유대인 고위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광범위한 반란이 촉발되었고, 친로마 왕 헤롯 아그리파 2세와 로마 관리들이 도망가는 동안 반군이 로마 수비대를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소요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시리아의 특사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Cestius Gallus) 제12 군단 풀미나타와 (Legion XII Fulminata) 보조 부대들로 구성된 시리아 주둔군을 이끌고 (3만에서 3만 6천 가량) 출전했다. 초기에 파죽지세로 유대 지역을 유린하고 가이사랴와 야파를 (욥바) 점령하여 약 8천4백인의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계속 진군하여 룻다와 아펙을 (안티파트리) 점령하고, 게바에서 반군과 접전하는데, 그 때 로마군 500명이 반군에게 사살당한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포위를 풀고 지중해 해안으로 철수한다. 그런데 철군하면서 벧 호론 에서 유대 반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6,000명의 로마군이 학살당하고 군단의 아퀼라를 (Aquila 군단기) 손실하고 시리아로 갈루스는 황망하게 도망치는 대 참사가 발생했다. 이 때 로마 제국 수뇌부가 받은 충격은 상당하였다.

 

66년, 전직 대제사장 아나누스 벤 아나누스(Ananus ben Ananus), 요셉 벤 구리온(Joseph ben Gurion), 조슈아 벤 감라(Joshua ben Gamla)가 이끄는 유대 임시 정부가 예루살렘에 구성되었다. 요세프 벤 마티야후는 (요세푸스) 갈릴리 반군 사령관으로, 엘르아자르 벤 하나니아는 에돔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나중에 예루살렘에서는 시카리 (단검) 파당의 (열심당) 지도자인 메나헴 벤 예후다가 (Menahem ben Yehuda) 예루살렘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 그는 처형되었고 나머지 시카리 파당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났다. 농민 지도자인 시몬 바르 기오라도 (Simon bar Giora) 새 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

 

주후 70년 유대-로마 1차 전쟁

네로 황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파견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10군단 프레텐시스, 5군단 마케도니카와 함께 67년 4월 톨레마이에 상륙했다. 그곳에서 그는 15군단 아폴리나리스를 인솔하고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도착한 자기 아들 티투스, 로마 속국 유대의 아그리파 2세 왕의 군대와 합세하여, 60,000명이 넘는 병력을 통수하는 베스파시아누스는 갈릴리를 정복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68년에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유대인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해변 가이사랴를 (Caesarea Maritima; 다른 지역의 가이사랴와 구분하고자 이렇게 불렀다) 그의 사령부 기지로 삼고 예루살렘에서 반군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면서 체계적으로 해안선을 정복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요세푸스가 언급하는 숫자에 근거하면, 로마군이 갈릴리를 정복할 때 100,000명의 유대인이 죽거나 노예로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68년 봄까지 가이사랴 마리티마에 진을 치고 유대와 사마리아 고원에서 또 다른 원정을 준비했다. 갈릴리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이전에 케스티우스 갈루스에 의해 파괴되었던 욥바를 (야파) 재건했다. 로마인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은 성벽을 재건하고 가벼운 소함대를 사용하여 상업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의 곡물 공급을 중단시켰다.

 

『유대 전쟁』에서 (3.9.2) 요세푸스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또한 수많은 해적선들을 건조하고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 근처 바다에서 해적들이 되어 그 바다에 아무도 항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기스칼라의 요한이 (John of Giscala) 이끄는 붕괴된 북부 반란의 열성당 지도자들은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탈출했다. 유대 임시 정부에 충성하는 세력과 엘르아자르 벤 시몬이 (Eleazar ben Simon) 이끄는 중요한 열심당 민병대를 포함하여, 예루살렘에는 많은 파벌의 무장세력으로 가득 찼고, 대부분 로마군이 차단선을 치고 포위한 요새 예루살렘은 급진적인 열심당이 많은 부분을 장악하면서 빠르게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그 후 잔인한 내전이 발발했고, 열성당과 광신적인 시카리는 (단검파)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열심당이 이두매인들에게 보낸, 유대 임시 정부가 로마 군대와 평화 조약에 합의했다는 거짓 소식을 듣고 약 20,000명의 무장한 이두메인 군대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것은 열심당에 의해 허용되었고 이두메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열심당의 편에서 싸우면서, 유대 임시 정부의 수장인 아나누스 벤 아나누스와 (Ananus ben Ananus) 요셉 벤 구리온은 (Joseph ben Gurion) 저 악명 높은 열심당 성전 포위 사건으로, 수 많은 민간인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요세푸스는 12,000명이 사망했다고 언급한다. 예루살렘 대학살 소식을 접한 시몬 바르 기오라는 (Simon bar Giora) 마사다를 (Masada) 떠나 그의 충성스러운 군대와 함께 이두메아를 (Idumea) 약탈하기 시작했고 그의 본부를 나안에 세웠다. 그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고 야콥 벤 수사를 (Jacob ben Susa) 포함한 이두메아 지도자들과 힘을 합쳤다.

 

68년 봄,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지역에 있는 반군이 장악한 다양한 요새를 진압하기 위한 체계적인 캠페인을 시작하여 그해 봄에 Afeq, Lydda, Javneh 및 Jaffa를 탈환했다. 그는 나중에 이두메아와 (Idumea) 페레아로 (Perea) 계속 이동했고, 결국에는 바르 기오라 (Bar Giora) 세력이 로마군에게 큰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던 유대와 사마리아 고원으로 진군했다. 로마군은 69년 7월까지 고프나, 아크랍타, 베텔, 에브라임, 헤브론을 점령했다.

 

유대에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로마에서는 큰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68년 중반 네로 황제는 점점 더 변덕스러운 행동을 하여 마침내 그의 지위에 대한 모든 지지를 잃었다. 로마 원로원, 근위대, 몇몇 저명한 군대 사령관들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공모했다. 원로원이 네로를 국민의 적으로 선언하자 네로는 로마를 떠나 비서의 도움을 받아 자살하고 말았다. 새로 취임한 황제이자 전 스페인 총독이었던 갈바는 불과 몇 달 만에 그의 라이벌인 오토에 의해 살해당했고, 이로 인해 4인 황제의 해로 알려진 내전이 촉발되었다. 69년에는 비록 이전에는 이 권력 쟁취 내전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인기가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지휘하에 있는 군단들로부터 황제로 추대를 받았다. 그는 더욱 폭넓은 지지를 얻은 후 자신의 아들 티투스에게 유대 전쟁을 마치도록 맡기고 로마로 돌아가 이미 오토를 폐위시킨 찬탈자 비텔리우스로부터 왕좌를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티투스는 반역 중인 속주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로마 군단을 진격시켜 마을들을 정복하면서 유대 난민의 물결을 야기시켰다. 유대 반군은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대부분 자신들의 통제와 생존에 관심이 있었다. 열심당은 도시 내 내전으로 인해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상당한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열심당 지도자인 요한은 엘아자르를 암살하고 도시에 대한 독재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주요 세력의 지도자인 시몬 바르 기오라는 (Simon bar Giora) 요한의 열심당 세력에 맞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초청을 받았고 신속하게 도시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바르기오라와 (Bar-Giora) 요한(John) 세력 사이의 내분은 69년까지 계속되었다.

 

예루살렘 포위 공격

유대 속주의 요새화된 수도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공격은 금세 교착 상태로 변했다. 도시의 방어선을 뚫을 수 없었던 로마군은 도시 바로 외곽에 영구 진영을 세웠고, 성벽 둘레에 해자를 파고 예루살렘 주변의 성벽만큼 높은 성벽을 쌓았다. 그 도성을 탈출하려고 시도하다 해자에서 잡힌 사람은 누구나 예루살렘을 향한 흙벽 꼭대기에 줄지어 십자가에 처형되었는데, 어떤 날에는 무려 500명이나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두 명의 열심당 지도자인 기스칼라의 요한과 (John of Gischala) 시몬 바르 기오라는 (Simon Bar Giora) 로마군이 포위 공격을 위해 성벽을 건설하기 시작했을 때 서로간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성벽 내부에서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열심당원은 비축된 건조 식품을 의도적으로 불태워 방어자들이 평화를 협상하는 대신 포위 공격에 맞서 싸우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많은 도시 주민과 군인들이 포위 공격 중에 기아로 사망했다. 당대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Tacitus) 예루살렘에서 포위된 사람들이 60만 명에 달했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무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무장 저항에 가담했으며, 남녀 모두 그랬다고 지적한다. 동등한 결단력을 보여 조국에서 추방당하는 삶보다 죽음을 선호했다. 요세푸스는 포위된 사람들의 수를 거의 100만 명으로 추산했다. 전쟁에도 굴하지 않고 유월절 기간 동안 성전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던 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 순례자들은 포위 공격 중에 예루살렘에 갇혀 죽었다.

7개월 간의 포위 공격 끝에 70년 여름, 티투스는 결국 여러 성벽을 무너뜨려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거의 모든 도시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로마군은 가장 약한 지점인 세 번째 성벽을 공격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 성벽은 포위 공격 직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방어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없었다. 로마군은 5월 말경에 셋째 성벽 파괴에 성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중요한 두 번째 벽을 돌파했다. 로마 공격의 마지막 단계 동안 기스칼라의 요한(John of Giscala) 휘하의 열심당원들은 여전히 성전을 장악했고, 시몬 바르 기오라가 (Simon Bar Giora) 이끄는 시카리당은 (Sicarii) 북부 지역을 장악했다. 반란의 마지막 요새 중 하나인 제2 성전은 (개축된 헤롯 성전) 70년 7월 29일 또는 30일에 파괴당했다.

 

예루살렘의 세 성벽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성전과 성채도 결국 파괴되었다. 그 후 도시는 횃불에 불탔고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노예로 잡혔다. 뒤집힌 돌들 중 일부와 충돌 처소는 오늘날도 여전히 볼 수 있다. Giscala의 John은 Agrippa II의 Jotapata 요새에서 항복했고 Simon Bar Giora는 한때 성전이 있던 자리에서 항복했다. 이전에 성전의 대제사장만이 볼 수 있었던 메노라와 하나님의 진설병 상을 포함한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들은 티투스의 개선 행렬 동안 일부 사람들과 함께 로마 거리를 행진했다. 기스칼라의 요한과 (John of Giscala) 시몬 바르 기오라(Simon Bar Giora) 등 700명의 유대 죄수들이 사슬에 묶여 로마에서 행진했다. Giscala의 John은 종신형을 선고 받았고 Simon Bar Giora는 처형되었다. 승리는 성전의 보물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묘사한 티투스 개선문으로 (Arch of Titus) 기념되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고립된 지역에서는 일부 반란이 여전히 계속되어 73년까지 지속되었다.

 

반란 잔당 소탕전

71년 봄, 티투스는 로마로 항해를 떠났다. 그 후 로마에서 새로운 군사 총독 섹스투스 루실리우스 바수스가 (Sextus Lucilius Bassus) 임명되었으며, 그의 임무는 유대에서 "소탕"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10군단 Fretensis를 사용하여 여전히 저항하고 있는 몇 개의 남은 요새를 포위하고 점령했다. 바수스는 헤로디움을 점령한 뒤 요단강을 건너 사해 연안의 마케루스 요새를 점령하고, 사해 북쪽 해안에 있는 자르두스 숲으로 계속 이동하여 유다 벤 아리가 (Judah ben Ari) 이끄는 약 3,000명의 유대 반군을 추격했고, 그는 그들을 신속하게 패퇴시켰다. 질병으로 인해 Bassus는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살지 못했다.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가 (Lucius Flavius Silva) 그를 대신하여 72년 가을 유대의 마지막 요새인 마사다로 (Masada) 진격했다. 그는 10군단, 보조군, 수천 명의 유대인 포로를 동원하여 총 10,000명의 군인을 확보했다. 항복 명령을 거부하자, 실바는 여러 개의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고 마사다 요새를 포위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군이 73년에 마침내 이 성채의 성벽을 무너뜨렸을 때 그들은 방어자 967명 중 960명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해 서편 연안의 마사다 요새

 

반란의 여파: 1인구통계학적 결과

반란에 대한 로마의 진압은 유대의 유대인들에게 인구 통계학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전투와 포위 공격으로 인해 사망하고 여러 도시, 마을 및 마을이 파괴되었다. 파괴와 피해는 전국적으로 균일하지 않았다. 특정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더 광범위한 피해를 입었다. 여러 혼합 도시들에서 유대인이 전멸하였다. Josephus에 따르면 갈릴리에서는 4개의 가장 큰 도시 중 두 곳인 Tarichaea와 (아마도 Magdala) Gabara가 파괴되었으며 Sepphoris와 Tiberias는 로마인과 화해하여 최소한의 피해를 입었다. 파괴의 범위는 트랜스요르단과 유대 중부 지역에서도 다양했다. 모든 지역 중에서 유대 본토가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로드, 야브네 및 그 주변 지역과 같은 일부 도시는 비교적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가장 심각한 황폐화는 유대 산맥에 집중되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어 그 결과 인구의 90% 이상이 손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세푸스는 로마인들이 수많은 노예를 데리고 갔다고 보고한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베스파시아누스가 그리스의 코린트 지협에서 일하기 위해 갈릴리에서 6,000명의 유대인 전쟁 포로를 보냈다고 말한다.[49] 또 다른 시점에서 그는 로마인들이 17세 이상의 포로들을 붙잡아 이집트에서 강제 노동을 시켰다고 기록한다. 가장 어린 포로들은 노예로 팔렸다.

 

Moshe David Herr의 추정에 따르면 유대 유대인 인구의 약 1/3이 반란 중에 사망했다. 이 수치에는 로마인과의 전투만 아니라, 유대인 내부 내전, 혼합 도시에서 이방인에 의해 자행된 학살에서 사망한 사람들도 포함된다. 게다가 기근과 전염병에 희생된 사람들도 많았는데, 특히 오랜 포위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유대에 있던 유대인 인구의 약 10분의 1은 로마인들에게 포로로 잡혔고, 그들의 운명은 종종 비극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혹한 처우, 처형, 강제 노동을 견뎌야 했다. 강한 청년들은 제국 전역의 경기장과 서커스에서 검투사로 일하도록 강요당했고, 다른 이들은 매음굴로 보내지거나 노예로 팔렸다. 그 결과, 유대 지역 유대인 인구의 거의 1/3이 인구통계학적 지도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모차에 (Motza) 800명의 로마군 참전용사를 정착시켰고, 이곳은 콜로니아 아모사 (Colonia Amosa) 또는 콜로니아 엠마우스로 (Colonia Emmaus) 알려진 로마인 식민 정착지가 되었다. 그는 가이사랴에 식민지 지위를, 네아폴리스에 도시 지위를 부여하고 예루살렘에 10군단 프레텐시스를 영구적으로 주둔케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로마의 통제를 강화했다.

막대한 손실과 성전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삶은 유대에서 계속 번창했다. 그러나 로마 통치에 대한 지속적인 불만은 결국 132~136년 바르 코크바 (Bar Kokhba)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는 유대 본토의 파괴와 인구 감소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2예루살렘

역사적 자료와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전쟁 중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포위 기간 동안 1,100,000명이 죽고, 97,000명이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지중해 주변 지역으로 도망갔다고 주장했다. 사망자의 상당 부분은 로마인들이 가져온 질병과 굶주림으로 인해 발생했다. "그들에게 전염병이 닥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근이 닥쳐 더욱 급격하게 그들을 멸망시켰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Tacitus)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는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포위된 자의 총 수가 육십만 명에 달했다고 들었다. [...] 남자와 여자 모두 같은 결단으로 항복을 거절했다. 강제로 고향을 바꿔야 한다면 그들은 죽기보다 사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Tacitus, Histories, Book V, Chapter XIII 이는 예루살렘 성안에 포위된 사람들이 포로로 잡힐 경우, 이방 땅으로 쫓겨날 것이라고 믿었음을 나타낸다. G. H. Van Kooten, “The Jewish War and the Roman Civil War of 68–69 CE: Jewish, Pagan, and Christian Perspectives,” In The Jewish Revolt against Rome, (Brill, 2011), 419-450.

 

Seth Schwartz는 예루살렘이나 주변 지역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썼다. 많은 유대인 반역자들은 흩어지거나 노예로 팔렸다. Seth Schwartz, The ancient Jews from Alexander to Muhammad (Cambridge, 2014) 85–86. 그는 사망자 수가 110만 명이라는 요세푸스의 추정이 믿기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당시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는 약 100만 명 정도였으며, 그 중 절반 정도가 유대인이었다. 더욱이 그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를 포함하여 전쟁 후에도 이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Schwartz에 따르면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97,000명의 보고된 수치가 훨씬 더 신뢰할 만하다고 한다. 이는 인구의 상당 부분이 국가 밖으로 쫓겨났거나 적어도 난민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3사회적 결과

전쟁의 사회적 파급 효과는 심각하여 사회 계층 전체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지위가 상실되었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계층은 예루살렘 및 성전과 밀접하게 관련된 계층이었다. 대제사장 가문들과 그들과 연관된 사람들로 구성되어 막대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귀족 과두정치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전통적인 이해에서는 전쟁 중에 쿰란에 정착한 에세네파와 주로 예루살렘 귀족 출신으로 구성된 사두개파가 반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실종을 명시적으로 확인하는 직접적인 문헌은 없으며 후기 랍비 및 교부 문헌의 힌트는 다음 세기에 사두개인과 에세네 관련 그룹을 포함한 유대인 종파주의가 계속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4경제적 결과

반란은 유대의 경제적, 사회적 환경뿐만 아니라 유대 세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로마제국과 파르티아제국으로부터 순례자들과 부의 유입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막대한 부를 집중시켰던 제2성전은 1세기에 이르러 막대한 경제로 발전했으나 성읍과 성전이 파괴되면서 이런 체제도 끝났다. 게다가, 요세푸스와 다른 학자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모든 유대 땅이나 반란에 참여한 유대인들이 소유한 모든 땅을 압수하고 경매에 부쳤다.

 

히브리어 알파벳에 관한 유대인 백과사전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네로와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주화에 옛 히브리어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2~3세기 전에 그들을 지배했던 자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동기로 그렇게 행동했다. 물론 두 번 모두 짧은 기간 동안 독립을 얻어 자기네 문자를 주화에 새길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방인이 통치할 때, 유대인들은 자기들 동전에 히브리어 문자를 새기지 않았고, 독립을 쟁취했을 짧은 기간 동안에만 자기들의 주화에 히브리어 문자를 새길 수 있었다.

 

5종교적 발전

70년 제2성전의 파괴는 유대교의 전환점이 되었다. 성전이 없는 상황에서 유대교는 토라의 계명을 더욱 헌신적으로 준수하고 회당을 유대인 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반란 이전에 존재했던 회당은 명성을 얻었고 유대인들의 주요 만남의 장소로서 성전을 대체했으며, 랍비는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대제사장을 대신했다. 랍비들은 대반란의 여파로 유대인 지도자들의 공백을 메웠고, 그들의 문헌과 가르침을 통해 성전이 없는 상황에서 유대교가 적응하도록 도왔다. 서기 70년 이후 랍비들의 지배로 인해 이 시대는 때때로 "랍비 시대"로 알려져 있다.

 

랍비 소식통에 따르면, 유명한 바리새인 현자인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리바즈)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관에 누워 자기 제자들이 밀반출하도록 꾀를 써서 살아났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한 후, 그는 미래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야브네에 랍비 중심지를 설립하기 위한 허가를 구하고 얻었다. Ben Zakkai의 탈출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 사항은 확증하기 어려운 반면, 불일치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Josephus의 탈출 및 예측에 대한 설명과 일부 유사성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의 글은 포위 공격 중에 몇몇 고위 인사들이 예루살렘에서 탈출했음을 확증해 주므로 벤 자카이도 (Ben Zakkai) 그들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의 (Rabbi Yohanan ben Zakkai) 지도력 하에 야브네는 유대인의 삶을 재편하고 파괴 후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다양한 제정안이 발표된 저명한 랍비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로 인해 조직적이고 권위 있는 랍비 학문 체계가 발전할 수 있었고, 이는 이후 수세기 동안 랍비 유대교가 유대교의 지배적인 형태로 출현하는 기초가 되었다. 바리새파 신앙을 유지하면서 랍비의 접근 방식은 기록된 토라의 보충물로서 구전 전통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그 결과 미쉬나와 (주후 3세기 초에 편집됨) 나중에 탈무드가 유대 율법과 신앙 지도의 주요 출처 문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야브네 회의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의 정경도 확정되었다.

파괴에 대한 종교적 반응은 할라카(유대 율법), 미드라심, 시리아의 바룩 묵시록의 변화를 통해서도 명백히 드러났는데, 모두 성전 파괴의 고통을 언급하고 있다.

 

6로마에서

학자들은 새로운 플라비안 왕조가 (베스파시아누스 집안) 유대인에 대한 승리를 활용하여 제국을 통치하는 정당성을 확립했다고 주장한다.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에서 개선식이 거행되었고, 두 개의 개선문이 (비아 사크라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과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티투스 개선문) 그곳에 세워졌다. 플라비안 왕조는 또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유대 캅타라는 (Judaea Capta) 제목의 광범위한 동전 시리즈를 출시했다.

필로스트라투스의 (Philostratus) 아폴로니우스 생애(Life of Apollonius)에 따르면, 티투스는 자신이 단지 신의 진노의 도구일 뿐이라는 이유로 유대 인근 집단이 제공한 승리의 화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추가 전쟁들

유대인 대반란은 (1차 전쟁) 유대-로마 전쟁의 시작을 알렸으며, 이는 동부 지중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로마 제국과 유대인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반란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는 긴장이 계속 고조되었다. 동부에서 파르티아의 위협이 닥치자 동부 지중해 전역의 주요 유대인 공동체는 서기 117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115~117년 키토스 전쟁으로 (Kitos War; 2차 유대인-로마 전쟁) 알려진 이 반란은 주로 유대 해외 교포 디아스포라 집단에서 (키프로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유대에서는 약간만 발생) 일어났으며, 조직이 빈약했지만 극도로 폭력적이었고 로마 군대가 진압하는 데 2년이 걸렸다. 키토스 전쟁의 마지막 단계만 유대에서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반란은 유대-로마 전쟁의 일부로 간주된다. 키토스 전쟁 중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키레나이카와 키프로스의 인구가 감소했으며 이 지역의 유대인과 그리스-로마 인구도 감소했다.

 

유대-로마 전쟁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분쟁은 유대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바르 코크바 (별의 아들, 민 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반란으로 (132~136년) 알려져 있으며 유대 지방에 집중되어 있으며 반란은 시몬 바르 코크바가 이끌었다. Bar Kokhba는 처음에는 로마군에 맞서 성공하여 단명한 국가를 세웠지만, 결국 로마의 진압으로 Bar Kokhba의 반군이 패배했다. 그 결과 유대인 대량 학살, 유대교 금지, 지역 이름이 유대에서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바뀌고 많은 유대인이 노예로 팔리거나 지중해 다른 지역으로 도피하는 등 파괴와 죽음이 초래되었다. 하드리아누스의 죽음으로 (서기 137년) 유대인에 대한 제한과 박해가 완화되었지만 유대의 유대인 인구는 크게 감소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 사건의 영적 의미

주후 70년 유대교 본부인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파괴시키셨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성령님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성전이요,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이다 (히, 카할, 에다; 헬, 에클레시아). 더 이상 건물 성전은 필요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파괴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만인을 위해 자기 몸을 속죄 제물로 (한역 신약에서 ‘화목제’로 번역됨) 드리심으로, 더 이상 짐승 제물 제사는 요청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신령한 성전 곧 우리 성도들의 몸이다. 이 신령한 성전은 신인 합일이란 구속사의 목표를 완성시키는 단계이다: 에덴 성소, 이동 성소 (성막), 정착 성소 (성전), 신령한 성전 (성도들의 몸, 성도들의 모임).

그런데 1948년 5월 7일 세계를 떠 돌던 유대인들이 자기 본국에 독립 국가 이스라엘을 세웠다. 이 사건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많은 이들에게 (특히 세대주의자들) 구약 예언 성취 사건이라고 간주된다. 그리고 이 중동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약 예언들은 모두 그들에게서 성취되리라 한다. 이스라엘이 인근 아랍권과 전쟁을 하면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편을 들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실제로 모금을 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이스라엘에게 보내 그들을 돕기도 한다. 그들은 말하길,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구약에 약속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도울 때 복을 받는다고 한다. 실제로 필자는 미국에 거주할 때, 자동차를 몰면서 라디오 방송에서, 1988 공화당 대통령 후보 출마까지 했던 유명한 Pat Robertson 목사가 (2023년 사망; Regent University 로 1990년 개명한 CBN 대학교 설립) 자신이 설립한 CBN 방송의 '700클럽' 프로그램인가에서, 유대인들을 돕는 헌금에 동참하라고 독촉하는 '독수리 후원'이란 방송을 들었던 기억도 있다.

 

구원사의 변화와 구약을 보는 해석의 시각

우리 구주 예수께서 십자가 대속 죽음, 부활, 승천, 메시아 왕으로 하늘 보좌 우편에 즉위하심, 성령 부으심 등 일련의 구속 사건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변천되어 구언약 시대에서 새 언약 시대로 전환되었다. 예수님은 구 언약 하나님 공동체의 마지막 최고 남은 자이기에 그를 믿어 그와 연합한 자들이 이제는 새 언약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을 구성하게 된다. 그들이 이제 신령한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이나 예언들은 예수님과 그에게 연합한 자들에게서 (교회) 성취된다. 즉 교회가 모든 구약 약속들의 수혜자이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구원 역사가 진전 전환되면서, 구약에서 물질적, 현상적, 세상적인 것들이 신약에서 신령화되고 세계화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가령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아브라함 후손으로 구성된 한 종족 중심이었고, 그들은 할례, 음식법, 안식일 준수, 정결법 등과 같이 유대인들에게 특수한 율법을 준수함으로 이방인들과 구분되면서 하나님의 선민된 지위를 지켰다. 그러나 오늘날 새 언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물론 일단 백성이 된 이후에는 구약의 율법도 예수께서 성취하신 제사법과 같은 의식 법규들이나 구약 시대의 지리적 물리적 환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민법이나 형법 등은 성취 내지 폐기되고, 구 언약 체계 하의 법규들로 여전히 새 언약 체계에서도 적용이 가능한 법규들 등은 새 언약 체계 안으로 흡수되어, 일부는 새 환경 새 시대에 맞도록 개정되거나 혹은 신설된 법규들을 준수해야 한다. 즉 율법이 전부 용도 폐기되었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화 과정에 율법이란 나침반과 같은 안내자가 선악을 분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앞에서 신령화란 (spiritualization) 말을 사용했는데,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싸워야 할 원수는 에돔, 모압, 블레셋, 아람,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헷 족속 (히타이트) 등과 같은 혈과 육이었다면 (인간) 오늘날 성도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보이는 인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악령들이다 (엡 6:10이하).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교회) 상속하는 기업도 어떤 한정된 땅 덩어리가 아니라 온 세상이며 (마 28:18이하, 엡 6:3) 또한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땅이다 (벧전 1:4). 사정이 이러하므로, 신약에서 어떤 땅에 대한 언급은 아주 미미하다. 구약에서 가나안 약속의 땅이 아주 중요한 주제를 점한다면, 이에 비해 신약에서는 오히려 영원한 나라에 모든 초점이 향한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란 한 종족 중심의 언약 공동체에게 하나님의 언약, 영광, 예배, 계명, 약속, 메시아 등을 주셨다면, 이제 메시아께서 오신 이후에는 그에게 붙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계승하여 새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서 구약의 모든 약속들과 예언들의 수혜자가 된다. 따라서 모든 구약 예언들을 해석할 때는 저 중동 이스라엘을 보지 말고, 교회를 보아야 한다. 교회에서 일어날 일들을 구약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특히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을 보는 세대주의자들의 시각은 참으로 가관이다. 저 중동 불신자들의 나라 이스라엘이 마치 선의 대변인으로 싸우기나 하는 양 그들을 편들고 그들을 지지하고, 하마스나 팔레스틴 사람들 혹 아랍인들은 적대시하고, 악인들이나 되는 양 사단의 도구로 폄하하기 일쑤이다. 이런 시각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싸워야 했던 거룩한 전쟁의 (성전) 대상인 주변국들이 악의 세력이었듯, 오늘날 새 언약 시대에도 여전히 육신의 이스라엘이 주변국과 싸우는 그 전쟁이 하나님의 대의를 위한 거룩한 전쟁이나 되는 듯이 해석하고, 예언 성취니, 가사 지역의 파괴는 슥 9:5의 예언 성취라느니, 이스라엘은 이제 세계 3차 대전, 아마겟돈 전쟁의 불을 당기고 있다는 등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슥 9: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칠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

 

오늘날 이스라엘은 불신자, 육신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께 속한 신령한 이스라엘, 교회이다. 이 교회는 싸워야 할 대상이 악령들이지 보이는 특정 국가 특정 종족이 (가령, 아랍인들) 아니다. 미국인들 중에 세대주의 신학에 세뇌 당한 보수적인 성도들이 저 중동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보고, 중동 이스라엘을 후원하고 기도해야 한다느니 주장하면서 방송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베니 힌의 집회에서도 그러하고, 달라스 신학교나 무디 신학교 출신 목사들이 그런 설교를 많이 한다. 아주 아주 표적이 빗나간 설교이고, 비성경적이고, 전혀 하나님의 의도와 무관한 거짓 설교들이다.

 

하나님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읍을 파괴시켰고, 유대교 본부였던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시키셨다. 주전 586년에 느부갓네살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파괴한 것과는 맥이 완전히 다르다. 주후 70년에 일어난 사건은 이제 사단의 회당으로 (계 2:9, 3:9) 전락한 유대인들의 유대교를 지탱하는 본부를 제거하는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한 종족 중심의 하나님의 백성은 없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개인적으로 믿어 구원의 백성이 되는 새 언약 시대이다. 다시는 구 언약 체계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즉, 종족 중심의 언약 공동체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주님 재림 즈음에 탄생하는 시나리오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 즈음에 생존할 유대인들에게만 그렇게 특권을 줄 이유도 없고, 언제나, 구원 역사에서 남은 자만 (소수) 구원에 이른다는 선택의 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